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채서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술과 노름에 빠진 아버지는 7남매의 삶에 기둥이 되지 못했다. "공부할 생각하지 말라"는 게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무능력한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 박채서는 홀로 배움의 길을 택했다. 박채서에게 군문(軍門)은 탈출구였다.
1977년, 박채서는 육군 3사관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현실의 벽이 높음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두환의 12.12 쿠데타로 육사 출신이 카르텔을 형성했다.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 3사 출신의 출세 길은 닫혔다. 새로운 길은 공작단이 열어주었다.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채서 소령은 1990년 5월, 국군정보사령부 공작단 본부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뇌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부패한 상사들의 힐난을 버티다 못한 박채서는 당시 350만 원대에 달하던 모토로라 마이크로텍 폴더 휴대폰을 공작단장에게 선물해 서울 대방동의 한-미 합동 902정보대의 'A-23팀장' 직을 얻었다. 902정보대는 미 국방정보국(DIA)과 중앙정보국(CIA)의 혼성팀 ‘S.S.A.팀’과 한국 정보단의 합동 공작팀이었다.
당시 902정보대 초미의 관심사는 북한의 핵개발 성공 여부였다. 박채서는 LG산전에서 근무하던 중국 동포 김만효를 통해 김상헌이라는 중국 동포 핵물리학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박채서는 그를 포섭해 1992년 4월, 최초로 북한의 핵개발 상황을 확인했다. 1994년 6월, 한반도에 전운을 드리운 1차 북핵 위기 2년 전이었다.
박채서는 대북 공작의 한계를 몸소 체감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기껏해야 중국 동포를 활용한 공작이 휴민트의 전부라 할 수준이었다. 거짓 첩보나 역공작이 부르는 실패가 잦았다. 박채서는 대북 사업가를 통해 북한으로 직진로를 뚫으려 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지금의 국정원) 대북공작국이 박채서를 눈여겨 봤다. 박채서는 안기부 소속 서기관급 국가공작원으로 정식 채용되었다. 군 출신 대북 사업가로의 위장이 시작됐다. 박채서를 지휘할 이강복 전문공작관의 공작계획서에 '흑금성(黑金星)'이라는 암호명이 기록됐다. 1995년 3월의 일이다.
박채서는 북한 공작원의 포섭 대상이 되기 위해 신분 위장을 시작했다. 신용 불량자가 되었고, 부동산 투자 등 각종 사기행위로 전과자가 되는 역 신분 세탁 과정을 거쳤다. 이제 박채서는 군생활에 염증을 느낀 후, 군문을 벗어나 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무슨 일이든 손 대 제2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인물이 되었다. 사업가 박채서는 이웃사촌 박기영과 손을 잡았다. 당시 박기영은 광고기획사 '아자커뮤니케이션'으로 남한 최초의 북한 광고사업을 추진하려는 인물이었다.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로 북한 땅에 들어간다. 대북 접촉에 딱이었다.
대북 공작이 시작됐다. 공작이 성공한다면, '군에 불만이 가득한 전 공작원 출신의 대북 사업가' 박채서가 북한 공작기관이 포섭한 대남 역스파이가 될 것이다. 남한 공작 사상 최초로 북한으로의 직통로를 뚫은 이중스파이로서 박채서는 북한의 핵심 기밀을 빼돌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박채서의 운명은 격량의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오는 8월 8일 개봉할 윤종빈 감독의 신작 <공작>은 '흑금성'이라는 이름으로 남북 대결사 한가운데를 관통한 이중간첩 박채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 스토리는 <시사저널> 시절부터 안기부(현 국정원)를 전문적으로 취재한 김당 전 <오마이뉴스> 기자의 취재 활동을 바탕으로 구성됐다. 김 기자는 흑금성 사건을 가장 깊이 취재한 기자다. 실제 박채서가 북한 관계자들과 광고사업 협상을 진행하는 자리에 김 기자 역시 취재 기자로 참석했다.
박채서는 2016년 5월 31일, 6년 형기를 꽉 채운 후 출소했다. 그는 옥중 수기한 4권의 대학노트를 들고 나왔다. 이를 김 기자가 재정리했다. 영화 <공작>의 바탕이 된 책이자, 흑금성 스토리의 전후를 깊이 정리한 두 권의 책 <공작>(김당 지음, 이룸나무 펴냄)이다.
박채서, 곧 흑금성은 한국 첩보공작사상 최초로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대남 안보라인을 뚫은 스파이다. 목숨을 건 눈치 게임 끝에, 그는 마침내 최고 공작 목표인 김정일에게도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북측의 신뢰를 얻었다. 이제부터 그에게는 그간 한국 공작이 얻지 못한 고급 정보가 있는 그대로 흘러들어올 것이었다. 그런데,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는 1997년 대선 시기였다. 북이 한국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 우리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북은 김대중을 가장 껄끄러워했다. 이회창도 못마땅해 했다. 북은 이인제를 가장 선호했다.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이회창은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게 이유였다. 일종의 연좌제 개념이었지만, 북한에서는 그럴 수 있다 여겨졌다. 김대중을 마다한 건 의외다. 한국에서 김대중은 정치 생활 내내 친북 인물로 낙인 찍혔기 때문이다. 북의 논리는 이러했다.
첫째, 김대중은 노련하다. 북에서 다루기 어렵다. 둘째, 김대중이 용공분자 이미지를 받은 건 오히려 안 좋다. 박정희가 미국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반공을 국시로 표방했듯, 김대중도 오히려 반공정책을 펼칠 수 있다. 셋째, 그간 북한은 김대중을 여태껏 자국 인민에게 민주투사로 선전해 왔다. 그런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다면, 북한 주민에게 그를 비방할 명분이 사라진다. 넷째, 김대중은 김정일보다 나이가 많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연장자는 우대해야 한다. 북한으로서는 껄끄럽다. 반면 이인제는 김정일보다 나이가 여섯 살 아래다.
우리로서는 특히 넷째 이유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유야 어쨌든 북한은 이런 이유로 이인제를 지원하고 김대중-이회창 죽이기 공작을 펼쳐 남한 대선에 개입할 계획을 세웠다. 귀국한 박채서는 곧장 안기부에 이를 보고했다. 여기서 다시금 이해 충돌이 일어난다. 청와대는 이인제를 밀었다. 그런데 당시 안기부 '회장님'이었던 권영해는 이회창을 밀었다. 북한-청와대-안기부의 속내가 각기 달랐다. 청와대는 물론, 한나라당도 나름의 대북 끈을 쥔 게 확실했다. 자신도 모르게 박채서는 거대한 한반도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던져졌다. 본업인 대북 광고 사업을 통한 편승공작은 물론, 북한이 남한 대선에 개입해 역사를 바꿀 상황도 막아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공작사에 손꼽히는 거물이었던 박채서는, 1997년 15대 대선정국의 ‘북풍공작’이라는 비정한 파도에 휩쓸려 국가보안법 위반 범법자로 전락했다. 국정원의 핵심 간부로 승진했어야 마땅할 이가 어떻게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범법자가 되었는지, 어떻게 정보기관이 자신의 핵심 자산인 스파이의 정보를 공개하는 초유의 일을 저질렀는지를 책은 세밀히 정리했다.
실제 아자커뮤니케이션과 북한 당국의 협상장에 동석해 관련 내용을 취재하는 등, 오랜 기간 안기부를 취재한 김당 기자의 내력도 책 곳곳에 묻어난다. 김 기자는 안기부와 관련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책 곳곳에 배치해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사건의 중요한 무대 곳곳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예를 들어, 박채서는 1997 대선 국면에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김 기자와 상의한다. 김 기자는 1996년 11월, 김영삼 정부를 흔든 '밀가루 파동' 취재를 통해 박채서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흑금성 사건을 잘 모르는 이라면 책 초반에 던져지는 방대한 한국 현대사의 무게에 조금 힘겨울 수 있다. 하지만, 박채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부분에 들어서는 순간, 집요한 하드보일드, 스릴러 소설이 선사하는 방대한 세계에 빠져든 듯한 착각이 일어날 것이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붙음에 따라 독자는 '음지의 역사'가 내달리는 속도를 따라가고자 숨가빠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책에는 흑금성 공작 과정의 전모뿐만 아니라, 당시에 있었던 각종 공작 상황과 굵직한 현대사의 장면들이 여럿 소개된다. 남북의 스파이전이 팽팽한 긴장 속에 이어지고, 중요한 대목마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황장엽 망명 등의 사건이 흑금성 공작과 얽힌다. 영화 <공작>을 두고 '총보다 말로 긴장감을 일으키는 작품'이라는 평이 지난 칸영화제에서 나왔다. 책을 읽어보면 이 평이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영화 <공작>을 더 잘 즐기기 위해서도 괜찮은 작품이지만, 무엇보다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의 그늘에 조명을 비추기 위해, 비정한 정치권의 위세에 짓눌린 한 스파이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존재 의의를 얻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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