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뭄이 제법 심하다. 가끔 병아리 오줌만큼 비가 내리더니 이제는 비 그림자도 보기 힘든 정도가 되었다. 할 수 없이 과거 논으로 쓰던 밭이라 관정을 뚫어 놓은 것이 있어서 수리를 했다. 그리고 아침 저녁을 신나게 뿌려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채마밭에 뿌리다 보면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바짝 말랐던 ‘검정강남콩’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고라니가 뜯어먹은 고춧대에서도 곁가지가 나오면서 제법 먹을 수 있을 만한 풋고추가 미소를 짓는다. 고구마는 순을 다 뜯겨서 80%는 사망(?)하고, 나머지 뿌리가 남아 있던 것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한다. 고라니가 무서워서 망을 치고, 각종 야채를 다시 심었다. 상추와 땅콩, 치커리 등을 심었다. 물을 잔뜩 주고 있지만, 아직도 ‘흙내’를 맡지 못한 모양이다. 어제까지 이파리가 밑으로 축 처져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제법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조금 더 있어야 흙내를 맡고 벌떡 일어서려나 보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늘 “이놈들이 이제 겨우 흙내를 맡았구나.”라고 하시면서 흐뭇해 하셨다. 당시에는 흙내의 뜻을 어렴풋하게 느낌으로 알고 있었는데, 퇴직하고 농사를 지으며, 고라니와 싸우고, 심고 또 심다 보니 흙내를 맡아야 한다는 말씀의 중요성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흙내를 맡아야 뿌리는 남아서 다시 싹을 틔운다. 아니면 홀라당 뽑혀버리고 만다.)
‘흙내’는 ‘땅에서 맡을 수 있는 기운’을 말한다. ‘흙냄새(흙에서 나는 냄새)’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 ‘흙내를 맡다’라는 말은 ‘옮겨 심은 식물이 흙에서 뿌리를 내려 생기가 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농부는 식물이 흙내를 맡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한편 ‘흙내가 고소하다’라는 말도 있다. 그냥 들을 때는 좋은 말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죽어서 흙에 묻히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뜻으로 ‘머지않아 죽게 될 것 같다’는 말이다. ‘흙내’의 예문 몇 가지를 보자.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땅김이 코를 찌른다.
팽나무를 옮겨 심었더니 이제야 흙내를 맡아 생기가 돈다.
나이가 고희에 접어드니 청산이 도두뵈고 흙내가 고소해진다.
와 같이 쓴다. 참고로 ‘도두뵈다’는 ‘실제의 모습보다 더 높게 보이거나 좋게 보인다’는 뜻이다. 흙내가 고소해지면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운 것이다.
충청도에 왔더니 ‘흙내’를 ‘땅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땅내’라는 말은 ‘땅에서 나는 흙냄새’를 이르는 말로 ‘흙내’와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또한 땅내는 ‘사냥에서, 날짐승의 발자취 냄새’를 이른다. 그러므로 ‘땅내’의 핵심적인 뜻은 ‘냄새’에 있다고 본다. 흙내는 ‘흙의 기운’이라는 의미가 중심이고 땅내는 ‘흙의 냄새’라는 말이 중심이다. 그런데, “이놈들이 이제야 땅내를 맡았네”라고 하는 소리를 많이 듣다 보니 필자도 헷갈리게 되었다. ‘땅내가 고소하다’라는 말은 ‘흙내가 고소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일단 땅내의 예문을 보자.
고향의 땅내가 그립다.
비 갠 오후, 길에서는 땅내가 훅훅 올라왔다.
텃논에 심은 모종은 벌써 새까맣게 땅내를 맡고 커 오른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흙내’와 ‘땅내’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경우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땅에서 나는 냄새(땅에서 올라오는 냄새)’의 의미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기운’과 ‘냄새’의 차이가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둘의 간격이 좁아져 혼용된 것으로 본다.
밭의 작물들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밭에 나가 보면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작물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교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연일 감탄하게 된다. 관정을 통해 물의 고귀함을 배우고, 연일 맑은 날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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