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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텍 굴뚝과, 아버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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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텍 굴뚝과, 아버지의 꿈

[마음은 굴뚝같지만] "파인텍 굴뚝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주자"

한 장씩 뜯는 재미가 있어서 요즘 다시 일력이 유행이라고 한다. 일력의 용처가 화장실 밑씻개일 때도 있어서 식구마다 한 장씩 뜯어 가면 날짜가 안 맞는 일도 있었다. 주로 우리 집은 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 일력을 찢었다. 일력 한 장을 뜯어내고, 모든 식구에게 새로운 날을 선물하듯이 말이다.

파인텍 굴뚝 농성이 408일을 넘어서자, 문득 어릴 때 집에 걸려 있던 일력이 생각났다. 파인텍 노동자들의 투쟁 날짜만큼 일력을 뜯어냈다면, 365장의 일력 한 권이 모자란 시간이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라가 있는 두 명의 노동자, 홍기탁·박준호의 아침 일력은 오늘도 한 장이 뜯겨 나갔다. 2015년 차광호가 세운 408일의 기록을 넘기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긴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다 뜯겨 나가고 종이를 묶어놓은 철심처럼 위태롭게 버티는 두 명의 몸과 마음일 것이다. 이들이 버틴 시간은 노동자를 밑씻개만큼으로도 여기지 않는 자본의 시간이며 구겨 버린 인간 존엄의 시간이기도 하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비정규직 강사인 나도 한국의 노동문제에 문외한은 아니라고 자부해 왔다. 근래에는 생활협동조합 아이쿱의 생산기지인 '구례자연드림파크'에서 1년 넘게 분규 중인 노동조합과 어떻게든 손을 잡으려 애쓰는 중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연구자라는 입장을 내세워 짐짓 '자본(가)의 저항'이란 말도 써가며 추상성 높은 말로 사태를 진단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각 현장의 고통은 너무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서 고공농성 중인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 박준호 사무장이 12월 29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고(故) 김용균 2차 범국민 추모제에서 영상통화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작년 11월 파인텍 노동조합원들이 굴뚝에 올라간다는 소식을 먼발치에서 듣고, 나는 좀 싸늘했다. '또 올라가는구나' 정도의 감상만 있었을 뿐이다. 솔직히 장기투쟁을 하는 사업장들의 소식을 듣고 있으면 그야말로 속에 천불이 나서 흘려듣거나 귀를 닫아버리곤 했다. 쌍용차, 유성기업, 콜트콜텍, 아사히 글라스 등 귓등으로 흘려버린 고통이 피눈물이 되어 핏빛 비로 뚝뚝 떨어질 즈음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곳에 사람이 있다.

우선 파인텍 노동조합의 싸움을 보통의 시민 입장에서 이해해 보고 싶었다. 어떤 일을 했던 노동자들이 어떤 일을 겪고, 결국 저렇게 굴뚝으로 올라갔는지 말이다. 그리고 굴뚝에서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말이다. 핵심은 경북 구미에서 견실한 가장으로 살면서 노동을 했던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자리가 사라졌으면 새로운 일을 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에는, 사측의 공장폐쇄는 노동조합을 고립시키기 위한 간편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1980년대 초반 쇠락해 가는 고향에서 이렇다 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아버지는 구미로 이주하려 했다. 구미에 작은 전셋집을 구해놓고, 공장에 취업을 하려던 아버지도 아마 손에 기름때를 묻히는 일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때 가난한 가장들이 몰려갈 곳은 거대한 공단으로 꾸며놓은 구미였다. 각각의 사정은 다르겠지만, 구미 공단 '한국합섬'에서 일을 하던 노동자들의 꿈도 아버지의 꿈과 같지 않았을까?

노동을 해서 밥을 벌고, 가족을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꿈들이었고, 그게 무슨 헛된 꿈이라고 하루아침에 쪼개져 버린 일이 바로 이 '파인텍 투쟁'이다. 한국합섬은 '스타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곧 문을 닫았다. 정말 회사가 어려워져서가 아니라, 그저 저 작은 이들의 평범한 꿈을 빼앗는 재미에 빠졌던 모양이다. 자신의 이윤축적에 해가 될까 우려했던 '김세권'이라는 자본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공세 차원이었다.

연대한 이들에게 이 싸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대답은 비슷했다. '돌아갈 공장이 없다'는 것이다. 차광호의 408일 투쟁 후 김세권이 만든 '스타플렉스'라는 공장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지레 지쳐 나가떨어지길 바라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래서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는 작업 현장인 충북 음성의 스타플렉스에서 성실한 노동을 해 스스로 밥을 벌겠다고 외치려, 굴뚝에 올라갔던 것이다. 그 굴뚝은 김세권이 머무는 스타플렉스 본사에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 차광호 파인텍 지회장과 이승열 금속노조 부위원장. ⓒ이창근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이 움직여 그나마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생사조차 묘연했던(?) 스타플렉스 대표 김세권도 협상장에 나왔다. 하지만 그는 "굴뚝에 올라가면 영웅인가?"라는 모욕적 언사로, 협상 의지가 없이 여론의 압박으로 끌려 나왔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노동자들이 영웅이 되고 싶었다면, 차라리 굴뚝 빨리 올라가기와 같은 기네스북 기록 경신에 나서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저 하루, 하루를 견디다 보니 결국 408일도 넘기고 410일도 넘겨 이만큼 떠밀려 왔을 뿐이다.

2018년 일력이 이제 한 장 남았다. 굴뚝의 하루도 또 지나가고 있다. 일력이 뜯기듯 그만큼 홍기탁·박준호의 몸은 어제보다 더 뜯겼을 것이다. 함께 무기한 단식 중인 차광호의 위장도 피도 말라가고 있다. 20여 일 곡기를 끊은 몸으로 협상장에 들어가 입에 단내가 나도록 자신들의 평범한 꿈을 지켜 달라 호소했을 것이다. 공짜 밥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던 일을 해서 밥을 먹겠다는 일이건만, 왜 이리 가혹하게 구는 것일까. 일력을 뜯으며 힘찬 하루를 다짐하고 가족들의 안녕을 바라는 평범한 꿈이 그토록 사치스러운 꿈인지 묻고 싶다.

2019년 새 달력을 걸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려는 굴뚝 노동자들에게도 새 달력을 선물해주자. 새해의 첫 일출을 또다시 굴뚝에서 맞이하게 하지는 말자. 파인텍 노동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새 달력을 걸며 2019년을 시작할 수 있도록 굴뚝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 주자. 이는 나의 꿈을 응원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 '마음은 굴뚝같지만'은 2017년 11월 12일부터 75m 굴뚝 위에 올라가 있는 파인텍 노동자 홍기탁 씨와 박준호 씨가 하루라도 빨리 내려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는 연대 글입니다. 같은 사업장의 노동자 차광호 씨는 2015년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에 올라 전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일인 408일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지난 12월 24일, 이 기록은 굴뚝 위 홍기탁, 박준호 두 사람에 의해 갱신되었습니다. 이 추운 겨울을 다시 굴뚝 위에서 맞이하게 할 순 없습니다. 이들이 어서 지상으로 내려와 다시 노동자로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길 응원하며, 파인텍 5명의 노동자들이 웃으며 일터로 돌아갈 수 있길 기대하며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릴레이 연재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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