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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기념토론회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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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기념토론회 참관기

[다시! 리영희] 비상했던 시기, 비상했던 한 인물의 비상했던 노력을 기억하며

1. 뜨겁기로 말하면 2부가 더 뜨거웠다

비상한 시대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며 살았던, 비상했던 한 인간을 기억하는 자리였다.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목격하고 자기 역시 그런 책을 쓰는 것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모인 자리이기도 했다. <전환시대의 논리> 발간 50주년 토론회 1부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2부는 국내 언론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꾸며졌다.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1부에 비해 언론 문제를 다룬 2부는 토론회장 곳곳에 빈자리가 보였다. 그러나 열기로 보면 1부보다 2부가 더 뜨거웠다. 1부 토론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전문가들의 분석과 전망이라면 2부 토론자들은 언론 문제의 당사자들이었으니 고민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들의 말도 더 절박하게 들렸다. 청중 가운데 상당수가 전직 언론인들이기도 했다.

-연단에서 토론할 때 플로어에 계시는 분들의 집중과 몰입, 진지한 태도와 열기 때문에 혹시 부담을 느끼지는 않으셨습니까.

"언론계 대선배들인 원로분들이 많이 오시고 해서 처음에는 좀 당황했어요. 내가 이분들 앞에서 감히 미디어 어쩌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희 사정이 이렇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게 좀 이야기가 길어진 거 같습니다."/권태호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같은 질문에 대해 정준희 답변은 이러했다.

"부담까지는 아니고요. 리영희 선생님과 같은 세대이거나 또는 그분의 후배로서 시대를 경험하고 그걸 지켜왔던 분들에게 제가 마치 새로운 권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비칠까 우려했던 면은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컸던 것은 아닙니다. 그날 연배가 많은 분부터 젊은 세대까지 비교적 다양했습니다. 이런 세대적 다양성을 가지고 50년 전 이야기를 50년 이후에 토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고무적이라고 저는 봤습니다."/정준희 한양대 겸임교수

2부 사회는 성공회대 교수 최영묵이 맡았고 토론자는 권태호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 김희원 <한국일보> 뉴스스탠다드실장, 정준희 한양대 교수였다. 토론자의 면면은 화려했지만 토론회 구성이 짜임새 있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전환의 시대 미디어와 저널리즘>이란 제목의 2부 토론회는 사실 중구난방이었다. 한국 언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리영희 저널리즘' 관점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니 어디에서 어디까지 논의하자는 것인지 토론자들도 감을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소 산만할 수 있었던 2부 토론이 흥미로웠던 것은 발제를 맡은 정준희와 권태호의 입장이 선명하게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한국 언론인들의 역량에 대해서 두 사람의 생각이 사뭇 엇갈렸다. 플로어의 청중들도 그 점을 관심 있게 보는 듯했다.

2. 한국 언론은 3무 언론- 지적 역량도, 물적 토대도, 사회적 유대도 잃었다

기존 미디어에 대한 정준희의 비판이 날카롭고 매서웠다. 도발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것이다. 정준희는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냈던 50년 전에는 "논리의 공급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동력을 촉진할 수 있었지만 현재 한국 언론에는 그럴 힘도, 핵심 주체도, 의지도 없다"고 단언했다. 새로운 전환시대를 인식하고 선포할 지적 역량과 물적 기반, 사회적 유대를 잃었다는 말은 아프다. 토론회 이후 그 말에 대한 의미를 조금 더 들었다.

"50년 전에 리영희를 비롯한 일부의 언론인들이 나름의 엘리트성을 가지고 하고자 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의 언론인들은 그럴 역량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거든요. 그런 역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정보 환경을 선도할 수 있는 힘이나 물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실제로 같은 시간을 투여해서 전문가에게 일정한 저널리즘 훈련을 시켜서 뭔가를 하라고 했을 때 과연 직업적 저널리스트가 확연히 차별화된 어떤 엘리트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거죠. 저는 그럴 수 없는 조건이라고 보는데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언론인들이 능력이 없다라기보다는 그런 능력을 갖기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겁니다."

권태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평소 그가 글 쓰는 태도로 볼 때 다변은 아닌 듯한 사람인데 그날 토론회에서는 말이 길었다. 언론의 정파성 문제, 한국 언론의 영세한 현실에 대해 고민이 깊어 보였다. 기자들 개인의 역량과 관련해서, 미리 준비한 발제문보다 토론회 현장에서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최소한의 양심만 지키면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었던 리영희 시대에 비해 현재 기자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준비한 부분을 현장에서는 이렇게 풀어서 말했다. 정준희의 도발적인 지적에 대한 현직 언론인의 자존심을 앞세운 항변처럼 들렸다.

"정준희 교수께서 한국의 기존 미디어가 지적 역량, 물적 기반, 사회적 유대를 다 잃었다 이렇게 지적하셨더라고요. 그 말에 제가 그렇지 않다라고 말을 못하겠는데 그런 생각은 들었습니다. 이게 있었던 건데 없어진 건지, 아니면 원래 없었던 건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70년대 선배들이 과연 지금 입사하는 후배들보다 뛰어났을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지금 후배들은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요. 그리고 도덕적인 면에서 당시 70년대 기자 사회의 도덕성이 2020년대의 기자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요? 리영희 선생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1970년대 기자들의 모습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도덕적으로 이전 기자들에 비해서 지금의 기자들이 훨씬 낫고요. 지적인 역량도 50년 전 기자들보다 지금이 훨씬 낫습니다."

권태호는 다만 1970년대는 일반 대중에 비해 언론인들의 지적 수준이 월등히 뛰어났지만 현재는 기자나 일반 대중들이 지적인 역량 면에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언론의 계몽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언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특히 레거시 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한국 언론의 미래를 어둡게 봤다. "옆에 있는 신문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SNS 이용자와 블로그와 유튜버 모든 콘텐츠 생산자가 다 언론의 경쟁자인 세상"이라고 규정한 김희원은 토론회 내내 문제 제기보다는 답을 찾는데 주력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한 '의미가 있고 현장감 있고 친절한 뉴스를 만든다'는 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게 지금 한국 언론 위기의 핵심 아닌가 싶다. 청동기 시대 문명이 무너진 것은 더 좋은 청동기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라 철기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언론 경력 30년이 넘는 동료 언론인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는 이야기를 듣자니 다소 우울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이제 AI 시대가 되면 각 미디어에 의해 기사들이 독자들에게 전달이 안 되고 그 각각의 기사들이 AI를 통해서 종합적으로 요약해서 보는 그런 새로운 뉴스 읽기 행태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고 그럴 경우에 포털을 통해서 뉴스가 공급됐을 때 언론사의 수익이라든지 영향력 이런 게 악영향을 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한 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김희원 한국일보 뉴스스탠다드 실장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게 사회적 유대인데 이거 역시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이전에는 독자들과 끈끈한 유대가 있었는데 이게 다 끊어지거나 와해되거나 대단히 느슨해졌습니다…이 구조가 온존한 상태에서는 앞으로 한국 언론의 방향은 정해져 있습니다. 선정성은 더욱 더 강화될 것이고 정파성도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 언론의 미래는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디스토피아로 가게 될 것입니다."/권태호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문제 제기가 길고 무거웠던 것에 비해 그에 대한 해법은 모호하고 짧았다. 리영희라면 어떤 자세로 어떤 해결 방안을 내놓을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연속보다는 단절을 강조하는 정준희의 해법이 그 현실적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더 귀에 들어왔다. 정준희에게 토론회 이후 전화를 걸어 몇 가지 더 물어본 것도 그런 이유다.

"리영희 선생님의 공헌은 자기 다음 세대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고 그 세대 스스로가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인데 그런 관점에서 지금 기존 언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거죠…지금 시기를 운동이 필요한 시기로 볼 거냐 아니면 계속 하던 것을 보수해가면서 갈 거냐를 결정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연속이냐, 단절이냐를 선택해야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연속성을 선택하면요, 지난 100년 동안 생존의 논리를 익히며 성장해 온 보수 언론들만 생존할 겁니다. 자기 방식으로 나쁘게 진화하겠죠."

정준희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운동'을 이야기했지만 그 말은 조금 어렵게 들렸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언론이 왜 어려운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기성의 언론조직 안에서만 생각하면 한계가 있다는 말은 새겨들을 만했다. 특히 기성 언론인들이 저널리즘과 저널리즘 아닌 것을 구분하고 메이저인 것과 메이저 아닌 것을 선 그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말은 부인하기 힘들었다. 그런 태도로는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필자 역시 경험했기 때문이다.

김용진은 재판과 검찰 수사 일정 때문에 토론회 중간에 일어서야 했다.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의 첫 장을 언론자유 이야기로 채웠던 50년 전 그 때와 지금 한국 언론의 현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했다. 김용진은 서둘러 자리를 일어서면서 한국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이야기했다. 그 자리에서 나온 가장 구체적인 해법이기도 했다.

"저희들이 이제 독립언론 100개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한 3년 전부터 시작했고 지금 한 6개 독립언론을 이미 만들어 실제로 활동하고 있고 거기서 활동하는 기자의 대표가 지금 이 현장을 취재하고 있습니다…다양화되는 언론 환경에서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저널리스트가 기존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고 새로운 방식, 새로운 플랫폼, 새로운 형식으로 우리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언론 모델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저희들이 이제 그런 것들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리영희의 제자이기도 한 2부 진행자 최영묵은 리영희가 지금 시대에 살았더라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사실 건조한 사회과학적 논증을 앞세웠던 리영희에게 소설은 가장 먼 장르 아닐까 싶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때라서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리영희를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니 흥미롭기도 했다.

"지금 리영희 선생님이 이 상황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셨을까? 제 짐작으로는 한강 작가 같은 소설을 쓰셨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리영희 선생님은 진실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 방법, 수단은 고정적이지 않잖아요. 진실은 그렇게 실체를 딱 고정해서 전달하기가 어렵잖아요. 탈 사실 시대라고도 하니까 한강 작가처럼 소설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광주 얘기 중에서 리영희 선생님이 쓰신 <광주를 말한다>를 가장 잘 쓴 글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소년이 온다>를 보면 리영희 선생님은 그것보다 훨씬 더 잘 쓰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토론회가 엿가락 늘어지듯 늘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정해진 시간을 엄격하게 지켰다. 질문은 사전에 배포한 질문지를 통해서만 받는다고 고지했고 그 원칙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1부 토론에서는 몇 사람의 서면 질문을 받았지만 2부 토론에서는 시간 관계 때문인지 서면 질문도 없었다. 그런 토론회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한두 사람이 마이크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일을 피하고 시간을 엄수하려는 의도였겠지만 2부 토론은 플로어 질문을 적극적으로 받고 토론을 조금 더 이어가도 좋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 오신 분들이 언론계에 오래 종사하셨던 원로들이니 우리가 보기에 현재 언론이 이런 게 문제더라 또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같은 평가를 좀 듣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저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회사로 가져가서 동료들과 논의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권태호 한겨레신문 논설실장

3. 토론회 주인공은 플로어의 청중들

이날 토론회는 오후 세 시에 시작돼 3시간 반 남짓 진행됐다. 평일 오후 세 시는 다소 애매한 시간이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오려면 큰 마음먹어야 올 수 있는 시간인데 그렇게 큰 마음을 먹고 참석한 사람 중에는 전북대 사학과 교수 이섬관도 있었다.

-일부러 그 토론회 때문에 서울에 오신 건가요?

"토론회 그날 서울에서 볼 일도 있었지만 그 토론회는 제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고 발표자나 토론자 가운데 글만 본 분들도 계셔서 실제로 어떤 발표를 하실까 궁금해서 꼭 한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그 토론회 주제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기대를 가지고 갔는데 아무래도 시니어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그런 분들이 오시는 것도 물론 좋지만 30대나 40대 계층도 많았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날 토론회는 자신의 삶을 던져 세상과 싸우고, 세상을 바꾸고, 한때는 세상을 움직여 보기도 한 '나이 든 청년'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이제는 머리 허얘지고 등이 굽었지만 다들 왕년에 한가락 했을 사람들이다. 이 땅의 민주와 진보 역사에 이름 석자 올리기 부족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얼굴만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름이 딱 떠오르지는 않지만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리영희의 '동지'들과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로 모시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리영희를 이제는 전설로 아는 청년들도 있었다. 세대로 말하자면 3대가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다. 이른바 내빈이라는 사람들의 인사말이 끝나면 앞자리 앉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서고 뒤에 앉은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 일어서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나도 한 번 마이크 잡아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있을 법한 유명 참석자 소개 같은 것도 없었다. 참석자 모두가 이 모임의 주인공, 아니 책임자는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자리를 지키는 듯했다.

3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토론회에 몰입하는 청중들을 보면서 이들은 왜 이렇게 진지하고 열정적인지 궁금했다. 한 차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기는 했지만 그 분위기를 깨지는 못했다. 토론회 중에 누구 하나 조는 사람이 없었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통령과의 회의 시간에도 졸았다는 전 청와대 정무수석 유인태조차 토론회 내내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눈을 감고 집중할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헤아려 보니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냈을 때 나이가 마흔다섯 살 때였다. 지금으로 치면 언론사 차장급 정도의 연배였으니 청년이라고 해도 그리 과하지 않은 나이였다. 그날 청중들의 정신적인 평균 나이는 리영희가 책을 쓰던 그 때의 나이 아닐까 싶었다.

그날 토론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단연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었다. 1부 토론회 사회를 맡은 이남주가 일부러 그들을 일으켜 세우기도 했지만 그 청년들이 없었다면 그날 토론회는 지난 날의 추억을 되짚어 보는 자리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평화라는 뜻의 스페인어인 파즈(PAZ)라는 이름의 대학생 연합동아리 학생들은 1부는 물론 2부 토론회 내내 자리를 지키며 경청했다. 자신들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고 이 시대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기 위해 참석했다는 것이다.

1부 순서 토론자로도 나선 이 모임의 대표 이해지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리영희의 그 책이 여전히 잘 읽히고 문체 역시 현대적이라고 느끼는 중장년 세대와는 달리 청년들이 이 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들에게 토론회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그날 토론회장에서 위화감이나 불편함 같은 것은 안 느끼셨나요? 아무래도 연배가 높은 분들이 많았고 청중 가운데 남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우리들과는 다른 세대구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말씀하신 거랑 비슷하게 느낀 부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어르신들이 확실히 많고 남성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직까지는 과거의 관점에서 국제정치, 외교를 바라보는 분들도 계시기도 할 테고요. 그런데 저희를 되게 반갑게 맞아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 이런 부분들을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까 그러시는 것 같은데 위화감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저희 동아리 역할이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그날 토론회장에 오셨던 분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해오신 선생님들이라서 그런 분들을 직접 만나 뵌 것만으로 저나 제 친구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국제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동아리 소속이라고 해서 저는 1부 토론회 끝나고 가실 줄 알았는데 2부 토론회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시더군요.

"올 때부터 최대한 끝까지 같이 있자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정치와 외교라는 것을 언론에서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있게 됐습니다. 그날 같이 온 친구들 중에는 언론에 관심이 있는 친구도 많아서 끝까지 경청하게 되었습니다."

4. 리영희 세대는 왜 이렇게 진지하고 뜨거운가

한국 민주운동사에서 1974년은 특기할 만한 해였다. 유신 독재 선포 이후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운동 세력의 반격이 본격화된 해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을 중심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시작되었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그해 6월 발간되었다. 당시 가격이 1천 3백원, 그 때 초판본을 리영희재단에서 최근에 50만 원을 주고 중고서적 거래 사이트에서 구입해서 토론회장 입구에 진열했다. 리영희의 첫 저작이자 대표작이다. 창비신서로 기획된 이 책을 내자는 백낙청의 제안에 대해 리영희는 이런 책이 팔리겠느냐며 손을 내저었지만 백낙청은 "틀림없이 팔리고 많이 팔릴 겁니다"라고 했다는데 백낙청이 맞았다. 초판이 30쇄를 찍었고 2005년에 나온 개정판은 지금까지 27쇄를 찍었다. 토론회장 입구에서 올 2월에 나온 2판 27쇄 책을 팔고 있었다.

그날 1부 사회를 본 성공회대 교수 이남주가 농담처럼 이 책이 지금까지 잘 팔리는 것은 제목이 좋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꼭 농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전환 시대'란 이야기는 '위기의 시대'라는 말과 함께 어느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자기 시대를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위기' 아닌 시대는 없을 것이고 '전환'의 국면이 아닌 때도 없기 때문이다.

50년이란 세월은 사람의 기억이 지워질 수도 왜곡될 수도 있는 시간이다. 같은 일이라도 다르게 기억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아직도 현재형의 가치를 지닌 책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50년 전 기억은 다소 흐릿했다. 그 책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기억이 조금씩 엇갈렸다. 누군가에게는 50년 전 이야기가 생생한 현재일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갈 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은 지금도 논의되고, 왜 리영희의 이름은 끊임없이 호명되는가. 이 책에 실린 글은 굳이 따지자면 시사평론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책이 50년의 세월을 견디며 읽힌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글이 낡지 않았다는 권태호의 이야기는 문체를 두고 한 말이다. 불과 몇 년 전 글들도 낡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책에서는 좀처럼 세월을 느끼기 어렵다. 리영희식 글쓰기의 매력이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저자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리영희 문제 의식의 근본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일 테고 그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리영희와 <전환시대의 논리>를 비롯한 리영희의 저작은 현재형으로 남을 것이다. 그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이에 천착하는 진보 진영의 자세가 참으로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회 내내 진지하게 발표자와 토론자에게 눈과 귀를 집중하는 '나이 든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리영희와 리영희의 이 책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든 것은 그 세대의 집요한 문제의식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리영희는 복 받은 사람이다. 리영희재단에서 나눠준 팸플릿에는 환하게 웃는 리영희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들어있다. 그 사진은 자신이 복 받은 사람임을 조용하게 웅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과제를 부여안고 씨름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았다는 것도, 거기에 자신의 온몸을 던질 수 있었다는 것도 복 받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각성과 투신으로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던 시대에 살았다는 것도 지금 돌아보면 행운이다.

지금은 리영희의 시대, 리영희 저널리즘을 말하지만 엄혹한 그 시절 리영희는 비주류였고 다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다른 삶을 살았다는 말은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달랐던 리영희를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 기억하는 것은 지금 언론의 어려움을 부인하기는 어려워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다. 그런 점에서 이번 토론회, 특히 2부 언론 토론회는 '전환 시대'를 맞이하는 '기자' 리영희 후배들의 남다른 노력을 촉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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