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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은 망국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오찬호의 틈새] 악순환의 선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사교육은 망국병. 그런데 어쩌라고?

2016년도에 냈던 책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나는 6개월간 노량진을 오가며 인터뷰를 했는데, 어릴 때부터 공직에 대한 열의가 있어서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은 없었다. 책의 부제인 '믿을 건 9급 공무원뿐인 헬조선의 슬픈 자화상'처럼, 엉망인 사회가 선사한 장래희망이었다. 하지만 바늘구멍 통과하는 공무원 시험이 만만한 것도 아닌데, 어찌 용기를 냈을까? 이런 말이 제법 등장했다. "초3부터 고3까지 학원만 10년을 다녔잖아요. 할 줄 아는 게 정답 찾는 거니까, 100분에 100문제 푸는 시험이 무섭진 않았죠. 해볼 만하다고 여겼죠."

한국에 살면서, 사교육 없이 성장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몸에 익은 시험 감각을 믿는 수많은 이들이 노량진 학원으로 몰려들었던 거다. 그 수가 많으니, 정답 찾는 방법은 더 빠르고 더 정확해야 한다. 답이 아닌 건 아닌 거다. 뒤돌아볼 시간 따윈 없다. 그래서 인문학이나 사회비판 학문처럼 답 너머의 답을 찾는 공부를 대학에서 한 이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초기에 과도기를 겪는다. '삶은 공정한가?', 이런 시험문제로 답안지 앞뒤로 빡빡하게 작성하다 왔으니 다시 생각이 간결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학원 도움 없이라면, 훨씬 많이 걸린다.

사교육은 공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내는 게 목적이기에, 목표는 선명하고 과정은 단순하다. 목표와 상관없다면 과감히 삭제한다. 관련된다면 무조건 머리에 넣는다. 어떤 사회이든 마찬가지인데, 한국에서 그 강도와 빈도가 압도적이다. 그 한국도 과거보다 심해져서, 훨씬 빨리 시작하고 훨씬 많이 한다. 어린 나이부터 온갖 걸 한다는 말이다. 사교육의 운명이다. 사교육 비용은 공교육 내에서 인정받을 때 환수되는데, 남들 하는 만큼 해서는 보장이 없다. 비용을 늘려야만 환수율도 높아진다. 그러니 전체 출생아 수가 줄고 있어도, 사교육 전체 비용은 증가한다. 퍼붓는 돈의 사이즈가 다르다는 거다. 7세 고시도 놀라운데, 7세도 늦은 지 4세 고시라는 초현실적인 단어 조합까지 등장했다. 불안한 이들이 많아서일 거다. 많으니까 또 가려낸다. 정답을 빠르게 찾는 훈련, 그게 삶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망국병인데, 이 망국병은 그걸 병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교육의 문제점과 인공지능의 답변은 얼추 비슷하다. 맞는 말이기 때문일 거다. 부모의 경제력이 경쟁력에 반영되니 교육 불평등 현상이 심각해진다는 데 동의할 거고, 시험 대행기관 정도의 기능만을 가진 공교육을 정상이라고 할 사람은 없고, 학업 부담으로 인한 당사자는 스트레스를 받고 보호자들은 괴롭다는 걸 겪어본 이들이라면 다 안다. 돈은 돈대로 들이니, 돈이 되냐 안 되냐를 따져서 공부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사회 전체로 볼 때 창의성은 바닥이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 이런 표현에 다들 익숙하다. 돈 안 되는 학과들은 대학에서도 소멸되니, 차별과 혐오에 둔감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뉴스만 틀면 매일 등장하지 않는가.

사교육의 힘은, 이런 문제가 의미 있는 토론으로 나아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대표적인 망국병인 부동산 문제와 비슷하다. 모두가 부동산에 미치면 사회가 괴상해지는데, 모두가 미치니 따지는 게 어색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투기가 투자가 되면 투자인 거다. 따져봤자 소용없다. 사교육의 목적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기에, 사교육 공화국에서 교육 불평등은 인지 영역이지 개선 대상이 아니다. 불평등을 받아들이니, 학업 스트레스나 경제적 부담 등의 하소연은 다 개인이 극복할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창의성이 없다고? 차별과 혐오에 난무한다고? 이런 소리엔 한마디면 된다. "어쩌라고?" 가끔 부연 설명도 붙는데 이게 다다. "자본주의가 다 그렇지." 이 빈도, 사교육이 빨라질수록 잦다. 이 강도, 사교육이 많아질수록 세다. 이와 비례해 공정, 정의, 자유 등의 사랑스러운 단어가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데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러니 사교육의 원인인 불평등을 어떤 정치인도 제대로 건드릴 수가 없다. 교육 불평등이 야기한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라는 분노를 결코 넘지 못한다. 사교육의 비극은, 그 고생의 크기만큼 그릇된 사회를 옹호하는 심리도 커진다는 거다. 무조건, 그대로여야 한다. 그대로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반드시 나빠진다.

불평등하기에 사교육을 해야 하고, 사교육을 했기에 세상은 계속 불평등해야 한다. 끔찍한 악순환의 정교한 선순환이다. 목표가 선명해졌으니,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 두세 살 때 한글을 뗀다는데, 책 두세 줄 읽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즐비한 이유다. 그러니 독서도 학원 가서 답을 찾으며 배운다. 거기에 길들여진 이들은 이런 긴 칼럼을 보고 말한다. "세 줄로 요약해 주세요."

▲우리나라 6세 미만 미취학 아동의 1인당 사교육비가 월평균 30만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영어유치원'(영어학원 유치부)으로 불리는 유아 영어학원의 월평균 비용은 154만5천원이었다. 소득 규모별 사교육비 격차는 7배에 육박했다. 교육부는 13일 이런 내용의 '2024 유아 사교육비 시험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 주도로 유아 사교육비 현황을 조사해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사진은 이날 서울 강남구 한 영어유치원. ⓒ연합뉴스

모두가 사교육의 결과를 찬양하고 있지 않은가?

"수십 년 전부터 사교육을 망국병이라고 했는데, 망했나요? 아니죠? 사교육 잘 받은 사람은 다 취업하고 잘 살아요. 사교육이 아이들 망친다 뭐니 그러면서 애들 방치한 집들이 다 망했죠."

학원강사의 말을 우연히 접했다. 학원강사가 시대의 스승인 된 게 참담하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사교육 문제가 뻗어나간 것 같아서 씁쓸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도 어려울 것 같다. 사교육 문제에 대한 해법을 듣고 있으면 더 그렇다. 무엇이 문제냐와는 다르게 해법은 다양한 결이 등장하는데, 나처럼 평범함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첫째, 창의성 교육을 강화하자는 거다. 좋은 말인데, 너무 추상적이다. 이런저런 나라들이 언급되면서 따라 하자는데, 두 정당이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나라에서 백년지대계가 가능할까? 무엇보다, 바보 같은 서울대생이 아니라 창의적인 서울대생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마음에 안 든다.

둘째, 부모가 그 역할을 하면 된다는 거다. 그럴 시간이 없는 내 팔자가 야속하지만, 있다 한들 부모가 다 똑같은 지능을 가졌을 리도 만무하다. 엄마표 어쩌고라는 말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이 방식으로 서울대 수시전형에 자녀를 두 명이나 합격시켰다는 게 왜 소개되는지 마음에 안 든다.

셋째, 아이의 경험을 확장해야 한단다. 무엇도 강요하지 말고 학원비 모아서 세계여행 보내주란다. 강심장이 아니라 시도도 못 하겠다. 무엇보다, 대안학교를 나와서 세계를 누비다가 미국의 구글에서 일한다는 아무개의 사례가 등장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내겐, 다 도박처럼 들린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해법이다. 사교육의 문제를 따지는 게, 다른 방법으로 잘 되는 걸 찾는 것일까? 이 '잘'에 대한 강박을 줄이지 않고 세상이 변할지 모르겠다. 공부 잘하는 사람, 영어 잘하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운동 잘하는 사람 등등을 우리는 얼마나 찬양하는가? 그 길에 이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사교육인데, 그 결과만을 사람들은 인정한다. 사회 수준이 높아진다는 장점도 있을 거다. 다만, 공부 '더' 잘하는 사람만이, 영어 '더' 잘 하는 사람만이 사람대접을 받는 게 괴상하다는 거다. 다음은, '더더'고. 과연 수준 높은 사회의 모습일까?

나는 사교육을 생존 수영에 종종 비유한다. 생존 수영은 필요한데, 이를 경쟁하면 그 필요한 것조차 배우지 않게 된다. 다 같이 잘하자가 아니라, 누가 더 잘하는지 보는 세상에선 갑자기 손과 발에 자세를 지나치게 따지고 본토 다이빙 자세니 아니니 그러며 서로를 평가한다. 배영 정도는 미리 배워놓아야지 수업에서 유리하다는 말들이 부유하더니, 배영 정도로 성적 잘 받길 희망하면 안 된다는 조언도 난무한다. 그러면 물에 떠 있지도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배우는 게 수치스럽다. 다시는 물에 발도 담그지 않을 거라고 결심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수학을 빨리 접한다는 시대인데, 초등학생이 자신을 '수포자'라고 말하는 세상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 비극을 누가 탓하는가? 저런 인간은 도태되어도 마땅한 존재가 될 뿐이다. 결국엔 생존 수영 배울 시기에 접영도 가뿐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랑받고, 그 자신감이 집중력을 키워 사회에서 인정받는 수준에 다다른다. 평범한 사람들은, 생존 수영만 믿다가 바보 되는 현실이 무섭다. 직종별 최저임금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말은 얼마나 빈번한가. 배영할 줄 모르니 사람 취급도 안 하겠다는 거다.

내 자녀만큼은 그런 대우를 받아선 안 되니, 아낄 수 없다. 대단한 목표도 없다. 딱 배영까지만 미리 배워서, 사람대접만이라도 받고 살길 바란다. 그래봤자, 고작 배영 배웠다고 수영 잘하는 줄 아냐는 소릴 듣겠지만. 끔찍한 건, 나와 아이도 누군가를 찾아 이렇게 말할 거라는 것이다. "뭐야? 배영도 할 줄 몰라? 물에 겨우 떠 있는 주제에 차별 어쩌고 그러는 게 우습네. 남들 뼈 빠지게 수영 배울 때 놀더니 꼴좋다."

그래서, 망국이라 하겠지만 망국이 아니었다면 괴물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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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민낯들>(2022),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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