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채상병 특검법'으로 불리는 '순직 해병 진상규명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법'이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국회는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채상병 특검법 재의 안건을 상정해 처리했다. 재석 294인에 찬성 179표, 반대 111표, 무효 4표였다. 찬성이 반대보다 많았지만, 헌법 53조 4항 '(대통령으로부터) 재의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국회는 재의에 부치고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전과 같은 의결을 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는 규정에 따라 재의안은 부결됐다.
이날 본회의에서 투표에 참여한 의원(출석 의원)이 294인이기 때문에, 196명 이상이 찬성해야 가결이 되는 상황이었다. 채상병 특검법은 지난 2일 야권 단독으로 본회의를 통과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1일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여야 '표 단속' 막판 총력전…"안 하면 직무유기" vs "가결되면 탄핵열차"
이날 앞서 여야는 재표결을 앞두고 총력전에 돌입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본회의에 입장하는 국민의힘 의원들을 향해 찬성 투표를 독려하는 피켓시위를 벌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본회의에 앞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젊은 군인의 억울한 죽음, 권력, 부당한 개입 등 진영을 초월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엄중한 책무"라며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패배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라며 국민의힘에 특검법 수용을 거듭 강조했다.
박찬대 원내대표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게 예측된다고 해서 국회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 아니겠느냐"며 "윤 대통령도 거부권 행사할 생각 말고 국회 통과한 법안을 즉각 공포하길 촉구한다"고 했다.
박주민 의원은 본회의 찬성토론에 나서 "채상병 특검법이 해병대원 죽음에 관련된 진실을 밝히는 데 관심이 없고, 대통령을 수사하기 위한 정치적 특검이라고 주장한다"며 "수사 대상 1번이 사망사건이다. 이 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것이 사실과 다르거나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당이 만든 공수처에서 수사를 진행 중인 것과 관련해 "공수처가 현재 의지를 가지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건 맞지만 매우 작은 조직이라 고발 후 첫 소환까지 8개월이 걸렸다"며 "특검이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진상규명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를 열고 채상병 특검법을 반대 당론으로 정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총 모두발언에서 "오늘 이 특검법이 가결되면 야당은 곧바로 탄핵열차에 시동을 걸 것"이라며 "의원 여러분 한 분 한 분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있을 것이고 또 그 고민 무게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집권여당으로서 법치주의에 입각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반대표결을 당부했다.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 또한 "개인의 뜻이 어떠시든 간에 우리 당이 어렵고, 대통령이 어렵고, 나라가 어렵다"며 "친구의 도리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되는가, 나라를 위하여 당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원님 한 분 한 분이 마지막 투표자리에서 꼭 생각하시고 마음을 정해 무거운 마음으로 투표에 임해달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유상범 의원, 임이자 의원을 본회의 반대 토론자로 내보내며 막판까지 재의결 반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반대·무효 115표=범여권 115명? '소신파' 5명은 어디로…
막상 표결 결과가 찬성 179표, 반대 111표, 무효 4표로 나온 데 대해서는 정치권에서 여러 해석이 나왔다. 국민의힘이 반대 당론을 이날 본회의 직전 의총에서 공식 추인했지만 '소신투표' 의사를 굽히지 않은 일부 찬성파 의원들의 표가 어디로 향했는지 오리무중이 된 셈이다.
앞서 안철수 의원은 이날 본회의 개회 직전 기자들과 만나 당론이 추인된 것과 관련 "자기의 어떤 결정에 따라서 책임은 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것"이라고 말해 소신투표를 예고한 바 있다. 안 의원은 이날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혁신과 재건의 첫걸음으로써 채상병 특검 수용을 충언한다"며 "오늘 채상병 특검법안에 소신대로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의힘 내 찬성파 김근태 의원 또한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당장에 손해처럼 보이는 일도 그것이 훗날 국민께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남는다면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소신투표를 시사했다.
만약 안 의원 등 찬성투표를 공언한 국민의힘 의원 5명(김웅·안철수·유의동·최재형·김근태)들이 당론을 따르지 않고 실제 찬성표를 던졌을 시엔 최종 반대표가 110표가 돼야 한다. 범여권 의석 분표가 국민의힘 113명, 자유통일당 황보승희 의원, 무소속 하영제 의원 등 총 115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결 결과는 이와 달랐다.
때문에 △찬성투표를 공언한 이들이 당론이 정해지자 차마 당론을 거스르지 못하고 '찬성' 대신 무효투표를 했거나 1명은 반대 당론을 수용했을 가능성 △이들 가운데 일부 또는 전부가 공언대로 찬성투표를 했고 오히려 민주당 등 야권 표 가운데 반란표가 나왔을 가능성 등이 투표 직후 정치권에서 회자됐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탈을 예고했던 찬성파 의원들의 표심에 대해 "비밀투표로 진행된 만큼 관련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제가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다만 우리 의원님들께서 함께 뜻을 해주셨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의총 과정에서 찬성파 의원들에게 찬성 대신 무효표를 던져달라 당부했는가' 묻는 질문에도 "구체적 투표 행위에 관해서까진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고만 답했다.
추 원내대표는 본회의 정회 중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 고(故) 채 상병 사건을 공수처와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신속하고 엄정하게 수사결과를 내 주시기를 기대한다"며 "우리 의원들께서 당론으로 정했던 이 사안에 대해서 어긋남이 없이 단일대오에 함께 해주셨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단일대오'라는 표현이 눈길을 끌었다.
野, 부결에 반발…이재명 "국민의 간절한 의지를 국민의힘이 꺾어"
민주당을 비롯한 야6당은(민주당·정의당·조국혁신당·진보당·새로운미래·사회민주당) 이날 본회의에서 특검법 재표결안이 부결된 직후 국회 로텐더홀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21대 국회의 사실상 마지막 본회의에서 채해병 특검법이 최종 부결 폐기되면서, 민주당은 오는 30일 22대 국회 개원 즉시 해당 특검법을 가장 먼저 재발의해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표결 직후 기자들과 만나 "국민의 간절한 의지를 국민의힘 의원들이 꺾어 버렸는데 참으로 옳지 않은 처신"이라며 "국민과 함께 반드시 채 해병 사망 사건의 진상 규명을 하고, 정부와 여당이 왜 이렇게 극렬하게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지에 대해서도 한 점 의혹 없도록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결국은 (정부·여당이)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이익인 그런 상황이라는 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편 민주당은 이날 국민의힘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전세사기 피해자를 '선(先)구제 후(後)회수' 방식으로 지원하는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야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재석 170명, 찬성 170명이었다.
민주당은 이와 함께 △민주유공자법 △가맹사업법 △양곡관리법 개정안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법 개정안 △한우산업을 위한 지원법 제정안 △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 등 7개 법안에 대해 본회의 부의의 건을 추가 심의하자는 의사일정 변경 동의 건을 제출해 야권 단독으로 가결했다.
민주당은 본회의에 직회부한 7개 법안 중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안, 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 지속가능한 한우산업을 위한 지원법 제정안,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등 4개 법안을 야당 단독으로 의결했다. 민주유공자법은 재석 161명 전원 찬성으로, 농어업회의소법과 세월호참사피해지원법은 재석 162명 전원 찬성으로, 한우산업법은 재석 160명 가운데 찬성 149명, 반대 1명, 기권 10명으로 각각 가결됐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채 상병 특검법 재표결에 참석한 이후 본회의에 불참했다.
다만 김진표 국회의장은 양곡관리법, 가맹사업법, 농수산물가격안정법 등 3개 법안에 대해서는 의결하지 않기로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나머지 3개 법안도 의결하자며 김 의장에 항의 의사를 표했지만, 김 의장은 3개 법안에 대해 "상임위 심사 과정에서 여야 및 정부와의 이견이 커서 의무 숙려기간을 규정하는 국회법 취지에 따라 본회의에서 처리하지 않겠다"며 "국회의장으로서 국회법 정신 지키는 게 최우선적 도리라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본회의 산회 직후 기자들을 만나 야당 주도로 단독 처리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국토교통부 장관이 즉각 대통령 거부권 행사 건의를 예고한 데 대해선 "일국의 장관이 국회 입법권을 이렇게까지 능멸해도 되는 것이냐"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반면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전세사기 특별법 일방 통과에 대해 "이 법은 여러가지 문제를 많이 안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일방적으로 처리가 될 경우 저희들은 당연히 이 법을 시행할 수가 없다"며 "(대통령에게) 재의요구 행사도 건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전날 27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매입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매 차익을 임대료 지원 형태로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돌려주겠다는 내용의 '전세사기 피해자 주거 안정 지원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현행 전세사기 특별법은 LH가 경매로 피해주택을 매입한 뒤 해당 주택을 시세의 30~50% 수준으로 피해자에게 임대하도록 돼 있는데, 경매 과정에서 나오는 차액을 재원으로 피해자에게 최대 10년간 이 임대료를 받지 않고 주택을 임대해주겠다는 것이 이번 정부안의 골자다.
민주당 측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의 '선(先)구제 후(後)회수' 방안에 반대해온 정부가 본회의에서의 개정안 처리를 하루 앞두고 새로운 정부안을 제안,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의 명분을 확보하려 한 것이라는 풀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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