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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제멋대로 악용한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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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제멋대로 악용한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81]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⑨

[(유대인은) 언제나 다른 민족의 몸속에 사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더러 지금껏 살던 생활권을 포기해온 것은 그들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때때로 악용한 숙주(宿主) 민족에게 내쫓긴 결과다. 그들의 자기 번식은 모든 기생충의 전형적인 현상이며 그들은 언제나 자기인종을 위해서 새로운 숙주를 찾고 있다. (중략) 그들이 나타난 곳에서는 어디서든 머잖아 숙주 민족은 없어져 버린다](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한길사, 2014, 436-437쪽).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초판 1925)은 유대인을 '기생충'으로 낮춰 부르면서 이들을 지구상에서 없애야 한다고 했다. 나치 집단의 용어를 빌리자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을 통해 유대인을 '절멸'(絶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보다도 더 악질적인 전염병을 일으키는 정신적인 페스트'라고 낙인찍으면서 "가장 악질적인 세균 보균자로서 사람들의 영혼을 해친다"고 독설을 퍼부었다(아돌프 히틀러, 186쪽).

위 인용문에서 보듯, 히틀러는 유대인을 없애지 않을 경우 이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인 숙주 민족(원주민)이 오히려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아랍인들의 시각에서는, 히틀러의 그런 주장이 안타깝게도 현실이 됐다. 지난 주 글에서 짚었듯이, 유대인 금융자본과 대영제국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손잡았던 밸푸어선언(1917) 뒤 유대인 이주가 봇물처럼 터졌다. 팔레스타인의 인구지도가 바꾸었고, 끝내는 그곳 아랍계 원주민들에게 나크바(Nakba, 대재앙)를 안겼다.

20세기의 베스트셀러, 21세기에도 꾸준

<나의 투쟁>은 20세기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1925년 초판이 나온 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올랐을 때까지 24만부가 팔렸다. 히틀러 집권 뒤 판매량은 가파르게 올라갔다. 패전 뒤 600만 명에 이르렀던 실업자들이 사라지고 히틀러의 정치적 인기가 올라가자, 덩달아 <나의 투쟁>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1945년까지 1000만 부 넘게 찍었다(일설에는 최대 1500만 부).

그 모두가 유료 판매는 물론 아니었다. 전선의 병사들, 혼인 신고하는 신혼부부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책의 두께가 두툼한 것이 좀 문제이긴 했다. 해결책이 곧 나왔다. 일반 독자들을 위한 요약판, 어린이용 만화판, 시각 장애인용 점자판까지 나왔다. 그렇다고 나치 정권 시절의 독일인들이<나의 투쟁>을 애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장광설이 많고 논리적이지도 못해 마음 편히 읽은 만한 책과는 거리가 멀다. 종교인들이 경전을 집에 갖고 있듯이, 독일인 가정마다 한두 부씩 갖고 있었다고 보면 맞다.

독일에서만 많이 팔린 게 아니었다. 1930년대엔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판이 나왔다. 1945년 4월30일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히틀러가 권총 자살한지 80년이 다 되가는 이즈음도 해마다 영어판만 10만 부쯤 팔린다. '반유대주의 독설을 펴는 불온서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들의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유럽 제도 정치권에서 극우 세력이 커지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독일에서는 1945년 패전 뒤 출판이 금지됐다가 2016년 뮌헨 현대사연구소에서 비판적 주석들을 많이 덧붙인 개정판을 펴냈다. 유대인들은 못 마땅해 했지만 출판 첫해에 8만5,000부가 팔렸고, 그 뒤로도 중쇄를 거듭하고 있다).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돌프 히틀러(앞줄 맨 왼쪽). 전선 참호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 책들을 읽었다고 알려진다. ⓒ위키미디어

'문명 국가'와 '전범 국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들 자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지니고 있지만, 독일 사람들의 자부심은 만만치 않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와 게오르크 헤겔(1770-1831), 문학가 요한 괴테(1749-1832), 음악가 루드비히 베토벤(1770-1827) 등 그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인물들을 낳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다. 누군가가 "독일인들은 '문명 민족'의 반열에 올라와 있다"고 주장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전쟁범죄'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얘기가 달라진다. 20세기 전반기 나치 독일은 이른바 '전범(戰犯)국가'다. 유대인 600만, 소련군 포로 300만 등 많은 이들의 생목숨이 독일이 벌인 전쟁으로 희생됐다(독일쪽 사망자는 570만). 특히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비난을 받는다. 베토벤과 괴테를 낳은 '문명민족'이 어떻게 그 많은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죽였을까. 또한 어떻게 아돌프 히틀러라는 괴물을 지지하고 그가 벌인 죽음의 굿판(전쟁) 속으로 함께 발을 내디뎠을까. 저항다운 저항은 왜 없었을까.

1939년 9월1일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기 전부터도 나치 정권은 여러 법적 조치와 비합법 폭력으로 유대인들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남의 일처럼 여겼고 못 본 체 했다. 여기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나치 연구자들은 말한다. △독일 사회에 오랫동안 이어져 온 반유대 정서,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그에 따라 맺어진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대한 독일인들의 불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경제난을 극복하고 베르사유 강화조약의 족쇄를 깬 나치 정권의 지지율 상승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교본으로 삼아 히틀러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1897-1945)가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세뇌작업도 큰 몫을 했다. 지난 전쟁에서 상처받았던 독일인의 자존감과 무너진 경제를 나치 정권이 되살려주었기에, 히틀러의 반유대 정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독일의 오랜 반유대정서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지난 글에서 유럽의 유대인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법적 평등을 처음으로 찾았다고 했다(연재 76 참조).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럽이 다시 구체제로 넘어가면서 유대인 해방이 제대로 이뤄지진 못했다. 유대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회심리적 게토'는 그대로였다.

독일의 경우 1812년 유대인은 법률적으로 프로이센 국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곧 이어 여러 새로운 법적 제한 조치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상태는 1869년 북독일동맹의 제국의회가 유대인에 대한 모든 제한을 없앨 때까지 이어졌다. 1871년 통일 독일제국은 유대인에게 법률적 차별이 없음을 확인해주었다. 그럼에도 오랜 사회적 차별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독일의 반유대주의 연구자로 잘 알려진 볼프강 벤츠(베를린공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의 글을 보자.

[빌헬름 시대의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 하더라도 고급 장교, 대학 교수, 고위 관료,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유대인에게 교수직을 만들어주기 위해 유대인의 자금으로 (1914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볼프강 벤츠,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푸른역사, 2005, 90-91쪽).

벤츠를 비롯한 히틀러 연구자들은 "독일인들의 반유대주의가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말한다. 반유대 정서는 프러시아 군대가 1871년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뒤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1세를 앞세워 독일제국(제3제국을 세운 히틀러의 셈법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제2제국)을 선포하기 훨씬 전부터 독일인들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20세기 홀로코스트가 그냥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독일에서 프랑스군과 유대인을 몰아내고 독일민족주의와 통일국가를 부르짖었던 요한 피히테. 사후 101년 뒤인 1915년 그가 총장을 지냈던 베를린대학 구내 벽화로 그려졌다. ⓒArthur Kampf

피히테, "프랑스인과 유대인 몰아내야"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무렵 독일은 신성로마제국(962-1806)의 큰 울타리 안에 통일국가가 아닌 300개에 가까운 고만고만한 정치연합체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그나마 큰 나라였다. 1806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도망치는 프러시아 군보다 더 빨리 진군을 해 베를린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됐다. 독일인들로선 엄청난 굴욕이었다.

독일 민족주의를 말할 때 맨 먼저 얘기되는 사람이 철학자 요한 피히테(1762-1814)다. 그의 강연 모음집 <독일 국민에게 고함>(초판 1808)은 제목만큼은 널리 알려진 책이다. 여기엔 패배감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열변이 담겼다. 피히테의 강연은 그가 45세 때였던 1807년 12월부터 1808년 4월까지 일요일마다 14회에 걸쳐 베를린학사원 강당에서 이뤄졌다. 주변을 프랑스 점령군 병사들이 에워싸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지켜보는 가운데 피히테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옛 로마인에 저항해서 그들을 정복하였다. 우리는 새로운 로마인(프랑스인)에게 유린됐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무기를 가지고 그들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정신을 그들보다 훨씬 높고 의연하게 세울 일이다](요한 피히테, 독일 국민에게 고함, 동서문화사, 2009, 574쪽).

피히테는 독일 민족이 '인류의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라 주장했다(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선민'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피히테는 독일 민족에게 널리 퍼져 있는 패배감과 이기심을 꼬집으면서 '새로운 국민교육'으로 분열을 딛고 통일국가를 이루자고 했다. 이렇듯 독일민족주의를 강조한 피히테는 다른 자리에서 프랑스 점령군뿐 아니라 유대인도 독일 사회에서 몰아내야 할 적대적 집단으로 꼽았다.

"유대인들은 항상 다른 모든 국가를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하고 있는, 강력하고도 적대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 나는 유대인들에게 시민의 권리를 갖게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 만약 하룻밤 사이에 모든 유대인의 머리를 잘라낸 다음 유대인적 사고가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머리를 갖다 붙인다면, 그들에게도 시민의 권리를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Jehuda Reinharz, Paul Mendes-Flohr ed., The Jew in the Modern World: A Documentary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309쪽).

피히테는 독일이 통일을 이룬다면 '마치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찬연하게 유럽의 중심'을 이룰 것이라 했다. 그의 눈에 비친 유대인은 독일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다. 젊은 날의 히틀러는 피히테의 민족주의론과 반유대주의론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고 알려진다.

히틀러가 푹 빠졌던 바그너

피히테 못지않게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친 반유대주의자가 있다. '나치 음악가'로 알려진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다. 히틀러가 바그너에 푹 빠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12살 때에 바그너의 오페라 <빌헬름 텔>과 <로엔그린>을 본 뒤부터 바그너에 푹 빠졌다고 밝혔다. 히틀러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단번에 매료되었다. 바그너에 대한 감격은 그칠 줄 몰랐다. 몇 번이고 나는 그의 작품에 사로잡혔다"(아돌프 히틀러, 145쪽).

20대의 히틀러는 그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만큼은 꼭 보러 다녔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바그너의 최고 걸작으로 꼽았다. 히틀러는 왜 그토록 바그너에 열광했을까. 영국의 히틀러 연구자 이본 셰라트(옥스포드 뉴칼리지대, 철학)의 글을 보자(원서명은 Hitler's Philosophers, 2013).

[히틀러는<나의 투쟁>에서 바그너를 국가사회주의(나치)의 지적 선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았다. 단순히 그의 음악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와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나머지 "나치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바그너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이본 셰라트, <히틀러의 철학자들>, 여름언덕, 2014, 61쪽).

1850년 바그너는 가명으로 <음악에 나타난 유대인의 특성>이란 소책자를 냈다. 이 책에서 바그너는 그 자신을 가리켜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유대인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을 알리는 확성기'라 했다. 히틀러 연구자 라파엘 젤리히만(뮌헨대, 현대사)의 글을 보자(원서명은 Hitler, Die Deutschen und ihr Führer. 2008).

[(바그너는) "유대의 예술이란 것 앞에서는 저절로 역겨움이 치솟고 유대인의 성격에 잘 들어맞는 유대의 언어는 우리에게 혐오감을 안겨준다"고 썼다. 또한 유대인의 찬송가 역시 '추악한 얼굴'이라며 극단적으로 비하했다. 바그너의 일생을 요약하면, 독일민족, 특히 독일 음악가들을 향한 '유대화'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라파엘 젤리히만,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생각의나무, 2008, 41쪽).

바그너에 따르면, 독일민족이 그의 이런 경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구더기에 파먹히는 시체'와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리라 했다. 이런 섬뜩한 주장을 담은<음악에 나타난 유대인의 특성>은 1914년까지 무려 100만 부가 팔렸다. 그만큼 많은 독일인들이 바그너의 주장에 관심을 가졌고, 많은 경우 (20대 시절의 히틀러를 포함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나타냈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프리드리히 니체. 히틀러는 이 두 철학자의 책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필요한 부분을 뽑아내 자신의 정치 논리를 가다듬었다. ⓒ위키미디어

히틀러에게 악용된 철학자 쇼펜하우어, 니체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가 책을 많이 읽은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의 독서 목록 앞부분에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가 들어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서부전선(프랑스, 벨기에) 참호에서 쇼펜하우어 책을 자주 봤다고 알려진다. 훗날 그는 사람들에게 자랑 삼아 으스대며 "나는 전쟁 내내 쇼펜하우어 책을 가지고 다녔다. 쇼펜하우어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히틀러 연구자들은 독가스전이 펼쳐졌던 살벌한 전쟁터에서 쇼펜하우어 책을 읽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했을까 고개를 갸우뚱한다. 전선에서의 열악한 환경을 떠올리면, 쇼펜하우어든 누구든 제대로 독서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서부전선의 음습한 참호 안에서 쇼펜하우어를 읽는 히틀러의 모습은 왠지 어설퍼 보인다. 히틀러의 최종 학력은 실업학교(한국으로 치면 실업계 고등학교) 중퇴다. 누구든 그의 학력을 갖고 인물됨을 말하는 것은 아주 옳지 않은 접근방식이다. 그렇기에 학력을 떠나 말하자면, 히틀러에겐 안 된 얘기지만, 철학 전공자들도 어려워하는 쇼펜하우어의 깊은 생각을 그가 제대로 짚었을 것 같진 않다.

히틀러가 참호 속에서 봤다는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만 해도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대학 학부에서 철학과를 다녔던 필자도 읽기 어려워 책을 덮곤 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우주의 맹목적 의지에 휘둘린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좌절한다고 했다. 아마도 히틀러는 복잡한 논리를 떠나 이런 쇼펜하우어의 비관론적 해석에 이끌리면서 그 스스로 세계정복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특히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쇼펜하우어가 유대인을 비난하는 대목에도 눈길이 갔을 것이다.

[다른 국민과 다른 국가들 몸속에 사는 기생충으로서 유대인 생활에는 확실히 어떤 특성이 있다. 그것이 일찍이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유대인을 '거짓말의 명수'라고 말하게 했다. 유대인은 생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며 또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 북유럽인이 따뜻한 옷차림을 강요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돌프 히틀러, 437쪽).

히틀러 연구자들은 히틀러의 독서법을 가리켜, 그의 입맛에 맞는 구절들만을 빼내 (그 자신의 방식으로 멋대로 재해석한 뒤) 기억의 창고에 쌓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썼다고 본다. 이런 일도 쉽지는 않겠지만, 암기력만큼은 뛰어난 편인 히틀러는 의도적으로 그 노력을 기울여 연설에 활용하곤 했다. 문제는 많은 경우 그런 인용이 영악스런 '히틀러 식'이어서 올바른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위 인용문에서 쇼펜하우어가 유대인을 가리켜 '거짓말의 명수'라고 했다는 것도 한 보기다. 쇼펜하우어는 유대인을 싸잡아 비난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율법과 유대교의 교리를 비판했다. 쇼펜하우어의 요점은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들의 거짓말에 유대인들이 속고 있다'는 뜻이었다. 히틀러가 주장한 맥락과는 다른 얘기다.

니체의 초인(超人)을 닮고자 한 히틀러

히틀러의 여러 글이나 연설에서 쇼펜하우어보다 더 자주 들먹인 독일 철학자를 꼽자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다. 히틀러는 니체를 매우 좋아했다. 파시즘 동업자이자 6년 연상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에게 니체 전집을 선물로 주면서 "나는 이 전집의 주요 내용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니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히틀러에게 필요한 용어를 니체가 썼으니 좋아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초인(超人, Übermensch)과 같은 용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초판 1885)에서 니체는 예언자(선지자) 차라투스트라를 내세워 인간계가 아닌 저 세상에서나 있을법한 초월적 존재가 아닌, 현실에서 바라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 말한다. 니체를 읽으면서 히틀러는 초인의 이미지에다 그 자신을 투영시키는 야무진 꿈을 꾸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니체를 좋아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니체의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절반만 맞고 나머지 절반은 틀렸다. 니체 연구자들에 따르면, 유대인에 대한 니체의 태도는 오락가락 했다. 생애 전반기의 니체는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보고 혐오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훗날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들에게도 반감을 드러냈다. 정신이상 증세가 보이기 직전인 1889년 니체는 "나는 반유대주의자들을 모두 쏴죽이겠다"고 외쳤다(이본 셰라트, 87쪽).

니체 연구자 최순영(대구대학교)의 글에 따르면, 니체 철학은 나치의 선전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었다. 그의 책<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금발 야수'라는 개념은 히틀러의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권력의지, Der Wille zur Macht)는 독일 민족의 생활권(Lebensraum) 확장을 내걸며 벌인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였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유대인 작가 쿠르트 투홀스키는 니체를 여자(Fräulein)로 견준 글에서 니체 철학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악용한 히틀러와 나치 집단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정치적 적대자의 머리를 전화번호부 책으로 내리친 뒤, 히틀러의 지식인으로 받아들여진 나치스의 일부 문맹자들은 오늘날 '자신들을 위한 니체'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를 요구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내게 말해 보라.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맞는 니체를 인용할 것이다"(최순영, '니체와 19세기 독일 반유대주의',<동서철학연구>제100호, 2021 논문에서 재인용).

▲ 1940년 6월 독일 뮌헨에서 만난 히틀러와 무솔리니.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니체 전집을 선물하면서 "나는 니체를 다 읽었다"고 자랑했다. ⓒ위키미디어

반유대주의 슬로건, "유대인은 나의 불행"

지난 2015년에 타계한 로버트 위스트리치(히브리대, 근대유럽사)는 근대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역사 연구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이스라엘 학자였다. 앞서 살펴본 히틀러 연구자들(볼프강 벤츠, 라파엘 젤리히만)과 마찬가지로, 위스트리치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와 그에 따른 홀로코스트가 20세기 전반기의 어느 시점의 독일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유럽과 독일의 반유대 정서를 밑거름으로 자라난 폭력적인 정치현상이라 했다.

이를테면, 19세기 말 프랑스를 양극화시켰던 유대인 포병대위 드레퓌스 사건과 그에 따른 대규모 폭력사태는 '나치 방식의 반유대주의를 등장시킬 대중정치의 최종 예행연습과도 같았다'고 진단한다(로버트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46쪽).

"드레퓌스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라고 외침이 터져나왔던 19세기 말 프랑스처럼 독일 반유대주의자들의 독설도 만만치 않았다. 위스트리치에 따르면, 독일에서 '반유대주의'라는 용어가 뿌리내린 것은 1879년 극단적 성향의 언론인 빌헬름 마르가 '전통적인 형태의 기독교적 유대인 혐오증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면서부터였다.

[마르는 독일 사회가 이미 '유대교화(化)'(사실은 물질만능주의, 물욕주의, 그리고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승리함을 뜻하는 용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언론과 주식거래를 장악함으로써 독일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암담하게 전했다](로버트 위스트리치, 46쪽).

개신교 궁정 목사로 유명한 연설가였던 아돌프 슈퇴커도 마르와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주장을 폈다. 그들뿐 아니다. 보수 성향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국회의원)이었던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1834-1896)는 "유대인은 나의 불행"이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반유대 논리는 '예비 나치'들의 길잡이

니체의 책들을 펴낸 출판업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테오도르 프리치(1852-1933)는 극단적 성향을 지닌 반유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에 숨을 거둔 그는 문제의 서적 <유대인문제 입문서>(초판 1893)의 저자다. 이 책은 '반유대주의자들을 위한 십계명'을 담은 일종의 문답서로, 많은 독자들의 인기를 누렸다. 프리치는 입문서에서 독일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독일인들은 그들 주변을 맴도는 유대인이라는 독약이 자신과 가족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부패시키지 않도록 그들과는 사회적 접촉을 피하고 성적 접촉이나, 사업상 또는 직업상 관계를 갖지 말아야 하며, 유대인들의 글을 읽어서는 안 된다] (로버트 위스트리치, 48쪽).

프리치의 입문서는 1944년까지 33만부가 팔렸고 49판을 찍었을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20대의 젊은 히틀러도 당연히 읽었다. 수많은 '예비 나치'들의 마음에 반유대 논리를 불어넣은 것에 대한 보상이랄까, 나치 정권은 그를 '국가 원로'로 받들었다.

위스트리치의 분석에 따르면,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 반유대 정서를 이끌었던 슈퇴커나 트라이치케, 프리치 같은 유대인 혐오자들이 곧바로 히틀러와 같은 '유대인 말살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대인을 겨냥한 그들의 세찬 비난은 '예비 나치'들을 키우면서 앞으로 다가올 홀로코스트의 길을 닦았다. 다음 글에선 히틀러가 어떻게 독일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는가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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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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