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격차사회와 각자도생이라는 말도 자주 들립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도 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남모르게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 공동체는 숨쉴 틈을 찾고 미래의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소용돌이가 되고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장애어린이 재활전문 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들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고사리손으로 저금통을 들고 온 아이, 절약한 생활비를 매달 기부하는 노부부, 병원 부지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지자체 공무원, 의미 있는 일을 위해 거액을 쾌척한 기업인까지 모두가 소중한 인연입니다. 푸르메재단이 최초로 장애인 스마트팜을 짓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모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지만 발달장애 청년의 좋은 일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모여 현실이 됐습니다.
푸르메재단이 지난 20년간 장애인 재활과 자립, 지역복지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장애인이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믿음을 함께한 수많은 시민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소중한 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의 글을 통해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안아주세요
"안녕하세요. 제 별명이 '박완서 동생'입니다. 조금 큰 앞니와 아래로 처진 눈매 때문에 선한 인상의 선생님과 제가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2005년 여름, 제가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께 보낸 첫 이메일 내용입니다.
그해 설립된 푸르메재단은 첫 번째 사업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따뜻한 책 출간을 계획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의 잔가지 몇 개를 부러뜨리고 지나가는 소슬바람이면 다행이지만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는 거대한 태풍이라면 큰일이지요. 따뜻한 봄날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몸살을 앓는 건 견딜 수 있겠지만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려온 자동차에 치여 한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왜 하필 나에게 왜 이런 불행이…' 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 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니 희망을 잃지 마라'고 누군가 등을 토닥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때 박완서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등단해 80살의 나이에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시는 노(老)소설가. 6․25전쟁의 참화(慘禍) 속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차례로 잃고, 이후 남편마저 암으로 여읜 지 불과 석 달 만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을 잃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하셨으니 불행에 대해 누구보다 확실한 대답을 주실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그때의 불행에 대해 "우린 남들이 부러워한 금슬 좋은 부부였고 나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존적이었다. 혼자서 살 자신도 없었다. 남편의 영정을 머리맡에 두고 "'여보 나 좀 데려가 줘요'하는 소리만 주문처럼 외고 살았다. 그런데 석 달 만에 남편이 데려간 것은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제발 꿈이어라. 방을 헤매며 온몸을 부딪치는 난동을 부려 보았지만 악몽은 깨어나지 않았다.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 달라는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고 썼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은 박완서 선생님이라면 땅바닥에 주저앉은 이에게 다가와 따뜻하게 안아주며 "우리에게 왜 이런 불행이 일어났을까"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런 불행이 일어날 수 있어요"하고 위로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웠던 순간, 하지만 너무 젊은 시절이어서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을 글로 담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젊은 시절
아들 같은 나이지만 '박완서 동생'이라는 말에 애틋한 마음이 드셨을까요? 선생님은 기꺼이 "글을 써주겠다"는 답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아흔 살의 당신 어머니가 임종을 맞을 때 고향 집에서 일하던 머슴 '호뱅이'를 찾으셨다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내용의 <엄마의 마지막 유머>를 보내주셨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마치 큰 누님처럼 뵐 때마다 당신의 고향 집 풍경, 어린 시절, 그리고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에게 평생의 화두(話頭)는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와 나는 피난 나갈 기회를 놓쳤어요.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낮에는 민주주의가 되고 밤에는 사회주의가 되는 세상을 경험했지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음식 한 조각 앞에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몰락해 가는지 목격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아픈 기억과 경험들이 박완서 선생님에게 이념의 덧없음을, 그리고 불행으로 인한 상처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끌어안고 사랑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선사했던 것일까요? 유년 시절, 장맛비로 마을 앞 냇물에 놓인 다리조차 떠내려가고 서울로 돌아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 머슴 호뱅이가 갑자기 나타나 당신을 지게에 떡하니 태우고 탁류를 헤쳐나갔던 아름다운 기억 같은 것 말입니다.
푸르메재단을 찾아 사인해 주시는 박완서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은 '박완서 동생'으로 인연을 맺게 된 푸르메재단을 몹시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살아오신 경험과 갑자기 막내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의 아픔이 장애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생각합니다.
매달 25일 되면 푸르메재단 통장에 '박완서'라는 이름이 꼬박꼬박 새겨졌습니다. 책을 새로 출간하시거나 연말이 되면 적지 않은 금액을 따로 보내셨습니다. 일 년에 두세 번씩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재단 사무실에 오셨고, 장애어린이 가족이 거제도로 소풍 가는 날에도 함께하셨습니다. 거제도 강당에서 마이크를 잡은 선생님은 왜 주부로 살다가 글을 쓰게 됐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들에게 "장애는 불편한 것이지만 우리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을 안아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얼마 전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박완서 선생님이 보내신 편지를 발견하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보내신 날짜가 2010년 8월 22일 저녁 6시 28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백경학 선생님께
즐거운 이메일 받고도 답신이 늦었네요. 올여름은 끝날 듯 끝날 듯 안 끝나는 참으로 지겨운 여름이었지요. 저는 5월 말경 집 계단에서 굴러서 왼쪽 발등에 금이 가서 6월 한 달 동안이나 깁스를 하고 지냈습니다. 깁스만 떼어내면 날아갈 듯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깁스 떼고 의사도 잘 붙었다고 하는데도 한동안은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지금 거의 다 나아 며칠 전에는 휴가도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아직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고 정신적인 후유증도 남아 있습니다. 계단만 보면 무서워서 전철 같은 건 탈 엄두를 못 냅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예쁜 집 사진도 잘 보았습니다. 마당이 딸린 주택에 가보고 싶군요. 이 더위가 완전히 가시고 저도 걷는 데 더 자신이 붙고 난 9월 중순이나, 아니면 추석 지나고 나서 날을 잡으면 어떨런지요. 그 무렵 우리 서로 다시 연락하도록 해요.
내일부터는 이 더위가 물러나리라는 예보가 나온 날
아치울 집에서 박완서"
박완서 선생님의 노란 집
당신은 어릴 때부터 정신을 딴 데 두고 걷다가 자주 넘어져 다쳤다고 합니다. 또래 꼬마들이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뛰어다니는 데 비해 어쩌면 당신에게 걷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작은 돌부리에도 곧잘 넘어진 것이 세상살이에 서툰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리를 다쳐서 우리 집 초대에 응하기 어렵다는 편지를 받고 가을이 깊어갈 무렵 선생님 댁을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전통 기와집에 사셨던 선생님은 딸들의 간곡한 권유로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갑갑해 견디지 못하셨다고요. 그래서 구리시 아차산 자락에 마당이 있는 아담한 목조주택을 지어 이사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아치울 마을에서 노란색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벨을 누르자 한참이 지나 선생님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나타나셨습니다. "아직 다리가 성치 않아 걷는 것이 힘들어요. 하지만 놀 수 없어서 소일삼아 잡초를 뽑고 있어요. 가을볕에 얼마나 잡초가 잘 자라는지 내년 봄이 걱정이에요. 일주일만 한눈팔아도 잡초밭이 되어버리네요. 정말 잡초의 생명력을 실감해요."
절뚝거리며 걷는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는 마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유리 통창이 놓여 있었습니다. 창가에는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는 양란 화분들이 가을 햇살을 받고 있었습니다. 빼꼼히 열린 서재에는 방바닥부터 천장에 닿을 정도로 책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듬해 봄 잡초가 기승을 부릴 무렵 다시 와서 마당의 잡초를 모두 뽑아드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댁을 떠나기 전 박완서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멀리 오셨으니 제가 책을 선물하고 싶어요. 제 책 중 무슨 책을 갖고 싶으세요?"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 중 저는 단연 첫 작품인 <나목(裸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누구나 벌거벗은 몸으로 6․25전쟁의 추위를 견뎌야 했던 '나목'이 단연 선생님을 대표하는 작품이니까요.
다섯 남매 중 막내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선생님은 6.25 한국전쟁 때를 기억하며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박수근 화백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봄을 기다리는 나목에 비유해 소설을 쓰셨습니다. <여성동아> 공모소설에 당선돼 불혹의 나이에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 작품입니다.
푸르메재단 직원들과 함께한 박완서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께서 친히 첫 작품에 사인까지 해주셨습니다. 귀한 선물을 받고 돌아와 잡초를 뽑으러 갈 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의 부음을 받게 됐습니다. 선생님 댁을 다녀온 지 불과 석 달만이었습니다. 2011년 1월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따님 네 분은 장례식을 마치자 어머니가 사랑했던 곳에서 소중하게 사용하길 바란다며 부의금을 모두 보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팔순의 연세에도 펜을 놓지 않으시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맥주잔에 소주를 콸콸 따라 드시던 선생님. 박완서 누님께 술 한 잔 따라드리며 지혜로운 말씀과 다정한 위로를 들을 날을 기다렸지만 그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사진이 푸르메재단 회의실에 걸려있습니다. 7월 초록의 햇살 아래 이지선 교수와 나란히 웃고 계십니다. 그 환한 웃음이 푸르메재단이 걷는 길을 오래도록 비춰주시리라 믿습니다.
*백경학 푸르메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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