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마지막 본회의가 '빈손'으로 끝나리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여야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하겠지만, 자유한국당의 책임이 크다. 한국당은 국정감사 최대 이슈였던 사립유치원 비리 문제 근절을 위한 '유치원 3법',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고(故) 김용균 씨 사망사고로 관심이 높아진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등 핵심 쟁점이 된 민생법안 처리 과정을 결과적으로 계속 지연시키고 있다. 더 엄밀한 법안 논의가 필요하고, 정부·여당 측이 마련한 법률안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백보 양보해 한국당의 주장을 이해한다 해도, 유치원 3법은 국정감사 직후부터 쟁점이 돼왔고, 산업안전보건법 역시 11월 초에 이미 제출이 완료된 법안이다. 최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뭘 했는지 이제와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서며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권자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한국당이 전통적 지지기반인 경제계와, 지역 정치에 영향력이 큰 사립유치원 관계자들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아서라는 의심은 그래서 민심을 파고든다.
대의민주주의 정치는 결국 여론에 좌우된다. 진보·보수 모두 '포퓰리즘'이라며 여론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행태를 비판하지만, 민심이 정치에 반영되는 통로가 선거인 이상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포퓰리즘과 독재 중에 선택하라면 독재의 해악이 더 크다.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 가운데 택하라면 망설임없이 후자"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은 여론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기제임을 지적한다.
사실 여론은 '핑계'가 되기도 한다. 반대 의견의 존재가 오히려 협상력을 높인다는 것은 정치학·경영학에서 이미 이론이 된 가설이다. 예컨대 쌀 개방 문제를 놓고 외국과 협상 중인 정부에게는, 국내 농민들의 반대 여론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끌고갈 동력을 제공한다.
한국당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국면은 전통적 지지기반인 경제계나 지역구 유지 중 하나인 유치원 관계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여당의 법안 처리에 협조해 주고, 그 반대급부로 일정한 정치적 실익을 얻어낼 기회이기도 했다. 역시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했던 셈이다.
안타까운 청년 노동자의 생명이 스러졌고, 그 노동자의 어머니가 이틀째 국회 회의장 앞을 지키고 서서 "누가 법안의 발목을 잡는지 지켜보겠다"고 절규했다. 사립유치원에 아이를 맡긴 학부모들은 분노와 불안감에 몇 달 동안 국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예컨대 '어떻게 한국당마저 우리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느냐'는 지지층 내부의 항의나 '여론에 무작정 편승하면 안 된다'는 보수적 소신에서의 반대의견이 있더라도 이를 모두 잠재울 훌륭한 '핑계'를 한국당 지도부와 소관 상임위원들에게 제공했다. "아니, 지금 이 법안 반대하고 나서 우리 당보고 다음 선거를 어떻게 치르라는 거냐. 의원 배지 떨어지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냐?" 이 한 마디면 됐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경총과 한유총 등 '총'자 돌림 이익단체의 대변자라는 비난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면서 '총 맞은 것처럼' 우왕좌왕했고, 그 와중에 별다른 실익도 챙기지 못하고 있다. 크나큰 판단 착오다.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첫째, 나경원 원내대표 등 한국당 지도부가 26~27일간 연달아 시사했듯,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규명할 국회 운영위원회 개최 및 임종석·조국 등 청와대 참모의 출석을 요구하기 위한 '지렛대(레버리지)'로 이 법안들을 생각했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사안을 연계해서 테이블에 올리는 정치협상 전술 자체를 나쁘다고만 할 것은 아니지만, 여론을 고려하면 이는 전혀 적절한 전술이 아니다. 운영위 개최를 끌어낼 지렛대가 필요했다면 차라리 대법관 임명동의안이나 국회 특별위원회 연장 안건 등 상대적으로 여론의 직접 반발이 덜한 이슈를 선택했어야 한다.
둘째, 한국당이 대외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여당의 유치원3법은 사적 자치의 영역을 제한하는 "좌파 국가주의"(정용기 정책위의장, 26일 의원총회에서)이고, △산업안전보건법은 "대한민국 산업계 전체를 민주노총이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진심으로 우려했기 때문일 수 있다. 사실 이게 더 문제다. 이념과 소신의 추구도 대의민주제 하에서는 여론 동향을 고려해 가며 해야 한다는 기본적 명제를 망각한 판단 착오다.
예컨대 '유치원법의 전사' 박용진 의원은, 과거에는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전사이고 투사였다. 시위에 나가 화염병을 들었다가 처벌된 전과도 있다. 그랬던 그가 이제 머리띠 대신 넥타이를 매고, 가두시위가 아니라 국회 상임위에 나와, 목청 큰 선동 대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유권자에게 호소한다. 자기 이름을 딴 '박용진 3법'을 발의하는 와중에도 그가 문제의 사립유치원 앞에 가서 피켓 시위를 하거나 비리 유치원장 집 앞으로 쳐들어가기라도 했나? '운동'과 '정치'의 영역은 본디 그렇게 다르다. "좌파 국가주의"와 "민주노총의 산업계 장악"이 진심으로 우려돼서 성난 민심을 외면하겠다는 신념 충만한 이들이 있어야 할 곳은 국회가 아니라 우파 싱크탱크이고, 태극기 집회의 현장이고, 유튜브다.
정치인들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이슈는 언제나 단연 '다음 선거'다. 한국당이 이 문제를 어쩌려는지 알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가 정권 후반부로 갈수록 부정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반사이익만 챙기려 한다면 오히려 유권자의 외면을 받을 것이다. 2012년의 '안철수 현상'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요체였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분노했지만, 그 반사이익만 노리는 것처럼 보였던 야당에 대해서도 미적지근했던 이들의 마음이 찾은 탈출구였다. 이대로라면 설사 한국당의 기대대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아진다 한들, 그 반작용의 에너지는 한국당이 아니라 또다른 '○○○ 현상'을 향할 것이다.
최근 '다음 선거'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대거 바른미래당을 탈당해 한국당 행을 선택한 일이 있다. 이들의 움직임이 나비효과로 이어져 '보수 통합' 정계개편까지 이어질 것인가가 관심을 받은 가운데, 눈길은 역시나 유승민 의원의 행보로 쏠렸다. 그러나 유 의원의 측근 중 하나인 민현주 전 의원은 <프레시안>과 통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한국당)이 달라진 게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 저도 방향을 정해놓고 하는 고민은 아니지만 '어떡해야 하나' 하는 정치적 고민은 물론 있다. 하지만 나경원 원내대표 당선 이후 1주일 동안 하는 것을 보고 혹시나 한국당이 다른 모습을 보일까 했던 기대를 접었다. 특히 법안 등을 놓고 협상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우물 안 개구리를 못 벗어나는구나', '국회 밖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가장 뜨거운 쟁점인 산업안전보건법, 일명 '김용균법'에는 다른 별명도 있었다. '구의역 사고 방지법'이다.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19세 청년 노동자가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 중 열차에 치여 사망한 이후에도 이번 김용균 씨 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들이 제출됐었다. 처리됐냐고? 그랬으면 이번 사고가 났겠나. 그 법안들도 2년째 국회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법안 중 하나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제안이유 : 도급업체의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수급업체 근로자의 작업에 대해 도급업체로 하여금 사전에 책임 있는 안전조치를 강구해야 할 의무를 부여해야만 함. (중략) 아울러 이러한 안전조치에 소홀했을 경우의 처벌 수준도 강화해 법의 실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음.
현재 정부는 급박한 사고의 위험이 있거나 중대재해 발생시 해당 사업장에 대해 작업중지명령을 하고 있으나 현재는 안전·보건상의 조치가 비전문적이고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 작업중지명령의 목적은 '2차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근로자의 보호', '근본적인 사고원인의 조사' 등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임.
따라서, 동 법안에서는 정부의 작업중지명령이 내려졌을 경우에 첫째, 반드시 해당 작업 및 추가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둘째, 위험요인의 제거, 관계 전문가를 통한 사고 원인의 조사, 실효성 있는 재발방지 대책이 마련된 경우에만 작업을 재개하도록 했으며, 셋째, 중대재해보고서를 고용노동부장관에게 제출·공시하도록 해 사업주의 재발방지 대책에 대한 내용과 조치를 근로자도 알 수 있도록 했음.
조문상 표현이나 입법기술상 차이는 다소 있지만, 현재 정부·여당이 주장하고 있고 한국당이 반대하고 있는 내용이 거의 그대로 들어 있다. 원청의 책임을 '모든 수급업체(하청업체) 노동자의 작업'까지 확대하고, 처벌을 강화하고, 작업중지명령을 강화하자는 것이 이 법안과 현재 정부·여당 법안의 공통적인 요지다. 아, 2년 전 법안 얘기를 왜 하느냐고? 이 법안의 대표발의자 이름을 적는 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유승민 의원 외 13인(20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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