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시설에서 살아왔던 나는…
1984년 나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이라는 부랑인 시설에 수용되었습니다. 우린 아버지라는 보호자가 있었고 국민학교도 다니고 있는, 가정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왜 시설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9세의 내 나이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구타와 기합, 고문,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밤에는 동성 간의 성폭력에 휘둘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의식주 모든 것이 상식 이하의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먼 곳에서 형제복지원을 보면, 그러니까 거대한 건물과 자로 잰 듯 반듯한 시설의 모습만 보면 훌륭한 시설이겠거니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 안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매일 반복되는 지옥이었습니다. 난 그곳에서 누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누나와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리고 밥도 많이 먹고 싶었고, 잠도 편히 오래 자고 싶었는데…. 내가 원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때리지만 말았으면, 그저 기합 좀 줄여줬으면 하는 게 내가 형제복지원에 바랐던 소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맞는지도, 왜 기합 받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것들을 줄여달라고 속으로 애원하는 정도가 소원일 정도로 형제복지원 시설이라는 곳은 그러했습니다.
▲ 한종선 씨의 책 <살아남은 아이>에 나온 한종선 씨의 과거 사진. ⓒ한종선 |
또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만나며
살아오면서 '왜? 나는 뭐지? 내가 왜?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점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 끝엔 형제복지원이 있었습니다. 나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면서 형제복지원 피해자 형님, 누님 그리고 동갑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잊히더냐고…요.
그들은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하며, 그러나 문득 자신도 모르게 인터넷 검색창에 형제복지원이라는 단어를 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수많은 유사 사건들을 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잊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잊고 싶다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두렵다고 했습니다.
기껏 벗어났다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어렵게 이룬 가정이 또다시 깨져버릴까 전전긍긍하며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하겠다며 도리어 나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중 한 가지인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연락이 되는 피해자분들은 그나마 자기 의지로 본인의 과거를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습니다만…, 수많은 다른 분들은 형제원에서 겪은 후유증 등 장애로 인해 또 다른 시설에서 생활 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난 그들과 만날 때, 될 수 있으면 형제복지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상처와 같은 아픔을 겪어온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내가 다시 확인차 묻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예의가 아니기에 형제복지원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이제 대책위가 출범하면 그들이 밝혀낼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피해 당사자들이 모르는 사람이고 믿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들에게 신뢰가 쌓일 수 있는 그 무엇인가 '액션'이라도 보여주셔야 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듯 피해자들이 왜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지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리고 왜 지금 내가 혼자 이렇게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고 있는지를 빨리 파악해주시고 많은 전문가들께서 답을 모아야 할 때라고 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현재 피해자들의 고통을 글로 옮기다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나뿐만이 아닌 모든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은 솔직히 말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저 "난 괜찮아"라며 무덤덤하게 말을 하지만, 표현이 불가능하기에 '난 괜찮아'라는 아주 짧은 한마디로 함축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가 형제복지원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분들께 말할 때 웬만하면 항상 웃으면서 말하는 이유처럼 그들은 그렇게 '난 괜찮아'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난 괜찮아"라는 단어를 곧이곧대로 듣고 '괜찮은가보다' 여기고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게 내 개인적 바람입니다.
사회가 노력해야 할 것들을 글로 옮기다
사회 복지 시설의 문제가 어제오늘 있었던 일들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도, 미래에도 형제복지원 사건처럼 사회 복지 시설의 문제는 꾸준히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왜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 기본적으로 따지고 묻고 답하고 하는 기초적인 토론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 구조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돌아감에도 무엇을 논의할 때 특별 계층끼리 하기보다 법을 만드는 사람, 학자, 교수, 복지계 사람들, 그리고 인권 운동가들로만 진행되었다면!
앞으로 두 자리 정도만 더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두 자리란, 토론 주제의 내용 속에 포함된 피해자의 자리.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자리를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국민이 모르고 피해자가 느끼지 못한다면. 훌륭하신 분들이 수많은 토론과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것이 빛이 바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어떤 어려운 일들이 있다 하더라도 해결 못 할 일들은 없다고 봅니다. 해결 못 할 일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그렇게 되겠지요.
▲ 한종선 씨는 자신이 생활했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한종선 |
희망 사항을 글로 옮기다
희망이 있기에 행동할 수 있었고, 희망이 있기에 여러분들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희망을 끄지 말아 주세요. 변방연극제에서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 바다를 건넜다>라는 연극을 하면서 저는 아무런 대본 없이 그냥 무대 위에 서서 저의 이야기를 했었지요. 저는 정신병원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종이로 접은 거북이와,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내가 병원 면회장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들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관객들께 자랑하고자 생각했던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는 순간 가족사진에 비친 아버지와 누나모습을 보곤 생각해두었던 말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곤 다른 단어들이 떠올랐습니다.
"한 손엔 종이로 접은 거북이가, 한 손엔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제가 같이 있는 가족사진이 있습니다. 저의 어릴 적 가족사진엔 아버지와 어머니, 큰누나, 작은누나 그리고 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머니와 큰누나가 없습니다. 이 가족사진엔 이제 셋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저는 이렇게 액자에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가슴엔 그저 텅 빈 액자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가슴속에 빈 액자로 남아 있는 그 자리에 가족을 만들어 주셔야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습니다. 울어서는 안 되는데…, 자랑하고 싶었는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여러분들은 해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별 볼 일 없는 저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이겨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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