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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시오니즘은 세계지배 음모, 유대국가 건설로 안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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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시오니즘은 세계지배 음모, 유대국가 건설로 안 그친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80]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⑧

[국왕 폐하(영국) 정부를 대표하여, 유대인 시오니스트(Jewish Zionist)의 열망이 담긴 지지 선언문을 내각에 제출하여 승인받았다는 것을 당신에게 전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국왕폐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가(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건설을 찬성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non-Jewish communities)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1917년 11월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1848-1930, 1902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 총리)는 유대인 금융자본가 월터 로스차일드 2세(영국 제2대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훗날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 알려진 정치적 보증서를 편지 형식으로 보냈다. 위에 옮긴 글은 런던 대영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편지의 앞부분이다. 대영제국과 유대인 자본의 유착은 팔레스타인 원주민인 아랍인들은 물론 20세기 중동지역에게 대재앙으로 다가섰고, 21세기에도 어두운 긴 그림자를 끌고 있다.

밸푸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 찬성"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유럽으로 파병(1917년 4월)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국은 독일의 공세에 밀려 고전했다. 무엇보다 전쟁비용이 딸렸다. 위기의 영국정부는 유대인 금융자본과의 유착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로이드 조지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맡았던 아서 밸푸어와 유대인 금융자본가 로스차일드 사이에선, △다량의 전쟁채권(war bond)을 로스차일드가 매입하고, △영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와 유대국가 설립을 도와준다는 합의를 봤다.

이런 합의가 있기까지 유대인 시오니즘 지도자 하임 바이츠만(훗날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은 로스차일드와 머리를 맞대고 요구조건을 논의했다. 영국 역사저술가 폴 존슨의 책(A History of the Jews. 1967)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로스차일드는 바이츠만에게 조언을 받아 1917년 7월18일에 중요한 세 가지 원칙을 포함하는 영국의 약속 초안을 밸푸어에게 전달했다. 첫째는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국가의 영토로 재편한다는 원칙이고, 둘째는 무제한의 유대인 이민을 보장한다는 원칙이고, 셋째는 유대인의 자치를 지원한다는 원칙이었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724쪽).

위 세 가지 원칙은 하임 바이츠만을 비롯한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팔레스타인 지역에 독립국가 수립)을 이루기 위해 당시 가장 강력한 패권국가였던 대영제국에게 내민 요청 사항이었다. 밸푸어 외무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는 사실상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정치적 응답이었다.

▲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 유대인 금융자본가 로스차일드에게 영국이 유대국가 건설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1917년 11월2일).

바이츠만, "내가 원했던 아이 아니다"

논란이 따른 사항 하나. 이 편지 뒷부분에 유대인 이주로 말미암아 비유대인(아랍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침해 받는 불이익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 담긴 글이 따라붙어 있었다. 유대인의 이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 현지의 아랍인들이 입을 피해가 없을 것이란 얘기였다. 하지만 아랍인들이 보기엔, 이 뒷부분은 그야말로 정치적 수사나 다름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밸푸어선언의 무게중심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가의 건설에 (대영제국이) 찬성한다'는 앞부분에 있었다. 그럼에도 시오니스트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밸푸어 외무를 보좌하던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사이크스-피코 밀약의 당사자)가 하임 바이츠만에게 밸푸어선언의 내용을 전해주면서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뒷부분 내용을 살펴본 바이츠만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내가 원했던 아이가 아닙니다"(폴 존슨, 725쪽).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신사의 나라' 대영제국은 중동에서 이중삼중의 줄타기를 했다. 1915년 10월 아랍 부족의 전사들이 게릴라전으로 영국을 도와주면 독립(맥마흔-후세인 협정)을 도와주겠다고 해놓곤, 바로 7개월 뒤(1916년 5월) 프랑스와 중동 지역을 나눠 갖기로 하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1917년 11월) 밸푸어 선언으로 영국의 줄타기는 (아랍인들이 보기엔) 배신의 정점을 이뤘다. 제1차 세계대전 뒤 맥마흔-후세인 협정은 휴지가 됐지만, 사이크스-피코 밀약대로 영토 분할이 이뤄졌고, 유대인들에게 한 팔레스타인 이주 약속도 지켜졌다.

지중해에 울려퍼진 '하티크바'(Hatikvah, 희망) 노래

선언이 나온 5주 뒤인 1917년 12월11일, 에드먼드 앨런비 장군이 이끈 영국군 제20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영국군-터키군 합쳐 4만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그 뒤로 영국은 꼭 30년 동안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렸다. 국제연맹 결의에 따라 1920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됐고, 유럽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크게 늘어났다.

유대인들은 지중해를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배 갑판에 모여 별과 작대기가 그려진 유대 깃발을 흔들면서 '하티크바'(Hatikvah, 희망) 노래를 신명나게 불렀다. 하티크바는 1897년 테오도르 헤르츨이 앞장 서 조직했던 제1회 국제 시오니스트 회의 때 처음 불렸던 노래로 지금 이스라엘 국가다(작곡자는 사무엘 코엔). 가사 내용은 '유대인의 영혼이 저 멀리 동방의 끝 시온(Zion) 쪽을 바라보는 한,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면서 '우리의 땅에 속박 없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희망을 담았다.

유대인의 이런 희망은 2000년 동안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살던 원주민(아랍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우리의 땅'은 유대인 연구자들의 억지 주장처럼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이 아니었다. 하티크바를 떼창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배에 탄 다른 아랍인들은 앞날이 불길하다는 생각을 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21세기 지금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전쟁범죄가 잘 말해준다.

갈등은 곧 시작됐다. 아랍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에 '유대 국가'를 세우겠다는 시오니즘과 대영제국의 유착은 필연적으로 현지 아랍인들의 반발을 불렀다. 그 무렵 막 문을 연 팔레스타인 아랍 언론사들은 "이른바 밸푸어 선언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라면서 사람들에게 문제점을 알렸다. 아랍인 독자들은 놀라움과 더불어 충격을 받았다.

영국과 미국의 외교 관련 연구소에서 일한 경력을 지닌 정치분석가이자 이스라엘 저널리스트인 오렌 케슬러는 밸푸어선언 뒤 이주 봇물을 이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유대인 사이의 긴장을 다룬 신간(Palestine 1936: The Great Revolt and the Roots of the Middle East Conflict. 2023)을 냈다. 케슬러에 따르면, 밸푸어 선언 1년째 되던 날 예루살렘 시장 무사 후세이니는 아랍 유지 100명을 대표해 영국 군정청에 이런 항의 서한을 보냈다.

[우리 아랍인들은 무슬림과 기독교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타국에서 박해받는 유대인의 고난을 언제나 깊이 동정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정심과 그 민족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오렌 케슬러, 『팔레스타인 1936』, 위즈덤하우스, 2024, 34-35쪽).

▲ 유대인의 이주를 돕는 대영제국의 정책에 맞서 1936년 무장 봉기했던 아랍 게릴라들. ⓒ위키미디어

"우리 유대인은 소금이 아니라 빵이 되련다"

예루살렘 시장의 항의 편지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댐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17년 말 영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까지 예루살렘 시장은 그 지역 일대를 지배하던 오스만 터키의 술탄이 임명하던 자리였다. 1906년 예루살렘 시장에 오른 파이달라 알라미는 독일 베를린에서 온 유대인 시오니즘 운동가를 한 사람을 방문객으로 맞이했다. 둘 사이에 오간 대화는 앞날에 대충돌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예루살렘 시장: 우리가 유대인 이주에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고 있죠. 유대인은 주변에 활기를 불어넣은 힘을 지녔으니까요. 문제는 숫자입니다. 유대인은 빵에 들어가는 소금과 같아요. 소량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넣느니만 못하다는 거죠

△유대인 방문객: "틀렸어요. 저희는 소금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빵이 되려는 거지요." (오렌 케슬러, 27쪽).

이 독일 시오니스트가 예루살렘 시장의 면전에서 과연 이렇게 도발적인 발언을 했을까 의심스럽긴 하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생각하던 유럽의 유대인들이 제일 조심스러웠던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현지 토착 아랍인들의 적대적인 태도였다. 지중해변에 배를 내리는 순간 돌팔매질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곤 했다. 그런데 예루살렘 시장에게 눈치 없이 강경발언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스라엘 작가 케슬러에겐 민망스런 얘기지만, 아랍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했다는 '유대인 이주 신화'(다시 말해서, 지어낸 얘기)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케슬러의 책 제목에 들어간 숫자 '1936'은 아랍인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던 1936년을 가리킨다. 날로 늘어나는 유대인 이민자와 (아랍인 부재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인 뒤 그때껏 그 토지를 경작하던) 아랍인 소작농들을 쫓아내 도시 주변부의 저임금 일용직 빈민을 만들어내는 행태에 맞선 몸부림이었다. 그 밑바닥에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국가가 들어설 것이란 위기감이 깔려 있었다.

1939년까지 3년 동안 이어졌던 아랍인들의 봉기는 10만 병력을 투입한 영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났다. 무장 봉기를 이끌었던 아랍 지도자 100여 명이 약식재판을 거쳐 처형됐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저항조직 하마스(Hamas)의 군사부분은 '이즈 앗딘 알카삼' 여단이라 불린다. 1936년 봉기를 촉발시킨 아랍 무장단체 '검은 손' 지도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유대인 이주 물결과 나크바(Nakba, 대재앙)

제1차 세계대전 뒤, 특히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유대인 이주민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팔레스타인의 인구지도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그곳 아랍인들에게 재앙이 될 먹구름이 중동 하늘을 뒤덮었다. 1917년 밸푸어선언 무렵 팔레스타인 총인구는 60만쯤이었고, 그 가운데 유대인은 8만 5,000~10만 명 사이였다(폴 존슨, 726쪽).

팔레스타인 아랍인-유대인 인구통계는 늘 논란거리다. 이 글 아래에서 다시 살펴볼 (유대인이지만 시오니즘에 매우 비판적인 연구자인) 노먼 핀켈슈타인(전 드폴대, 정치학)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팔레스타인에는 아랍 원주민 70~80만 명, 유대인 5~6만 명이 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뉴욕 컬럼비아대 교수를 지낸 라시드 할리디는 1917년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 인구 구성비가 아랍인 94%, 유대인 6%였다고 본다(라시드 할리디,『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열린책들, 2021, 47쪽 참조).

제1차 세계대전 뒤인 1919년부터 1925년 사이에 7만 명쯤의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1927년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숫자는 모두 15만 명쯤으로, 10년 전보다 머릿수가 크게 불어났다. 나치 독일의 박해로 유대인 난민이 늘어나면서 1940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45만 명에 이르렀다. 1948년 중동 한복판에 이스라엘 국가가 들어설 무렵 인구는 유대인 60만, 팔레스타인 아랍원주민 130만 명으로, 인구 구성비에서 유대인은 더 이상 토착 아랍인의 눈치를 살피는 소수자가 아니었다.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건국 선포 뒤 벌어진 제1차 중동전쟁으로 지옥문이 열렸다. 팔레스타인 대량난민이 생겨났다. UN 통계로는 130만 아랍인 가운데 75만(팔레스타인 통계로는 91만, 이스라엘 통계로는 52만)이 집을 잃은 난민이 됐다. 유대인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가 끝나고 팔레스타인 아랍인 디아스포라의 고난이 시작됐다.

아랍인들은 그때의 고난을 '나크바'(Nakba, 대재앙)라 일컫는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이스라엘 쪽은 마라톤대회니 음악연주회니 하며 건국절 기념행사로 들뜬 모습이지만, 팔레스타인 쪽은 초상집 분위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게와 학교의 문을 닫는다. 어떤 이들은 상복을 입고 하루 종일 슬피 운다. 1948년의 나크바 뒤로 팔레스타인의 고난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억압통치와 인권침해, 이에 맞선 저항으로 중동 정치기상도는 늘 먹구름이다.

▲1948년 이스라엘 무장대원의 위협에 밀려 피란길을 떠나는 하이파 항구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 ⓒ위키미디어

헤르츨, "유대인 이주는 사회적 긴장 완화에 도움"

오스트리아 신문기자 테오도르 헤츠츨은 (유대인 금융자본가 로스차일드와 손잡고 '밸푸어 선언'을 이끌어냈던) 하임 바이츠만 이전에 유럽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헤르츨은 유대인 이주와 관련해 어떤 주장을 폈을까. 프랑스의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무기형 판결을 받고 프랑스령 기아나 '악마의 섬'에 갇혀 만 1년을 지날 무렵인 1896년 2월, 헤르츨은『유대 국가』(Der Judenstaat)라는 70쪽 분량의 소책자를 써냈다.

유대인 이주가 지닌 긍정적인 (헤르츨의 표현에 따르면 '이로운') 측면들을 책에서 늘어놓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 대량이주는 유럽 국가들의 수출무역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유럽의 공산품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독자적인 공장을 세우지 않는 한 유럽으로부터 그런 물품들을 사들여야 한다. 헤르츨은 나아가 '사회적 긴장완화'를 가장 큰 이점으로 꼽았다.

[가장 커다란 이점들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에 이어지는 사회적 긴장의 완화일 것이다. 사회적 불만은 어쩌면 유대인 이주가 이루어질 20년이나 그보다 오래 지속될 시간을 거쳐진정될 수 있겠지만, 어느 경우에도 유대인 이주의 시기 전체를 관통하여 지속될 것이다](헤르츨, 『유대국가』, 도서출판b, 2012, 127쪽).

헤르츨의 이런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유럽의 백인들이 늘 혐오감을 지니고 못 마땅하게 바라보던 유대인들이 어디론가로 떠난다면 그들과의 사회적 긴장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이 새로 옮겨간 곳이 (일부 유대인 연구자들이 주장하듯)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무인지대)'이 아닌 바에야 그곳 원주민들과의 새로운 긴장 관계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는 지금껏 이어져온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그러하다. 헤르츨은 이 새로운 긴장 관계를 내다보지 못했을까.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그나마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편이었던 헤르츨은 팔레스타인이 빈 땅이라고 우기진 않았다.

"유목민족밖에 없던 무인지대였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이었다"는 헛된 주장을 담은 책이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CBS 방송 프로듀서 출신의 유대인 작가 조안 피터스가 쓴 『태곳적부터』(From the Immemorial. 1984)이란 책이다.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아랍-유대인 갈등의 기원'이란 부제목을 단 이 책은 "유대인이 이주해올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유목민족밖에 없던 무인지대였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오기 시작할 무렵 그 지역은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베두인족 말고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빈 땅'이었다는 것이다.

피터스가 펴는 주장의 핵심은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 지역경제가 활성화되자, 20~30년 전에 새로 들어온 '이주민'이었고, (아랍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48년 이스라엘이 독일국가를 세울 때 유대인들에게 토착 아랍인들이 쫓겨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피터스의 책은 유대인 단체들이 대량으로 사들여 마구 뿌려댄 덕에 '베스트셀러'에도 올랐다. 9.11테러 무렵인 2001년 국제정치학을 늦깎이로 공부를 하느라 뉴욕에 머물 때 맨해튼 중고책방에서 새 책이나 다름없는 양장본을 1달러 주고 샀다).

이스라엘의 국가 성립 정당성을 옹호한 피터스의 책은 유대인 압력단체들과 관련 미디어들의 응원 속에 출간 8개월 만에 7쇄를 찍었다. 책을 낸 다음 해에 피터스에겐 250건의 강연 일정이 잡혔다. 미 전역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드러났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팔레스타인 인구지도에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멋대로 왜곡 또는 표절한 이 책은 워낙 황당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에 곧 비판에 부딪혔다.

반유대주의자로 찍히면...

미국의 일부 연구자들이 "그 책은 엉터리"라며 비판에 나섰다. 시카고 드폴(DePaul)대학 조교수(정치학)였던 노먼 핀켈슈타인이 앞장서 피터스의 '빈 땅'론을 공격했다. 이른바 시오니즘 이론가나 운동가들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를 다룬 역저(Image and Reality of the Israel-Palestine Conflict. 1995)에서 30쪽 넘는 분량으로 피터스의 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한 마디로 '사기이자 허구'라 내쳤다.

[문제는 『태곳적부터』가 아랍-이스라엘 갈등에 관해 이제까지 출간된 연구 가운데 가장 거창한 사기라는 데 있다. 조야한 선동과 위조와 거짓으로 점철된 이 분야에서 웬만해서는 이런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피터스의 책은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짓을 충분히 했다. 책에서 저질러진 사기는 너무나 철저하고 체계적이다. 자료라고 제시한 증거들은 거의 전부가 거짓임이 드러났다. 게다가 피터스는 표절까지 하는 바람에 독자들을 더욱 헷갈리게 만든다](노먼 핀켈슈타인,『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이미지와 현실』, 돌베개, 2004, 91-92쪽).

핀켈슈타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1918년)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서 살던 아랍인 원주민들이 70~80만 명, 새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5~6만 명 살고 있었다. 이들 유대인 소수자들은 그곳에 오래전부터 소수자로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시오니즘 운동에 따라 19세기 말부터 옮겨와 (아랍인 부재지주로부터 토지를 구입해) 유대인 정착촌을 어렵사리 꾸려가던 사람들이었다.

핀켈슈타인은 '팔레스타인이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땅이었다'는 피터스의 주장을 담은 책을 가리켜 '뻔뻔스럽고 조잡한 희대의 사기작(作)'이라 했다. 핀켈슈타인은 이로 말미암아 미국 유대인 압력단체들의 표적이 됐고 끝내는 보복을 받았다. 2006년 드폴대 종신교수직(tenure) 임용 심사에서 탈락하고 대학을 떠나야 했다. 그 뒤로 핀켈슈타인은 미국에서 자리잡지 못했다. 2014년부터 1년 동안 터키 사카리아대 부설 중동연구소에 적을 두었을 뿐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와 마찬가지로 핀켈슈타인을 입국 금지자 명단에 올려놓았다. 미국 사회에서 어떤 사유로든 일단 '반유대주의자'로 찍히면, 정치인은 낙선운동의 표적이 되고 언론인이나 교수는 퇴출되고 연구비 지원이 끊기는 불이익이 따른다.)

▲ 아돌프 히틀러(1937년). 유대인을 '기생충'이라 비난한<나의 투쟁>(1025년 초판)

히틀러, "시오니즘은 유대국가 건설로 안 그친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로부터 600만 유대인을 죽였다고 비난을 받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시오니즘과 유대인 이주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나의 투쟁』(초판 1925)에서 히틀러는 유대인을 비판하고 궁극적으로는 절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데 많은 지면을 썼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시오니즘에 대해 말하면서 '유대인이 시오니즘으로 유럽인을 속이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들은(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스스로 거주할 목적으로 유대 국가를 건설하려는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주권을 가지고 다른 국가 개입을 받지 않는 그들의 국제적인 세계 기만조직의 센터, 곧 진짜 룸펜들의 은신처나 장차 사기꾼들 대학을 만들기를 바라고 있는 데 불과하다](아돌프 히틀러,『나의 투쟁』, 한길사, 2014, 458쪽).

여기서 '국제적인 세계 기만조직의 센터'란 말은 20세기 초 유럽의 반유대주의자들이 애독하던 괴문서였던 <시온 의정서>와 같은 맥락의 용어다. 이 괴문서는 제정 러시아의 비밀경찰조직 오크라나(Okhrana) 소속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한 요원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유대인들이 언론과 금융을 장악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거대한 청사진을 비밀회의록 형식을 빌려 그럴듯하게 담았다. 히틀러를 비롯한 반유대주의자들에겐 더할 수 없는 참고자료다.

히틀러 특유의 독설과 논리적 비약(다시 말하자면, 궤변)을 감안해서 그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면, 시온주의란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민족자결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국가 창설에 만족할 것'이라 생각하도록 만드는 속임수다. 히틀러가 보기에 유대인은 중동 지역에 국가를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렇기에 유대인은 시오니즘을 내걸어 "더할 나위 없이 교활하게 또 현명하게 어리석은 비(非)유대인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아돌프 히틀러, 458쪽).

여기서 히틀러는 인종주의를 내건다. 먼저 유럽 백인사회로 동화(同化)돼 살아가려는 일부 유대인들을 겨냥한다. 히틀러가 보기에 그런 유대인들은 독일인이나 프랑스인 또는 영국인으로 가장해서 이웃 사람들을 속이며 살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히틀러는 동화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공격한다. 그가 보기에, '뻔뻔스럽게도 공공연히 자기를 유대인종이라 표명하는' 유대인들의 이런 태도는 '자신감이 높아진 조짐일 뿐 아니라 (유럽 백인사회에서의) 안정감'을 나타낸다. 유대인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자신감과 안정감이다. 유대인의 승리라니? 히틀러에게는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로부터 뭘 배웠나?"

21세기 현실을 돌아보면, 히틀러가 그토록 걱정했던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다. "유대인 파워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파트너가 대영제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노먼 핀켈슈타인 같은 비판적인 유대인 연구자마저 '자기혐오에 빠진 유대인'(self-hating Jew)이라는 비난과 더불어 대학사회에서 쫓겨나 바깥으로 떠도는 상황이다.

이는 마치 일본 극우들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돌아보고 반성하자는 사람에게 "자학(自虐)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잘못을 비판하면 무조건 '반유대주의자'라 손가락질 받는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저질러지는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비판해도 "당신 반유대주의자냐?"는 반격이 돌아온다.

중동에 갈 때마다 듣는 물음이 있다. 1948년의 나크바(대재앙)처럼 역사의 기록에서 지우고 싶은 어둡고 우울한 기억들을 지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멀리 한국에서 온 나의 손을 꽉 잡고 묻는다. "유대인들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웠을 것 같으냐"고. 이 물음을 바탕에 깔고 다음 글부터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과 학살에 얽힌 여러 측면들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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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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