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인권위원회가 극우 세력의 방패막이로 전락했다. 지난 2월 10일 인권위는 제2차 전원위원회를 열고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이라는 탈을 쓴, 사실상 '내란수괴 윤석열 방어권 보장의 건'을 수정 의결했다. 다음날 문정호 전국공무원노조 국가인권위지부 지부장을 비롯한 노동자 50여 명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 숙여 사죄했다. 위원장 안창호를 비롯해 찬성표를 던진 위원들이 버린 인권과 양심을 끝까지 주워 담으려고 했던 쪽은 노동자였다.
극우 방어와 인권 바꿔치기한 인권위
인권위의 행보는 광장의 시민과 매우 대조적이다. 남태령에서 농민과 청년 여성들은 연대를 이루어냈고, 소수자로서의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사회대전환의 방향을 나누기 위한 공론장과 소모임을 (재)생산해 왔다. 내란 선동에도 꿋꿋하게 서로의 삶을 지켜 온 시민들의 인권을 인권위는 윤석열을 비롯한 극우 정치세력 방어권과 바꿔치기했다.
전원위가 있었던 날 윤석열을 비호하는 극우 세력은 인권위 건물에 난입하여 시민들과 기자들의 회의실 출입을 막고서는 점거를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은 극우 지지자들을 어르고 달래기만 했다. 남태령까지 트랙터를 몰고 온 농민과 윤석열을 체포하러 한남동 관저에 진입하려 했던 노동조합원을 연행했던 지난 작태와 비교했을 때 매우 온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경찰청의 우두머리들이 왜 내란 공범으로 전락했는지 알만 하다.
인권위의 사유화
국가인권위원회는 입법, 사법, 행정 3권과 독립된 인권 보호 및 향상을 위한 기구다. 때때로 시민사회는 인권위를 매개로 국가권력을 견제할 수 있었다. 또, 차별금지법이 십수 년째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던 상황에서 인권위법은 차별금지 사유로 '성적 지향'을 명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인권 약자들은 인권위원회를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보루로 여기기도 했다. 공정성과 전문성에서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선언문에서 정의하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돼 '인권' 쟁점을 관장하는 유일한 국가기관이었다.
한데 윤석열 정권은 인권위를 점차 극우 세력의 것으로 사유화했다. 지난해 5월, 변희수재단 준비위원회는 재단의 비영리법인 등록 신청서를 인권위에 제출했다. 이후 상임위 상정을 위한 절차를 거쳤지만, 현재까지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않았다. 그 사이, 9월 인사청문회 당시 노골적인 성소수자 혐오 발언으로 논란이 된 안창호가 임명되었다. 12월 23일 열린 제23차 상임위에서는 '비영리법인 설립허가 의결의 건'이 상정되었음에도, 변희수재단은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인권 감수성이 부족한 무자격 극우 인사가 위원직을 장악하면서 내부 자정 기능마저 상실해 가고 있었다. 국민의힘의 추천에 의해 상임위원으로 임명된 이충상은 2022년 취임 이후 공직자 재산등록 과정에서 담당 직원에게 불이익을 예고하는 문자를 보냈다가 내부 특별감사를 통해 권한 남용과 부당한 요구·지시를 한 사실이 규명되었다.
하지만 인권위는 지난해 7월 특별감사 보고서를 완성했음에도 국회 제출과 공개를 거부했다. 안창호는 11월 국회 질의에서 이충상의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부정하며 감싸기까지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족을 향한 이충상의 2차 가해 발언과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 보고서 심의 과정에서 상임위원 김용원이 내뱉은 "일본군 성노예 타령" 망언은 인권의 최후의 보루였던 인권위에까지 노골적인 반인권적 극우 이데올로기가 준동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윤석열 정권이 비상계엄 한참 전부터 차근차근 '인권'을 압살하려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광장의 힘으로, 시민에게 권력을!
어떻게 극우 세력이 이토록 쉽게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 불리는 기관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단순한 일탈적 존재가 아니다. 수십 년간 반복된 반공 이데올로기, 강압적 국가주의, 소수자 혐오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동원이 그들의 토대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반노조·반여성·반성소수자·반이민 정서를 악용하여 혐오·차별과 각자도생을 정당화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 왔다. 인권위 사태는 극우 세력의 확장이 정점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인권위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극우 세력이 더 확대되지 못하도록 불안정·저임금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사회적 참사·국가폭력 희생자 등 평범한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하고 낡은 시스템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 부자와 엘리트들, 거대 양당의 정치인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새로운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세력화해야 한다.
지금 현재 광장의 민주주의는 극우의 확산을 막고 직접 권력을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윤석열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시민들이 일터와 삶터,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대안적인 힘을 구축하는 것이다. 극우 세력이 여론을 조작하고, 최소한의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를 왜곡하더라도, 시민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연대하면서 권력을 견제하는 공론장, 광장 민주주의가 지속되어야만 저들의 기만은 이내 힘을 잃을 수 있다.
지난 몇 주간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추위, 헌법재판소로의 시선 집중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극우 세력의 준동에 따른 위축감도 영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야 할 때다. 윤석열 탄핵 인용이라는 결과를 얻더라도, 극우세력이 더 준동한다면 민주주의와 평등으로 가는 길은 더 요원해질 뿐이다. 윤석열이 만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광장에 나오는 우리, 일터와 동네에서 대안적 공론장을 만드는 우리만이 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인권위가 끝까지 극우의 방패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인권의 방패가 되어 더 강력한 민주주의로 응답해야 한다. 그들이 포기한 인권을, 우리가 쟁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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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이하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에서 발행하는 <윤석열 퇴진 시키고 평등으로>에 실렸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에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에 함께 하는 다양한 사회운동단체들, 노동운동단체들, 노동당·녹색당·정의당 등 진보정당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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