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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람들, 무슨 죄라고 대구 골짜기까지 끌려와 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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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람들, 무슨 죄라고 대구 골짜기까지 끌려와 죽나"

[언론 네트워크] 4.3도민연대 5~7일 대구 희생지 순례

태풍 '콩레이'가 세찬 비를 뿌린 10월 5일, 자욱한 안개가 흩뿌려진 대구 달성군 가창댐에서 제주도민 현우룡(95) 씨는 말했다.

"여기 계시네."

현우방. 제주4.3 당시 자신과 함께 대구형무소에 끌려갔던 현우룡 씨의 친형이다. 형제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안타깝게 형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동생이 있는 이승, 형이 머무는 저승. 긴 세월 지나지 않아 동생 이름 석 자도 형 옆에 새겨질 것이다.

현 씨와 함께 대구형무소 수형자 561여명의 신위를 지켜보던 인천형무소 수형자 박동수(85) 씨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억울해. 정말 억울해. 제주 사람들 무슨 죄라고 대구 골짜기까지 끌려와 죽나."

▲ 4.3수형 생존자 현우룡(맨 오른쪽), 박동수 씨가 대구형무소 수감자 신위를 지켜보고 있다. 신위 맨 왼쪽에 '현우방'은 현우룡 씨의 친형이다. ⓒ제주의소리

제주4.3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도민연대(이하 4.3도민연대)의 대구형무소 순례가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진행됐다. 4.3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다음 해인 2000년부터 2010년까지 4.3도민연대는 전국 형무소 순례를 진행했다. 4.3으로 전국 14개 형무소에 수감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한 동안 중단했던 순례는 2015년부터 재개했다.

1999년 9월 추미애 국회의원이 공개한 4.3수형인명부에는 제주도민 2530명이 담겨있다. 대구형무소 순례에 동행한 수형 경험자는 현우룡, 오영종(90), 박동수, 오희춘(85) 씨. 특히 현우룡, 오영종 씨는 대구형무소에 함께 갇힌 속된 말로 '빵 동기'다. 박동수 씨는 인천, 오희춘 씨는 전주형무소다.

순례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5일 오전 9시 다행이 태풍 올라오기 전 대구행 비행기를 탑승했지만, 달구벌 비바람은 이미 태풍의 시작을 알리는 듯 했다. 대구공항 도착 후 곧바로 달려간 안개 자욱한 가창댐.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표적인 경북지역 민간인 학살 장소 가운데 하나다. 대구형무소 수형자 1402명은 그해 7월, 가창댐 위쪽 골짜기로 끌려가 군경에 의해 사살됐다. 1960년 대구매일신문은 1402명 명단 전문을 게재하며 끔찍한 역사를 세상에 알렸다. 여기에는 4.3 불법 군사재판으로 연루된 제주도민 165명도 포함돼 있다.

▲5일 대구 가창댐에서 치러진 가창골짜기 희생자 진혼제. ⓒ제주의소리
▲ 4.3 당시 대구형무소 희생자 신위. 여기에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도민 뿐만 아니라 형무소에서 살아남은 뒤 세상을 떠난 수형 경험자 모두를 담았다. ⓒ제주의소리

순례 참가 장정 여럿이 달라붙어 겨우 현수막과 신위를 달고 나서 제단이 차려졌다. 초혼문은 박동수 씨가 대표해서 읽었다.

"이역만리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가창골짜기 지경에서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4.3영령들이시여! 님들의 후손들이 제주(祭主)가 돼 제단에 향을 사르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오니 이 정성을 받아들여 눈물 거두고 강림 하옵소서."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정면을 지켜보기만 한 현우룡 씨, 고개를 떨어뜨리고 흐느낀 오영종 씨, 눈물을 훔친 박동수·오희춘 씨를 포함한 참가자들의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은 단 하나.

'왜 그들은 바다 건너 이곳까지 끌려와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 왼쪽부터 수형 경험자 오희춘, 오영종, 현우룡 씨. ⓒ제주의소리

▲ 4.3도민연대가 마련한 제단, 신위에 떨어지는 빗물이 마치 눈물처럼 보인다. ⓒ제주의소리

현장에는 채영희 대구 10월 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장도 참석했다. 채 회장은 "매해 가창댐에서는 학살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제주에서도 유족들이 꼬박꼬박 참석한다. 내년이면 위령탑도 건설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구형무소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거나, 살아남은 인원 모두를 합친 수는 565명으로 추정된다. 4.3도민연대가 조사·확인한 바에 따르면, △1948년 1차 군사재판 무기 형량 30명, 목포형무소로 보내진 204명 △1949년 2차 군사재판 대구형무소로 보내진 298명 △4. 3당시 일반 재판에서 항소한 인원 가운데 33명을 합쳐서 565명이다.

여기에는 대구매일신문이 공개한 수감자 1402명 가운데 165명,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전(1950.1.14.~28)에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256명도 포함돼 있다. 대구형무소 수감자는 가창골짜기, 코발트광산, 상인동 계곡, 공산댐 주변 등에서 숨졌고 부산형무소 수감자는 암남동 해상, 오륙도 인근 해상, 사하구 동매산, 김해 신어산 등에서 집단으로 수장·총살됐다.

▲ 가창댐 전경. 이곳에는 내년 10월 항쟁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이들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세워질 예정이다. ⓒ제주의소리

6일 순례 둘째 날 아침에는 현우룡, 오영종 씨로부터 대구형무소에 끌려가기까지 과정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제주시 이호동 출신인 현우룡 씨는 마을을 불태운 토벌대를 피해 1948년 12월 가족과 함께 중산간으로 피신했다. 다음 해 5월이 돼서야 내려왔지만 이내 군인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도로차단·방화'라는 누명을 쓰고 대구형무소로 보내졌다. 현 씨는 "목관아지에서 나 같은 사람 300명 정도가 모여 있는데 판사는 없고 군인만 있었다. 명단을 쭉 낭독하면서 '누구는 무슨 죄', '누구는 무슨 죄'라고 읊었다. 형기는 서면으로 정하겠다고 했다"고 기억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고 나서야 자신이 징역 15년인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마산형무소, 부산형무소 그리고 마포형무소를 거쳐 7년여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귀포 남원읍 한남리 출신인 오영종 씨 역시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타면서 살길이 막막해졌다. 더욱이 아버지와 삼촌이 총살당했고, 몸이 불편했던 할아버지는 마을 소각 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타 죽었다. 본인도 1949년 5월 마을 인근 오름에서 매복해 있던 군인 총에 맞아 붙잡혔다. 서귀포 단추공장, 제주시 주정공장을 거쳐 대구형무소로 이송됐다. 오 씨는 "군인에게 붙잡히고 취조를 당하는데 '난 그런적 없다', '아니다'라고 말하면 더 세게 매질이 가해졌다"고 말했다. 15년 형을 받았지만 1950년 3월 1일 7년 6개월로 감형됐고 이후 마산, 마포형무소를 거쳐 약 7년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할머니와 동생 둘 만 남아있었다.

▲ 6일 아침 대구형무소 생활을 듣는 시간이 마련됐다. ⓒ제주의소리

▲ 현우룡(왼쪽), 오영종 씨. ⓒ제주의소리

기적처럼 살아남은 두 사람 모두 후손을 남기며 본인의 아버지, 할아버지 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100세를 바라보는 지금에서 유일하게 원하는 건 '명예회복'이다.

현 씨는 "억울하게 덧씌워진 불명예를 반드시 회복시켜 달라"고 말했고, 오 씨 역시 "한(恨)을 풀어준다면 남은 생 마음 편히 살 수 있겠다"고 호소했다. 대구형무소 순례에 참가한 현우룡, 오영종, 박동수, 오희춘 씨 모두 지난 3일 결정된 재심에 참여하고 있다. 이번 순례에서는 두 사람의 자녀들도 동행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아버지의 과거를 들은 적이 없던 자녀들 모두 눈가를 훔쳤다.

사실상 마지막 순례 공식 일정은 대구형무소 터 방문이다. 한반도를 빠져나가는 태풍 때문에 6일 오전 대구 시내에는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대구 중구 삼덕동에 위치했던 대구형무소는 현재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부지 한쪽에 세워진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내부 벽면에 지난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대구형무소 생활을 설명하는 현우룡 씨. ⓒ제주의소리

▲ 대구형무소 생활을 설명하는 오영종 씨. ⓒ제주의소리

70년 만에 방문한 대구형무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돼 버렸기에, 현우룡·오영종 씨 모두 옛 기억을 발견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다만 기념관 벽면에 설치된 금속 조소 작품에서 감방 쇠창살, 형무소 건물 모양과 배치도를 보자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잠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비바람에 제단도 마련하지 못했고, 결국 고봉기 4.3도민연대 운영위원이 제문을 대표 낭독했다. 세련된 건물과 주택으로 즐비한 형무소 부지를 간단히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 6일 거센 비바람 속에 대구형무소 터 순례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제주의소리

악천후 속에서 준비한 것을 전부 공유하지 못한 순례였다. 그러나 '왜 죽임을 당했나'라는 억울함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상, 4.3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4.3도민연대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형무소 순례를 진행하다가 잠시 중단했고, 2013년 수형인 실태 조사와 함께 2015년부터 다시 재개했다. 지난해도 건너 뛰었지만 올해는 4.3 70주년 기념사업 예산으로 성사됐다. 이에 대해서는 '해원·상생'을 내세우는 오늘날 4.3에게 '남아있는 숙제'나 다름없는 수형자 문제를 꺼내는 형무소 순례는 우선 순위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오갔다. 후속 진행에 대해서는 내년 제주도 4.3지원과 본예산에 사업비를 반영시킬 계획이어서 두고 볼 일이다.

대구형무소 터를 떠나면서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형무소 순례를 비롯한 수형인 진상규명까지 온전히 마무리 돼야 '완전한 4.3 해결'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4.3이 완전한 해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노력이 있어야합니다. 기념사업, 정신계승, 교육, 문화예술 모두 필요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우선을 꼽으라면 바로 '진상규명 사업'입니다. 남아있는 하나의 억울함이라도 씻는 것이 정부의 역할 아니겠어요? 그런데 2003년 10월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온 이후, 지금까지 정부는 손을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주도, 지방정부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하는데, 4.3평화재단을 포함해서 지금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진상조사가 잘되고 있나요? 남아있는 수형인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반드시 수형인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 4.3 70주년 기념사업 가운데 수형인 진상조사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예산이 투입됐나요? 어떤 기관이 맡아서 진행했나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4.3도민연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철저한 진상규명 만이 완전한 4.3 해결에 이르는 첩경입니다."

▲ 대구 순례 참가자들이 함께 한 단체 사진. ⓒ제주의소리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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