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가 세종사업장에 8조 원을 투자해 인공지능(AI) 서버용 반도체 패키지 기판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연구개발 설비를 확대하기로 했다. 조상호 시장은 이를 "2012년 세종시 출범 이후 단일 사업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평가하며, 이 투자를 발판으로 관련 앵커기업을 추가 유치해 새로운 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반가움과 별개로 한 가지 질문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8조 원의 투자, 과연 세종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기업의 투자액과 지역경제에 남는 부가가치는 동일하지 않다. 대규모 생산시설이 들어서더라도 본사와 연구개발, 구매와 협력기업이 다른 지역에 있고, 근로자마저 외부에서 출퇴근한다면 지역이 얻는 효과는 기대보다 작을 수 있다. 공장은 세종에 있지만 기술과 인재, 기업과 세금은 다른 지역에 남는 ‘산업의 섬’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세종시에 필요한 것은 8조 원이라는 숫자를 홍보하는 일이 아니라, 이 투자를 지역의 지속 가능한 산업자산으로 전환하는 정교한 전략이다.
첫째, 생산시설과 함께 연구개발 기능을 세종에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AI 서버용 반도체 기판은 단순한 제조품이 아니다. 소재, 회로설계, 공정, 검사와 패키징 기술이 집약된 첨단 지식재산 산업이다. 생산라인만 확보해서는 세종이 기술 중심지가 될 수 없다. 연구개발센터와 시험·인증센터, 설계 및 엔지니어링 기능이 함께 들어와야 고급 인력이 모이고 관련 기업도 따라온다.
둘째, 삼성전기를 중심으로 협력기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대기업 한 곳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주변에 얼마나 많은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기술서비스 기업이 자리 잡느냐이다. 세종시는 삼성전기의 공급망을 면밀히 분석해 유치 대상 기업을 선정하고, 국가산업단지와 명학산업단지 일대에 협력기업 전용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임대형 공장, 세제 지원, 신속한 인허가와 공동 연구개발 지원을 결합한 ‘삼성전기 협력기업 유치 패키지’도 필요하다. 지역기업이 공급망에 참여하도록 돕는 일도 중요하다. 세종기업이 삼성전기의 납품 기준을 충족할 수 있도록 기술혁신, 품질인증, 시제품 제작과 사업화를 지원해야 한다. 대기업의 지역 구매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지역기업의 기술과 품질을 대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
셋째, 투자의 성과를 지식재산으로 축적해야 한다. 미래 산업에서 지역의 진정한 부는 공장 건물이나 생산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특허와 영업비밀, 데이터, 소프트웨어, 표준 기술처럼 쉽게 이전되지 않는 지식재산이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누가 소유하며, 어떤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는지가 중요하다.
세종시는 삼성전기와 지역 대학, 연구기관, 중소기업이 공동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그 성과가 공동 특허와 기술이전, 창업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반도체 패키징,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스마트시티 분야를 중심으로 ‘세종형 지식재산 창출 프로젝트’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지역 중소기업에는 특허전략 수립, 선행기술 조사, 국내외 권리화와 기술가치평가를 지원해야 한다. 우수한 특허는 정책금융·투자펀드와 연계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의 기술은 지역기업에 이전해 사업화해야 한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지역기업과 대학이 해결하고, 그 결과를 특허로 확보해 새로운 제품과 기업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넷째, 세종의 청년들이 이번 투자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외지의 전문인력을 데려오는 데만 의존한다면 8조 원 투자가 세종 청년의 일자리로 이어지기 어렵다. 삼성전기와 지역 대학이 참여하는 채용연계형 계약학과를 만들고, 반도체 패키징과 소재·공정·검사 분야의 실무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고교 졸업생부터 대학생, 재직자까지 이어지는 단계별 교육체계를 구축하고 교육 수료가 실제 채용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세종시와 삼성전기는 단순한 투자양해각서를 넘어 ‘지역산업·지식재산 상생협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협약에는 지역 인재 채용, 협력기업 유치, 지역기업 공급망 진입, 공동 연구개발, 특허 창출과 기술사업화 등 구체적인 목표가 담겨야 한다. 물론 기업의 투자와 기술 전략은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전력과 용수, 산업용지, 교통과 행정지원을 제공하는 지역사회 역시 투자로부터 지속 가능한 가치를 얻어야 한다. 기업과 지역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기업에 부담을 주는 일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생산과 혁신 기반을 제공하는 일이다.
삼성전기의 8조 원 투자는 세종 산업경제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러나 투자 발표가 곧 산업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장이 들어오는 것은 시작이고, 기술과 인재가 쌓이며 협력기업과 스타트업이 성장하고, 그 성과가 특허와 세수, 양질의 일자리로 남을 때 비로소 세종의 산업이 된다.
세종시는 이제 ‘얼마를 유치했는가’를 넘어 ‘무엇을 남겼는가’를 물어야 한다. 8조 원의 진정한 가치는 투자액의 크기가 아니라, 그 투자가 세종에 얼마나 많은 기업과 기술, 지식재산과 미래세대를 남기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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