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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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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26년, 형제복지원] <4> 독재자의 훈령, 오늘날의 또 다른 훈령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26년, 형제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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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4월 10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국무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특별 지시를 내렸다.

총리 귀하

별첨 정보보고서와 같이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는 바 실태 파악을 하여 관계 부처 협조하에 일절 단속 보호 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전두환


이 지시에 따라 1981년 4월 17일 관계 부처 연석회의가 열렸다. 곧이어 4월 20일부터 8일간 연인원 1만9300여 명의 공무원이 투입되어 부랑인 1850여 명을 단속했다. 다음 해인 1982년부터 개인이 경영하는 복지 법인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소위 부랑인 선도 사업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벌어지기 전 1년 전인 1986년, 36개소의 부랑인 시설에 1만6149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부랑인 시설에는 약 80억 원에 해당하는 국고 보조금이 지원되고 있었다.

이때 단속의 근거가 된 것은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이하 내무부 훈령 제410호)이었다.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 훈령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형제복지원 사건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다툼에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1980년대에 형제복지원 같은 엄청난 폭력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또 내무부 훈령은 단지 과거의 역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1975년의 한국 사회와 내무부 훈령 제410호

▲ 전두환 전 대통령의 특별 지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내무부 훈령 제410호가 발령된 1975년 한국은 이른바 긴급조치의 시대였다. 긴급조치는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의미하는 10월 유신이 단행되었을 때 본격화된 초헌법적인 조치로, 대통령의 판단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1975년 4월에는 긴급조치 7호가 선포되어 고려대학교에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동시에 교내에서 일체의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교내 질서 유지를 위해 병력 동원이 허용되었다. 5월에는 긴급조치 9호가 내려져 정치 활동 금지와 위반자에 대한 영장 없는 체포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7월 16일 사회안전법이 제정·시행되었다. 이 법은 형법, 군형법,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형을 살고 나온 사람들에 대해, 개전의 의지가 보일 때까지 임의적인 구금을 가능하게 한 보안 처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법들은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고 있던 민주화 세력 및 '사상범'을 대상으로 자의적인 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통제도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확산되었다. 같은 해 6월 서울시에서는 650만 서울시민 전부를 대상으로 주거 확인을 실시하였다. 목적은 거동이 수상한 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불순분자의 침투를 예방하는 지역 안보 확보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주거 확인을 정비하여 서울시내 통장과 반장을 예비군 출신으로 대체하였으며, 매년 2회에 걸쳐 주거를 확인하는 통반장 조직 강화를 실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8월 민방위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아래에서는 이렇게 전 사회적으로 통제가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 발령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훈령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세부 절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부랑인이라는 정의

훈령에서는 부랑인을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첫 번째, 훈령 제410호 제1장 제2절에서는 부랑인을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역, 버스 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제1장 제3절 제6호에서는 "걸인, 껌팔이 등 부랑인 외에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를 부랑인에 준하는 자들로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훈령 제410호는 부랑인과 부랑인에 준하는 자의 범위를 매우 넓게 상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관적인 부랑인 정의는 자의적인 단속과 수용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불순분자 색출과 부랑인

부랑인은 사회적 불순분자 혹은 범법자이거나, 사회적 불순분자가 위장하기 쉬운 계층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안보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와 관련해 훈령 제1장 제1절에서는 훈령의 목적 중 하나로 "범법자, 불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서, 훈령 제1장 제3절에서 "부랑인 단속 후 즉시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철저한 신원 조사를 통해 범법자 및 불순분자에 대한 확인 과정을 거치고 부랑인 신상기록카드를 작성"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훈령 제4장 제4절에는 "신원 특이자 및 우범자에 대한 조치"가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1. 수용기관의 장은 신원 특이자 및 우범자로 판단되는 부랑인이 있을 때에는 지체 없이 관할 경찰서장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2. 관할 경찰서장 및 지파출소장은 주 1회 정기적으로 수용 시설을 순찰하여야 하며, 신원 특이자 대장, 범죄인 명부와 대조·확인하여 불순분자 및 범법자의 색출에 철저를 기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 사회적 감시 체계의 구축과 부랑인

부랑인에 대한 감시는 전 사회적인 동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겨졌다. 또한 부랑인은 특정한 거주지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갈 만한' 광범위한 지역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신고는 일반 신고와 지역 책임자 신고로 나뉘어졌다. 일반 신고란 일반 시민에 의한 신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훈령 제2장 제1절에서는 부랑인 신고 센터를 시군구 민원실에 설치하고, 민원 신고 전화를 활용토록 하고 있었다. 덧붙여 관내 주민, 공무원, 학생, 상인 등 모든 시민이 부랑인을 발견 시 즉시 신고토록 계도하며, 이를 위해 신고 절차와 신고 전화 번호가 담긴 유인물을 배부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2장 제2절에서는 부랑인의 배회가 예상되는 역, 터미널, 지하도, 육교 등과 우범지역에는 지역 관리 책임자 또는 인접한 상점 주인 등을 부랑인 신고 책임자로 지정하고 부랑인 발견 즉시 즉각 신고가 이뤄질 수 있도록 긴밀한 연락 체제를 유지하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통반장 주민 조직도 즉시 신고토록 의무화하였다.

이것뿐만 아니라 훈령은 부랑인에 대한 상시적인 단속도 의무화하고 있었다. 훈령 제3장 제1절에서는 시청과 구청, 군청은 경찰서와 합동으로 부랑인 기동단속반을 편성, 단속에 차량을 우선 배치·활용토록 하고, 집중 단속 지역에서 부랑인을 대상으로 월 1회 정기적인 단속을 실시할 것을 규정하였다.

기록과 부랑인 감시의 영구화

단속된 부랑인에 대해서는 주민등록증 등을 통해 신상을 철저히 파악할 것을 강조했다. 이때 조사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뉘며 그것은 ①신상, ②신체, ③신원, ④부랑 동기, ⑤연고자에 대한 사항이었다(제3장 제2절). 조사를 마치면 시설로 인계되었으며, 이때 부랑인들에게 연도별 일련번호가 부여되었다.

귀향 시, 관할 통장은 신상 기록 카드를 작성해 관리하고 이 내용을 관할 지역 파출소장에게 통보해야 했으며, 파출소장은 이 실태를 파악·관리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관할 읍면동장과 지역 파출소장은 귀향 부랑인의 재가출 방지를 위한 보호·선도 책임을 지고 있었다. 또한 아동이 재가출을 할 경우 그 보호자는 아동복지법에 의거하여 2만 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도 있었다. 따라서 시설에서 귀향한 부랑인도 다시 부랑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관리·감독되어야 했다.

방대한 수용 기준, 협소한 퇴소 기준

이 훈령에서 귀향에 관련된 항목은 제5장에 규정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귀향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단 한 가지라는 점이다. 그것은 제5장 제1절에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연고자가 확실한 자"였다. 훈령이 단속과 수용에 대한 내용에서는 방대하리만치 기술하고 있는 것에 반해, 시설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건은 "연고자 확인"뿐이었던 것이다. 부랑인 수용 시설에 대한 규정도 극히 미비했다. 제4장 제8절 제2호에 시설 기준이 제시되어 있었지만, 시설장의 의무에 대해서는 충분한 급식과 피복을 지급할 것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 노숙자 퇴거에 반대하는 집회 ⓒ홈리스 행동

민주화 탄압과 부랑인의 대상화

이상에서 훈령 제410호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단, 이 훈령이 실제 어느 정도 그대로 지켜졌는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훈령에서는 수용소에 대한 경찰 감독이 의무화되어 있었지만, 형제복지원에 대한 경찰 감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령 제410호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부랑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가치가 있다.

당시 부랑인은 사회적으로 정화되어야 될 존재 혹은 범법자, 불순분자와도 겹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위험한 존재이므로 철저한 감독과 감시가 필요하다고 여겨졌으며, 이 감독과 감시에는 행정 당국뿐만 아니라 전 시민적 행동이 요구되었다. 당시에는 부랑인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을 모두 옭아매는 수많은 법률들과 지침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점을 감안하면,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당시 정권이 부랑인만을 특히 주목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하나의 구실로 부랑인을 이용한 측면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내무부 훈령 제410호 폐지…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1987년 2월 16일 내무부는 훈령 제410호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다. 또한, 같은 날 보건사회부는 부랑인 복지 시설과 관련한 법률을 제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원장 박인근이 구속된 지 약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4일 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 '부랑인 선도 시설 운영 규정'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형제복지원 사건은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폐지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부랑인 시설과 정책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변화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투명성과 절차가 강조됨과 동시에, 부랑인에 대한 규정이 더욱 명확해졌다는 점이다. 새롭게 규정된 '부랑인 선도 시설 운영 규정' 제3조에서는 입소 대상 부랑인을 ①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있어도 보호할 능력이 없는 65세 이상의 노쇠자, 18세 미만의 아동, 폐질, 정신질환 또는 심신장애 등 생활 능력이 없는 부랑인으로서 보호 기관인 시장, 군수, 구청장이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자, ②일정한 주거가 없이 구걸하는 부랑인으로서 본인이 시설 보호를 원하고 시장, 군수가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자, ③제1항 또는 제2항에 해당하는 자로서 경찰관서로부터 시설 보호의 요청이 있는 자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정의의 특징은 노동할 능력이 없고 오갈 데 없는 고령∙장애인∙아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형제복지원에 '부랑인이 아닌, 직업이 있거나 연고자가 있는 사람이 수용되어 있다'라는 문제제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부랑인 시설은 가장 저렴하게 '혼자 생활하기 힘든 고령자, 장애인 등이 장기간 수용되는 공간'으로 점차 변모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안 대상으로서 '부랑인'이라는 개념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시 치안본부 보안부는 내무부 훈령 제410호의 폐지에 대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경찰업무지침(내무부 훈령 제815호)이나 경범죄 처벌법에 따라 돈을 구걸하는 부랑인, 주거 부정이거나 구걸하는 아동 혹은 이를 교사하는 배후자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있다고 밝혔다. 즉 부랑인을 치안 대상으로 여기는 규정은 훈령 제410호 이외에도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다.

힘없고 약하고 그래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여겨진 자와 치안의 대상이라는 자, 이 두 가지는 모순된 이미지이다. 치안의 대상이 되기 위해선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어야 하는데, 부랑인 시설 수용자들은 서서히 노약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제도가 만들어지자, 곧 부랑인 시설에 대한 관심은 세간에서 멀어졌다.

사회 복지 대상자인 노숙인, 범죄화되는 노숙인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노상 생활을 하는 실직자가 늘어나자 이들은 '노숙인'이라 불렸다. 이때의 노숙인이란 과거 '부랑인'과는 다르게 근면 성실했으나 일자리를 잃어 어쩔 수 없이 거리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일자리를 제공하면 줄어들 줄 알았던 노숙인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이후 부랑인과 노숙인의 구분은 무의미해져 갔다.

수차례 법률과 정책의 변화 속에, 2011년 새롭게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거리 생활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부랑인'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으며, '노숙인'으로 통일되었다. 또한 거리 생활자 및 시설 생활자 뿐만 아니라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이 법의 대상자가 되었다.

노숙인 시설들은 공식적인 사회 복지 서비스 기관으로서, 임시적인 주거 대책뿐 아니라 공공 임대 주택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대규모 시설이었던 부랑인 시설은 노인 등을 위한 요양, 재활 시설로 그 기능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노숙인 시설의 서비스는 사회 복지 서비스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노숙인을 범죄화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2011년 8월 22일부터 서울역 역사에서 취침이 금지되었다. 또 경범죄 처벌법이 강화되면서, 과거와는 다르게 구걸을 시킨 사람 외에 구걸을 한 사람도 처벌 대상자가 되었다. 그 외에도 술이 취한 사람들에 대한 벌칙이 강화되면서, 술 마시는 행위가 공개될 수밖에 없는 노상 생활자들은 그 대상자가 될 확률이 높아졌다. 그 외에도 공공 장소에서 지켜야 할 규제가 많아지면서 이를 지키기 힘든 조건에 처한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경범죄자가 되기 쉬워지고 있다. 따라서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생활 수단을 획득해 온 노숙인은 갈수록 점차 배제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유독 한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엄격함과 불관용은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불린다. 교도소는 빈곤한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있다고 한다. 교도소는 판결이 내려지기만 하면,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유일한 '시설'이다. 일본의 경우, '교도소는 복지의 최후의 보루'라고 부르는 학자까지 나타났다.

노숙인에 대한 복지 서비스는 향상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은 더욱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거리 생활자에 대한 치안적 처벌이 다시 강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이 독재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법률과 공공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또 다른 훈령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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