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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초 파동' 이후 새로운 검열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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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초 파동' 이후 새로운 검열자는 누구인가?

[전태일 통신] <98> 대중음악, 그 '빨간 펜'의 역사

한때 시대정신을 반영했던 서양 고전 음악은, 그리고 민초의 삶을 담았던 전통 음악은 순수예술이란 이름으로 보수화하고 있었다. 보호와 육성을 위한 학제의 완성과 강단 예술계의 형성 그리고 지원 제도의 마련이 역으로 작용했다. 순수하게 예술만 추구한다기보다는 그 외에 다른 이야기는 삼간다는 의미의 순수예술이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고드름을 간직하겠다며 톱으로 잘라 이불로 둘둘 말아놓은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대신해야 했고,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이 역할을 이어받고 있었다.

빨간 펜 선생님의 등장

말썽쟁이 예술가들이 젊은 세대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던 열기는 강력한 냉풍을 맞았다. 1975년의 대마초 파동과 가요 정화 운동으로 생기는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갑작스러운 조치는 아니었다.

이미 1967년 3월에 '음반법'이 만들어지고 공보부는 '국민 개창 운동'을 시작했다. 1972년 3월에 문공부는 '건전가요 제정 및 선전 보급을 위한 개창 운동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문예 중흥 선언'을 통하여 "예술과 문화를 창조하는 힘이 민족정신의 기틀을 세우는 일"이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것"이라 했다. 예술은 선전의 도구였다.

이렇게 한마음으로 민족과 국가, 그리고 건전한 미풍양속을 생각해야 마땅할 때에 덥수룩하게 머리를 기르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서양 문화를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이는 세대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어 1975년 6월, 공보부는 '공연물 및 가요 정화 대책'을 발표한다.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심의는 더욱 엄격해진다. 혁명적으로 집권한 세력은 혁명적 움직임을 부정한다. 불순해보이면 위험하다 했고 반항기 있으면 위험하다 했고 우울하면 위험하다 했고 노래를 못 불러도 위험하다 했다. 지침은 있으나 강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침 없이 강제했다.
▲ 대마초 흡연 혐의로 1976년 3월 10일 대법정에서 구형을 선고받고 있는 가수 신중현, 박광수, 전용남(오른쪽부터). ⓒ연합뉴스

한국은 서구에 비하여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온 기간이 짧다. 20세기 초까지 문맹률이 90%였던 한국에서 조선 세종의 꿈은 500년 후에나 이루어진 셈이다. 대중적 문자문화의 시간은 반만년 중 반세기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할 무렵에 검열의 시대가 왔고, 방패막이로 쓰이다 버림받을 소모품 주제에 예술과 음악에 대한 평결을 내리며 충성한 빨간 펜의 검열자들은 복종의 메커니즘을 구성했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신뢰보다 독재정권에 의하여 '빨갱이'가 많아진 시대였고, 꼭 필요하지 않은 교정과 검열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졌으며, 작가를 무시하는 태도와 편집장 테이블의 권위의식은 빨간 펜이 바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음반마다 삽입되는 건전가요도 영화를 보기 전에 봐야 하는 '대한뉴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

사람의 심장이 많고 다양한 만큼 심정도 다양하다.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과감히 모른 척했지만,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내일 다시 허기질 사람이라면 음악을 잊을 수 없었다. 이 진공상태에서 대학가요제는 참신한 자극이었고 음악 동네에 양분을 공급하는 망외의 소득을 거뒀다. 성장한 청년문화에겐 출구가, 억압사회 아래 대중에겐 통로가 필요했는데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던 TV와 만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대학가요제의 몰락은 이런 조건들이 변했기 때문이다. 청년문화는 상업문화에 종속되고 대중의 문화 욕망은 소비 욕구로 대체되었으며 TV는 독점성을 잃었다. 전대협으로 대표되는 대학생 조직도 1980년대 후반부터 '통일노래한마당'을 개최했지만, 낭만과 함께 대학문화의 다른 한 축인 저항은 대학가요제를 통해 표백되고 있었다. 그물 밖에 남겨진 것이다.

빨간 펜은 시장의 손으로

정태춘이 1995년 음반사전심의제에 퇴장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빨간 펜을 들고 일하던 검열관들은 충심으로 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건전가요가 애국심을 고취하고 미풍양속을 함양한다고 정말로 믿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연말마다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보도블록 교체 공사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말이다.

마침내 1995년의 헌법재판소 결정을 거쳐 1996년에 검열의 시대는 끝났지만 더 성능 좋은 빨간 펜이 다른 누군가의, 아니 모든 이의 손에 쥐어졌다. 곧바로 시장 논리를 절대화하는 시대가 왔고, 새로운 방식의 검열과 통제가 이루어졌다.

대중음악을 발전시켜온 시장의 강화가 어째서 당국의 검열보다 더욱 강력한 담장이 되는지에 대해선 간단히 현실 십계명으로 설명하는 편이 낫겠다. 일계명은 수익이다. 이계명도, 삼계명도, 그리고 열 번째 계명도 모두 수익을 내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세 가지, '어려운 것은 쉽게', '위험한 것은 순화하여', '안 팔릴 것은 팔리게'이다. 전체주의만이 음악을 규정하고 제한하지 않는다. 만물상(萬物相)이 되어야 할 음악에게 만물상(萬物商)을 강요하는 시장주의의 강화는 다양한 예술의 생존 기반을 무력화할 뿐만 아니라 탈정치화를 강요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예술의 정치색이 강조되었다면 시장주의 국가에선 정치색 탈색을 요구받는다.

이처럼 국가와 권위에 의한 통제는 시장의 통제로 넘어왔고, 음악의 위험한 매력을 스스로 소독하도록 만드는 더욱 강력한 검열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되었다. 전에는 검열 때문에 사랑 노래만 불렀다면 이젠 장사 때문에 사랑 노래를 부르며 시장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고 만다.

더 근원에 있는 문제는 '분리'다. 산업화로 불리는 다단계 구조에서 음악 역시 노동의 문제가 발생하고, 업계에는 표절에 책임을 지지 않는 문제가 생기는 책임 분산 사회가 도래했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가 체계적으로 분리된다. 창작자는 뭔가 납품업자가 된 기분이고 수용자는 어딘지 구경꾼이 된 기분이다. 곳곳에 음악이 넘쳐나지만 정작 생산자와 소비자는 소외되고 있다.

분리가속기의 동력은 정치사회권력을 대신한 시장 권력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객분리를 의심하고 자본의 힘과 시스템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시장 논리를 극복해보려는 시도가 존재해야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 주체와 객체, 현실과 예술이 분리되어 가는 시대에 창작의 주체성과 수용·향유의 주체성을 자극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진정한 검열의 시대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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