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란 이름이 붙은 강좌, 책들은 많아도 너무 많다. 사회문제를 찾고 비판하는 나도 곧잘 그 범주에 포함되어 소개된다. 이 연결이 어색한 건 아니지만, 막상 현장에서 인문학에 대한 정의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당황스럽다. 인문학을 비즈니스와 연결해서 그 쓸모를 찾겠다는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통찰, 혜안 이런 단어를 미래와 연결해서 말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못을 박는다. 이 강연에서의 인문학은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비판하는 의미라고 말이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능력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괴상해질 수 있는지 따져보는 건 결국 인간의 이로운 방향을 찾는 인문학의 일반적인 목적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전통적인 인문학 관점에서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못 받아들이는 사람의 질문은 거칠다. "그래서 대안이 무엇인가요?"
작가가 한순간 예언자가 된다면
오랫동안 대안 중독증을 비판했다. 문제를 인지하고 성찰하는 것이 대안의 시작이라고 무수히 강조했다. 예를 들어 능력주의 가치관의 문제점을 직시하면 다음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 속 능력주의 광풍을 반성하고, 제도를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 된다. 끊임없이가 중요한 이유는 어떤 제도도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는 신분제 사회와 비교하면 획기적이지만, 그렇다고 의심하지 않게 되면 고작 대학 이름으로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는 인간만이 거리를 활보하지 않겠는가.
나와 비슷한 영역에서 글을 쓰는 작가라면 같은 생각일 거다.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와 결부될 때다. 어디에서 월급 받으며 공부하는 사람들은 평소 소신대로 살아가면 되지만, 매달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하는 처지라면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자기 말만 뱉을 순 없다. 적당히 타협해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단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적절하게 섞어야 한다. 그러면 평소의 내 글에선 등장하지 않는 공허한 단어가 맴돌게 되는데, 아주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래서 대중강연은 알맹이는 쏙 빠진 채 연예인 팬클럽 행사처럼 진행되기도 한다.
이 정도까지에 만족해야 하는데, 많은 이들이 더 큰 유혹에 노출된다. 인지도가 높아지면 어떻게든 방송에 출연하게 되는데 그 효과를 한번 체험하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이 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로 저 방송에 부른다. 그럴수록 논쟁적이지 않은 주제를 골라 희망의 미래를 말하는 재주까지 생겨난다. 그러면 드디어, 기업 강연 섭외가 온다. 깜짝 놀란다. 단가가 차원이 다르다. 차를 집 앞까지 보내주기도 한다. 이런 대우를 받는데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는가. 듣는 사람에게 만족을 주고 싶다.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단어를 취사선택한다. 희망, 희망, 오직 희망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푹 빠지면 분석은 사라지고 소망만 나부낀다. 새로운 문명이 오고 있으니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는 거창한 담론을 제시한다. K 어쩌고라면서 대한민국이 위대하다는 양념을 듬뿍 친다. 선도하는, 주도하는 등의 표현이 남발된다. 주술에 가까운 미래 청사진과 근거 없는 애국주의가 결합하면, 놀랍게도 이게 통찰과 혜안으로 둔갑한다. 그 순간 기껏해야 작가와 독자 정도의 관계가 한순간에 스승과 제자, 멘토와 멘티로 변한다. 급기야 예언자와 추종자로 굳어진다.
예언자는 추종자에게 미래를 위한 투자 제안이라면서 돈을 요구한다. 심지어 개인 생활비 해결을 위해 돈을 빌리고 안 갚는다. 갚으라고 하면 계속 미래만 언급한다. 의심할 틈을 주지 않으려면, 신분적 권위가 필요하다. 적당한 타이틀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특임교수같은 애매한 걸로. 확인하기 어려운 걸로.
사는 대로 생각하려고 인문학을 오용한다
지난 2014년, 한 기업 회장이 인문학 경영을 강조했다. "인문학 없는 스펙은 모래성"이라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성찰"을 하라고 청춘들에게 조언했다. 인문학적 소양과 통찰력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말을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이 사람은 2015년에도 "스마트 시대에 인간의 사고력이 퇴화할 수 있다"라며 역사책 읽기, 글 쓰기, 토론 연습 등 생각의 근육을 기르는 3가지 인문학적 실천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10여 년 이 흘러, 이 기업회장은 스타벅스 탱크데이 사건을 사과하면서 "각자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이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다시 광주를 조롱했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평소 어떠했는지를 잘 알기에.
인문학에 경영이란 단어가 붙으면, 생각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인문학이 원래 사는 대로 생각하기 위한 용도로만 다뤄진다. 부당함에 저항하며 등장한 자유(Liberty)의 가치를 왜곡해, 마음대로 행동하고 존재할 수 있는 자유만을 강조한다. 불평등 조정을 목적으로 하는 공정(Equity)의 의미를 오용해, 공부 못해서 차별받는 건 공정한 거라고 우긴다.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 선언된 권리(Right)의 의미를 멋대로 활용해, 능력 있으면 타인 위에 군림할 수 있다며 특권을 내 몫이라며 착각한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게 인문학이지만, 과거를 무시하고 미래를 가슴 벅차게 설명하기 바쁜 곳에선 인문학이 사람을 분류하고 배제할 연료로 작동한다.
인문학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과거를 교훈 삼아 미래의 방향을 제안하는 정도가 전부다. 인문학은 앞날을 예측하지 않기에 인기가 없다. 책 쓴다고 대출까지 받았는데 출판사에서 보내주는 인세 정산서를 보면 참담하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강연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어떻게 연결이 되어 방송을 통해 얼굴을 알릴 기회가 온다. 방송에 적응하면 기업에서 모셔간다.
돈 좀 버는 게 무슨 문제겠는가. 돈 벌었으니 또 묵직하게 읽고 쓰면 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겠다며 희망 전도사가 되는 순간, 인문학의 본질이 전복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든 다음에야 날개를 폈다는 헤겔의 표현처럼 철학은 앞날을 예측해선 안 되지만, 인문학 어쩌고의 제목의 책이 자기계발서 코너에 깔린 사회에서는 무당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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