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기나긴 여름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더위가 석 달을 꼬박 채우며 계속됐다. 중국과 일본을 덮친 역대급 태풍이 한반도를 비껴가는 대신 초가을의 반가운 소식이 자꾸만 뒤로 미뤄졌다. 심지어 추석에도 무더위는 끝날 줄 몰랐고, 몸도, 마음도 이제 더는 견디기 힘들다고 아우성 댔다. 그러다 10월과 함께 드디어 가을 날씨가 찾아온 것 같다. 아직도 한낮 기온은 마치 한여름인 듯 뜨겁지만 말이다.
몇 년 전부터 매해가 그러했지만, 올해는 확실히 한반도에서 기후변화를 결정적으로 체감한 해다. 올해 여름부터는 누구의 입에서나 "이번 여름이 앞으로 가장 시원했던 여름이 될 것"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한국어의 세계에서 기후 문제는 여전히 경제와 얽히고 정치를 움직이는 소재와는 거리가 멀다. 일상의 푸념일 수는 있어도, 늘 어느 정도는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되는 정치 쟁점에는 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덥고 습하고 춥고 비바람이 거센 것만큼 우리 삶에 당장 영향을 끼치는 현실이 또 무엇이 있는가? 이것만큼 지금 우리 생명과 생활을 직접 결정하는 요인이 또 무엇이 있는가? 이에 비하면 아파트 값이나 주식 가격 동향은 얼마나 '비현실적', '초현실적'으로 들리는가?
'진보'가 아니라 '후퇴'를 고민할 때
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9월 7일에 서울 강남대로에서 '기후정의행진'이 있었다. 심상치 않은 여름 날씨를 겪으며 더욱 위기감을 느낀 많은 시민들이 이 행진에 함께 했다. 또한 여러 진보정당들도 참여했다. 국민의힘과 마찬가지로 기후문제에 미적대는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에 결합한 정당들도 '진보정당'으로 봐야 하는가에 관해 아직도 곳곳에서 논란이 있지만, 아무튼 자칭 타칭 '진보정당'들이 대거 동참했다.
그런데 비례위성정당 합류 같은 쟁점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진보정당'이라는 말 또한 정색하고 다시 따져봐야 한다. 대한민국은 '좌파'나 '사회주의' 같은 말을 쉽게 쓸 수 없는 나라였고, 지금도 이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좌파를 '좌파'라 하지 못하고 다른 말로 에둘러 불러야 하는 시대가 지금껏 이어졌다. 4. 19 혁명 전후한 시기에는 '혁신계'라는 말이 그 자리를 채웠고, 제6공화국 시대가 시작될 무렵부터는 '진보파'가 그런 용도로 쓰였다. 고 노회찬 의원 같은 분들이 '진보'가 '좌파'의 대체어로 통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나도 본래 '세계 좌파정당 운동사'라 해야 할 책을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서해문집, 2019)라는 제목으로 낸 바 있다.
그러나 '진보'라는 단어가 언제까지 이런 위상과 역할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의 '진보'는 어쨌든 "앞"이 있음을 전제한다. 그 "앞"을 민주주의의 더 나은 상태, 즉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로 본다면, 여전히 의미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실은 "앞"에는 그런 민주주의의 측면 말고도, 아니 그것보다 더 명시적인 다른 가치들이 함축되어 있다. 생산의 확대, 그에 따른 경제 규모 증가, 과학기술의 무한 발전 등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진보'는 '발전', '성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의 자장(磁場)에 속해 있다.
한데 지금은 기후재난의 시대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기온 1.5도 이상 상승이 이미 기정사실화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진보'가 과연 얼마나 절실한 긍정적 가치가 될 수 있을까? 요즘 '진보정당'이 어느덧 좌파정당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다른 이름이 된 세태를 한탄하거나 규탄하는 목소리가 있고, 혹자는 오히려 반대로 '진보정당'들이 제기한 과제가 더불어민주당의 몫이 돼버렸으니 이제 진보정치란 곧 더불어민주당 정치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시대의 풍향을 제대로 감지한다면, 지금은 좌파정당들 자신이 '진보정당'이라는 호칭을 재고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진보'와 정반대되는 말로 이해되는 '후퇴'를 우리 시대의 정치적 지향으로 고민하자는 논의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후퇴학' 토론이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후퇴'라니? '탈성장'이나 '포스트성장' 같은 말들보다 훨씬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그만큼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가감 없이, 솔직하고 용감하게 제기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논의를 발의한 사람 중에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상당히 친숙해진 우치다 타츠루(內田樹)가 있다. 본래 프랑스문학 전공자였다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상에 매혹돼 철학자라는 분류에 더 어울리는 저작 목록을 쌓아온 우치다 타츠루는 지금은 대학을 떠나 자유사상가로 활동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다수의 저작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치다 타츠루는 도발적인 주장을 던지길 주저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논객이지만 일본 사회의 모순과 궁지를 짚는 대목에서는 늘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 깊이를 보여준다.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 '후퇴'라는 화두다. 우치다 타츠루 말고도 '후퇴학'에 공감하는 여러 필자들이 쓴 글을 담은 <한 걸음 뒤의 세상: '후퇴'에서 찾은 생존법>(박우현 옮김, 이숲, 2004)에서 이 말에 모여드는 고민의 가닥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실린 글 "후퇴를 위한 두 가지 시나리오"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후퇴학'의 배경이 되는 네 가지 큰 위기로 "팬데믹, 기후위기, AI 도입에 따른 고용환경 변화, 인구 감소"를 든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가장 중대한 네 가지 위기이며, 우치다 타츠루도 지적하듯이 인구 감소와 고령화의 속도에서 한국은 일본보다도 더 앞서가는 형편이다.
우치다 타츠루를 비롯해 <한 걸음 뒤의 세상>의 집필자들은 하나같이, 이 네 가지 위기를 말끔히 '해결'한다거나 진행 속도를 '지연'시키면서 현재의 생활방식을 지속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하물며 새로운 '성장'이나 '진보'를 고민하여 풀릴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계속된 '성장', '진보'의 필연적 결과가 이러한 거대 위기로 나타난다고 파악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현 경제 규모나 사회 수준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진단한다. 중요한 것은 소수 강자가 아니라 다수 약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후퇴'를 실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다음 같이 명쾌하게 정리한다.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최고령 국가 단계에 진입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노인뿐인 나라'라면 어떤 제도를 마련해야 사람들이 나름대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일본은 세계에 모델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일본이 후퇴 전략만큼은 피해를 최소화해 연착륙에 성공했다"고 세계에 알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라면 일본은 세계에 도움은커녕 후퇴에 실패해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는 사례로 남겠죠." (<한 걸음 뒤의 세상> 11-12쪽)
솔직히 말하면, <한 걸음 뒤의 세상>에 실린 글들은 이런 후퇴 전략의 내용으로는 아직 크게 미완성이다. '후퇴학'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와 몇몇 커다란 원칙의 선언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후퇴'라는 인기 없을 말로 현재 일본 자본주의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을 가장 정직하게 의제에 올린 태도 자체는 높게 평가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후퇴'라는 화두를 꺼내들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직면할 현실을 늘 일본 사회가 먼저 겪고 고뇌해온 지난 세기의 여정은 21세기에도 '후퇴학'을 둘러싼 대화로 반복될 운명인가 보다.
'후퇴'의 시간을 열기 위한 '퇴진'이어야 한다
그래도 역시 '후퇴'는 께름칙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탈성장'보다도, '수축'보다도 더 자학적인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후퇴'의 영어인 retreat의 여러 의미를 곱씹어 보면, 꼭 부정적인 어감만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retreat는 '뒤로 간다'는 뜻이지만, '물러선다'는 의미도 있다. 지금 전개되는 어떤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 의미가 '피정(避靜)'이다. 우치다 타츠루도 '퇴수(退修)', '정양(靜養)', '정사(靜思)' 같은 일본식 번역어로 retreat의 뜻 가운데 이 측면을 지적하는데, 한국 가톨릭교회가 retreat를 옮긴 말은 '피정'이다. 번잡한 일상이나 무거운 번뇌에서 벗어나 묵상이나 수련을 위해 칩거한 상태를 '피정'이라 한다. 좀 더 일반화하면, "일상을 벗어나 차분한 환경 속에서 영성을 충만히 하는 시간을 갖는 것"(<한 걸음 뒤의 세상> 13쪽)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말로 지금 한국 사회와 그 모든 구성원에게 시급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후퇴'인 것 같다. 지금이야말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가 성공에 도취해 내닫고 있는 질주를 일단 멈추고 "한 걸음 뒤"에서 이 여정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우리는 정말, 지난 세대가 GDP 몇 만 불 시대 달성을 내세우며 총력전을 벌였던 것처럼 인공지능 개발 경쟁을 위해 총력전을 벌이자는 윤석열 정부의 구호에 발맞춰 나아가야 하는가?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의 '개미' 투자자들을 위해 현 정부와 감세 경쟁을 벌이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을 다음 권력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기만 하면 되는가? 기왕에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시작됐으니 아예 인구를 더욱더 수도권으로 집중시키고 부와 권력을 능력 있는 소수에게 더욱더 몰아주면 되는 것인가?
최근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확실히, 하루라도 더 빨리 퇴진해야 할 정권이다. 그러니 2016-17년 촛불시위의 쓰라린 기억에도 불구하고 '퇴진'의 목소리는 더욱더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대로 '퇴진'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후퇴'를 위한 '퇴진', '후퇴'를 동반하는 '퇴진', '후퇴'를 여는 '퇴진'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처음으로 '후퇴'의 시간을 갖기 위한 '퇴진' 투쟁이어야 한다. 모든 시민이 지금까지 달려온 길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 길을 돌아보고 서로를 마주보며 새 방향을 짚어보는 시간. 이때에는 이제껏 '진보' 세력이 주장해온 대안들조차 원점에서 재논의되고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보다는 '후퇴' 혹은 '피정'에 값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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