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4대 개혁'을 내세웠던 대통령은 이제 없지만, 그가 추진했던 개혁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 19일, 정부가 '의료개혁 2차 실행방안'을 발표했고, 그다음 날에는 국회에서 국민연금 개혁안이 통과되었다.
의료개혁 2차 실행방안은 정부가 원점으로 돌려버린 의료인력 확충 계획을 제외하면 지난 1차 실행방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지방의료원을 비롯한 공공병원 지원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으며, 비급여 팽창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전반적인 비급여 혼합진료 금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치료에 필수적인 비급여는 급여화를 적극 추진'하겠다 밝힌 점은 긍정적이나, 그간 보장성 강화 정책이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위기를 초래했다며 최초로 보장성 강화를 포기한 현 정부의 기조를 감안하면 신뢰하기 어렵다.
국회에서 통과한 연금개혁안은 이른바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출산·군복무 크레딧과 지역가입자 지원, 국민연금법에 국가의 지급보장 명문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더 받는' 개혁안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OECD 평균 노인빈곤율의 3배에 달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3%포인트의 소득대체율 증가는 노인빈곤 문제를 해결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과연 이것을 '개혁'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패러다임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경제적 지속가능성과 재정 건전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시장의 실패를 다시 시장중심적 접근으로 해결하려 한다. 개혁을 표방하는 정부는 어떤 사회를 목표로 하고 어떤 미래로 나아가길 원하는 것일까? 단지 현 제도를 조금이라도 더 존속시키고 일종의 기능 부전 상태를 벗어나게 만드는 것만이 목표의 전부라면, 이는 개혁이 아니라 관리에 불과하다.
진정한 개혁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하기 전에 전체 사회에 대한 비전과 이를 구현하기 위한 각 제도의 위상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먼저 검토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제도가 전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구현하는데 기여하게 하려면 기존의 관행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까지 고려해야 진정한 개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체 사회에 대한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서 각각의 제도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기 위한 개혁이라면, 그 개혁은 각 제도에 갇히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국민연금뿐 아니라 기초연금과 퇴직연금 등 다른 연금제도나 정년 연장과 의무가입 연령도 함께 조정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민연금 가입이 어려운 불안정노동자를 양산하는 노동시장 구조의 개선, 노후 경제적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주거 정책과 돌봄 및 가족 정책, 그리고 조세 개혁 등 모두가 일할 수 없는 노후에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노동, 주거, 돌봄, 조세 등의 문제는 거주 지역이나 경제적 형편과 상관없이 누구나 필요한 보건의료 서비스에 접근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과도 직결된다.
기존의 재정 논리와 시장 논리에 매몰된 개혁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개인들이 납부한 보험료와 기금운용 수익만으로 국민연금 지급액과 재정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기금 고갈을 우려한다면, 건강보험처럼 국고 지원을 확대할 수 있다(물론 건강보험 국고지원도 법정 금액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지만). 시장 실패로 인해 지역과 특정 진료과에 공백이 발생한다면, 국가가 직접 공공의료기관을 설립하고 기존의 지방의료원들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현재 국가는 자신의 책임을 축소하려 노력하면서 개인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는 한편, 특정 프레임을 동원하거나 방치하고 있다. 국민연금 논의에서는 '세대 간 형평성'이나 '미래 세대 착취'라는 프레임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미래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대립으로 보이는 구도로 단순화하기에는 각 세대 내부의 편차가 너무 크다. 오히려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며 연금 가입이 어려운 청년노동자는 안정적인 소득과 자산을 형성한 또래보다 부족한 연금으로 인해 고령에도 불안정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노인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질 수 있다. 그 밖에도 국민연금을 둘러싼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 연금을 수령하는 남성과 여성, 플랫폼 기업과 플랫폼노동자 등 계급과 젠더를 관통하는 불평등 문제도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의료개혁에서는 정부가 자의적 기준으로 '필수'와 '비필수' 의료를 구분하고 대립시킨다. 마치 불필요한 의료에 자원을 낭비한 탓에 '필수' 의료에 투자를 충분히 못 했고, 이것이 의사들이 특정 진료과를 기피하는 원인인 것처럼 구도를 형성한다. 하지만 의사들이 특정 진료과로 쏠리는 현상은 시장 중심 보건의료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이 문제는 공공성 기반의 보건의료 시스템과 시장 중심의 보건의료 시스템이라는 더 근본적 구도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의 비민주성도 심각한 문제다. 국민연금 개혁안은 국회에서 거대 양당이 합의한 사항이지만, 그 이전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했던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의료개혁은 어느 날 갑자기 정부가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을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대형병원과 산업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하고 있다. 연금과 무관하게 노후가 보장된 특권층이 합의하는 연금개혁, 보건의료를 산업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주도하는 의료개혁이 과연 진정으로 개혁적일 수 있을까?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광장이 다시 열렸다. 이곳에서는 내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규탄하지만, 내란 이전부터 많은 사람의 삶과 고통에는 관심 없었던 그들의 행태와 정책들에 대한 성토도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추진한 개혁을 인정할 수 없음은 물론이며, 차기 정부 역시 그들과 같아서는 곤란하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동시에 광장에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각자의 상상과 비전이 논의되고 있다. 단순한 반대의 움직임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장이 된 것이다. 개혁이 단순히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새롭게 그려나가는 과정이라면, 그 개혁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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