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계절, 봄입니다. 제 사무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자리해 있습니다. 커다란 창으로 한강이 내다보이죠. 요즘 같은 계절엔 꽃들의 색이며 나무의 풍성함이 하루하루 달라지는 바람에 자꾸만 한눈을 팔게 됩니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살풍경한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란 꽤 고역스럽기까지 합니다.
전쟁 같았던 선거가 끝났습니다. 오늘 밤이면 여야의 운명이 갈립니다. 다들 사활을 걸고 덤볐던 만큼 승패가 드러난 여의도는 한동안 시끌벅적할 것 같습니다. 언론이며 선거 전문가들까지 가세해 결과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소란을 떨 겁니다. 유권자인 우리야 아무 일 없었던 듯 생업으로 돌아가면 되겠습니다만, 결과와 무관하게 무언가 찜찜한 저로서는 그간의 선거 과정을 차분히 돌아볼까 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가 내내 못마땅했습니다. 말들이 넘쳐났지만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 화가 나 있어서 더 분노하는 사람이 더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과거의 막말과 잘못들을 감추다가, 들춰지면 어쩔 수 없이 해명하는 뻔뻔한 태도들에 아연실색했습니다.
여야 없이 상대를 향해 저지르는 서슴없는 인격 살인에 아예 눈감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즐비했습니다. 차선(次善)도 사치였습니다. 덜 나쁜 쪽 고르기 시합 같은 이번 선거가 뭐라도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로서 참 난감했습니다. 이런 당혹감이 어디서 비롯된 걸까.
지난 대통령선거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로 불리며 우리를 참 피곤하게 했습니다. 0.73%포인트 차이의 결과마저 역대급이었습니다. 승자의 포용도, 패자의 승복도 없이 곧바로 무한대결의 정치가 펼쳐졌습니다. 야권은 국회 권력을 휘두르며 행정부 무력화를 시도했습니다. 집권에 성공한 윤석열 정부는 집요한 수사와 기소로 야당의 숨통을 조이는데 몰두했습니다. 우리 정치에는 오로지 응징과 복수의 의지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번 총선은 이런 대선의 연장전처럼 느껴집니다.
작년 12월,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정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윤석열 정부 견제론이 민심 저변에 깔려 있던 시기였습니다. 총선을 앞둔 국민의힘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릴 정도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조기 레임덕 방지를 위해 여대야소 국회가 절실한 여권은 구당(救黨)의 임무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지지층은 환호했죠. 젊음, 세련됨, 전투력을 두루 갖춘 보수진영의 새로운 리더로 그를 반겼습니다.
올해 2월, 더불어민주당이 비명횡사 등 공천을 둘러싸고 자중지란을 일으키자 그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공천은 지지자들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각종 여론조사 지표가 여론의 변화를 암시했습니다. 정권 심판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고, 국민의힘은 총선 승리를 기대하기에 이릅니다.
민주당의 집안싸움에 기댄 국민의힘의 부상(浮上)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공천을 끝낸 이재명 대표가 특유의 직진성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나서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한동훈 위원장은 급해졌고, 독해졌습니다. 쓰지 않겠다던 '여의도 사투리'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왔습니다. 야권을 '범죄자 집단'으로 규정하고 '응징에 나서자'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수세에 몰린 국면을 타개하기에는 현재까지 상황에서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애초 한동훈 위원장은 검찰 권력을 앞세운 윤석열 정권의 행동대장이었습니다. 정치권에서 경험을 쌓고 역량을 기를 새가 없었습니다. 상상력은 빈곤하고 담대함은 모자랐습니다. 정치 철학은 부재하고 범죄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검사로서의 소신만 가득했습니다. 그런 그가 집권당의 사령탑을 맡아 여권의 명운이 걸린 선거를 지휘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던 것 같습니다.
여당의 선거를, 한 위원장을 내내 힘겹게 만든 장본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가히 여권의 '엑스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정(醫政) 갈등과 이종섭(전 주호주 대사)·황상무(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 사건 등이 결정적입니다. 본인의 생각과 고집에 갇혀 국민과 싸우겠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민감한 시기에 대통령이 나서 정권 심판론에 불을 붙인 흔치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즈음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가 이번 선거의 가장 큰 변수로 떠오릅니다. 상당한 화력에 개인적인 서사와 스타일까지 갖춘 인물입니다. 딱 맞는 타이밍에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등장하자 민심은 크게 출렁였습니다. 민주·진보 진영 스피커로서의 영향력, 문재인 정부 시절 쌓은 정치적 경험, 정적(政敵)의 집권 후 사법적 수난으로 단련된 내공 등 한동훈 위원장은 조 대표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난감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당장 비례대표 선거 득표율에 빨간불이 들어왔습니다. 같은 편이지만 경쟁해야 하는 이런 관계를 설정한 건 조국 대표였고, 그래서 주도권은 조국혁신당에 있었습니다. 지역구도 비례도 민주당을 선택해달라는 '몰빵론'은 이런 국면에서 나온 수세적 캠페인이었습니다. 이재명 원톱 야권 단일대오 구상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총선 과정에서 당내를 평정한 이재명 대표가 마주한 또 다른 곤혹스러움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참전입니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함께 지지하는 문 전 대통령의 전면적 행보는 이 대표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선거 이후 국회 운영, 전당대회, 대선 경선 등을 앞둔 그로서는 '친문'의 구심력 확보는 경계해야 하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문재인, 이재명, 조국. 화려한 면면의 야권 인사들이 저마다의 논리로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고 나서자 선거전은 더 거칠어졌습니다. 주장이 선명하고 칼끝이 날카로울수록 지지층은 환호했습니다. 김건희·한동훈 특검법 발의가 새 국회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의 불법을 전제로 탄핵을 암시하는 발언까지. 야권의 기세는 거침없었습니다.
여야 어디서도 민생을 돌보지 못한 지난 정치를 반성하고 더 좋은 정치를 약속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후보자의 공약을 들여다보며 비교하고 더 좋은 사람을 선택해달라는 뻔한 말조차 없었습니다. 서로 심판하자며 악다구니를 치는 통에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의힘이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건지 저는 도통 알 수 없었습니다.
"피의 시대에서 땀의 시대를 지나 이제 눈물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어령)
앞선 세대가 흘린 피와 땀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위로하고 공감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의 정치 환경에서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고 저주함으로써 존재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지켜보며 좋은 정치를 갖는다는 게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응원하는 편의 승패와 무관하게, 그래서 저는 이번 선거가 내내 못마땅했습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제22대 국회는 선거로는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긴 쪽은 국민의 뜻이 오로지 심판이라고 믿으며 더 강하게 더 철저하게 상대를 죽이려 나설 것입니다. 나의 한 표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경고장을 사형 집행 명령쯤으로 왜곡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바깥의 세상은 포근한 봄입니다만, 여의도의 동토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로 가득합니다. 새 진용을 갖추게 될 우리 정치에 별다른 기대를 할 수 없어 서글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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