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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씨알'의 뿌리에서 피어난 두 지식인, 안병무와 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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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함석헌 '씨알'의 뿌리에서 피어난 두 지식인, 안병무와 김동길

[기고]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인 함석헌(1901-1989)은 단지 '사상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신앙인, 저항가, 교육자였고 무엇보다 실천하는 '한국의 양심'이었다. 그리고 그의 깊은 사유와 삶의 실천은 20세기 한국 지성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가 뿌린 씨앗은 시대를 가르고, 사람의 삶을 바꿔 놓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안병무(1922-1996)와 김동길(1928-2022)이다.

이 두 사람은 살아온 길과 선택한 방식, 신앙과 정치에 대한 입장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사유의 뿌리는 '씨알사상'에 있다. 다시 말해, 함석헌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두 개의 줄기가 각각 민중신학과 자유민주주의라는 꽃으로 피어난 셈이다.

안병무: 씨알에서 민중신학으로

"민중은 신학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다. 나는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했다"

이 고백은 한국 민중신학의 선구자 안병무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다. 안병무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생으로 기독청년회운동을 이끌고, 나중에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유학 후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한국 진보적기독교 신학을 이끈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이 단순한 '학문'이나 '교리'에 머물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함석헌 이라는 존재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안병무는 해방 후 대학시절 함석헌이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성서를 민중의 눈으로, 역사를 민중의 발로 읽으려 했던 함석헌의 문제의식은 안병무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성서의 주체는 신도, 교회도 아닌 '고난 받는 자들'이라는 인식,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의 출발이었다.

함석헌은 "씨알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안병무에게 "민중이 살아야 신학이 산다"는 선언으로 확장됐다. 성서의 메시지를 당대 현실 속에서 되살리고자 했던 안병무는 박정희 정권시절 가르치던 대학에서 해직되어 감옥에서 만난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 속에서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예수의 제자들처럼 고통 받지만 주체적인 이들, 즉 민중을 발견한다. 함석헌이 역사에서 씨알의 능동성을 보았듯, 안병무는 신학에서 민중의 주체성을 천명했다.

1975년 안병무가 발표한 「민족과 민중교회」라는 글에서 그는 "예수는 민중이다"라는 선언으로 한국신학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는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기존의 신학구조자체를 뒤엎는 급진적 관점 전환이었다. 예수가 민중이라면, 신학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오는 권위의 언어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터져 나오는 해방의 언어여야 했다. 함석헌이 말한 씨알, 곧 '보잘것없으나 가장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는 안병무에게서 '한(恨)'을 품은 민중이라는 신학적 주체로 변용된다.

두 사람의 인연은 단지 간접적 영향에 그치지 않았다. 1963년 유럽을 함께 여행하며 역사적 현실과 철학적 비전을 나눈 두 사람은 귀국 후에도 깊은 우정을 유지했다. 특히 박정희 군부정권의 등장 이후, 안병무는 1963년 당시 자신과 독일에 있던 함석헌에게 당장 귀국을 권유하며 "선생님 같은 사람이 있어야 이 어둠을 뚫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함석헌은 즉시 귀국해 대규모 집회를 열고 반독재운동의 선두에 선다. 이어서 1970년 4월 19일, 4.19혁명 10주기에 맞춰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의 길에 나선다.

안병무는 말년에 "나는 함 선생 덕분에 기독교의 독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나와 인터뷰 중 고백했다. 그는 씨알사상에서 신학적 상상력을 얻었고, 이를 민중신학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했다. 민중의 한과 고통을 통해 성서를 재해석하고, 그 안에서 저항과 해방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함석헌의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한 안병무(왼쪽 2번째)와 함석헌 (왼 쪽 3번째)ⓒ함석헌 기념사업회

김동길: 사랑의 '메신저', 자유의 '마라토너'

안병무가 씨알사상을 신학의 토대로 삼았다면, 김동길은 그것을 역사와 정치로 전개해 나갔다.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다니던 1948년, 김동길 연대학생회장은 강연자로 초청한 함석헌을 직접 만나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후 평생을 두고 함석헌을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으며, "내 인생은 함 선생을 만난 그날로부터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1950년대 미국 유학을 마친 김동길은 연세대학교에 자리잡은 역사학자로 출발해, 박정희·전두환정권에 맞서며 두 차례 감옥생활을 감내한 지식인이었다. 1974년, 한 강연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뒤 '공산정권 수립기도'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동료 재소자와 간수들에게 역사와 성경, 영문학을 가르쳤고, 그래서 감방대학 초대학장'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 '감방대학'은 마치 일제강점기 함석헌이 보여준 저항적 배움의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이었다.

1979년 10.26 직후 김동길은 해직교수생활을 마치고 연세대로 복직한 후 거센 386 학생운동과 대면한다. 비폭력을 외치며 학생들 앞에 섰지만, 전두환의 5.17쿠데타 이후 또다시 투옥된다. 그는 이후에도 변함없는 신념으로 민주주의를 호소했고, 1984년 다시 복직 후 1985년에는 그의 강의에 2,300명의 학생이 몰리는 진풍경을 만들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단순한 인기강사 이상의 존재, 그는 당시 '시대의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991년 김동길은 현대재벌 정주영이 이끄는 국민당 부총재로 정치에 입문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벽 앞에서 큰 기대를 이루지 못하고 1996년 은퇴한다. 그는 평생5천 회 이상의 대중강연과 80권이 넘는 저술을 이어가며 해학과 기지 그리고 풍자를 섞은 '말과 글의 전도사'로서 민중과의 소통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자유'와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붙잡았고, 그것은 함석헌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유산이었다.

그는 생전에 늘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내 삶의 길은 아마도 전혀 달라졌을 거야."

그가 정치의 도덕성을, 역사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했던 것도, 좁고 답답한 종교의 교리보다 열린 종교정신을 강조하고 받아들였던 것도, 모두 함석헌의 사유로부터 비롯되었다.

▲1975년 2월 15일 교도소에서 풀려난 김동길(오른쪽), 누나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가운데), 함석헌(왼쪽), 계훈제(뒷편) ⓒ함석헌 기념사업회

하나의 뿌리, 다른 열매

안병무와 김동길. 한 사람은 민중신학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흔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외치며 시대를 흔들었다. 두 사람의 길은 다르지만, 그들이 뿌리를 내린 토양은 하나였다. 함석헌이라는 사상가가 심은 씨앗이 두 갈래로 뻗어 한국현대지성사의 커다란 나무가 된 셈이다.

씨알사상은 철학이 아니라 삶이었다. 함석헌이 말한 "나는 한 알의 씨앗이다. 나를 짓밟아도 나는 다시 살아난다." 이 말은 단지 상징이 아니라, 억압과 절망 속에서도 민중과 민주주의, 인간의 존엄을 믿은 이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함석헌은 가르쳤고, 안병무는 그것을 민중신학으로, 김동길은 그것을 민주주의로 구현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들을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역사의 주체로 민중을 상상하지 못하는 시대,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시대, 종교가 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함석헌을 통해 길을 찾아야 한다.

안병무와 김동길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아래서 모두 감옥에 갔다. 그러나 그 감옥은 그들을 가두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생각했고, 가르쳤으며, 세상과 다시 연결되었다. 그들이 감옥에서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민중'과 '민주주의'였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씨알의 뿌리이자, 지난 해 12.3 계엄을 겪고 오는 6.3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가 다시 확고하게 붙잡아야 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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