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다. 권력구조의 제도와 법적 장치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입법·사법·행정 등 삼권의 견제와 균형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고 있다는 건 순수 대통령제의 얘기이고 한국은 내각제적 요소를 상당 부분 갖춘 혼합형 대통령제인데다가 '당정'이라는 독특한 권력의 운용 형태 때문에 더욱 그렇다.
권력과 권한은 적절히 행사될 때 존재감이 커지고 권위가 서게 마련이다. 권한이 남용되거나 권력이 자제력을 잃을 때 그 권력은 주권자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 결과는 권력의 수명 단축 또는 헌정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권력이 절제되어야 하고, 포용력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이다.
민주화 이후에 국한해서 봐도 역대 어느 정권도 같은 시기에 윤석열 정권보다 지지율이 낮은 정권은 없었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보여줬던 정의와 굽히지 않는 소신은 보수층뿐만 아니라 중도층에도 강한 소구력을 보여줬고, 검찰총장이 대통령으로 직행하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쓸 수 있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윤 정부는 임기 초부터 지금까지 정책·민생보다 야당과의 적대관계를 이어오면서 불통과 무능의 이미지가 고착화됐다.
총선거에 적신호가 켜지자 한동훈 법무부장관을 집권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긴급 투입할만큼 여권의 위기감은 증폭됐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에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이 행사되기 전부터 야당의 법률안 단독 통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정치의 루틴이 되었다. 이에 더해 '김건희 리스크'는 여권의 '약한 고리'가 되면서 야당의 표적이 되는 동시에 국민적 이슈와 정치쟁점화 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의 갈등이 '김건희 여사 명품백' 논란으로 노출되면서 대통령실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한 위원장이 김 여사 명품백 논란에 대해 '국민 눈높이'를 강조하고, 김경율 비대위원이 김 여사를 프랑스 대혁명 때 민심 폭발에 하나의 원인을 제공한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한 게 윤 대통령 부부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다.
이외에 김 비대위원의 공천을 언급한 한 위원장에 대한 우려, 여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 위원장의 '자기정치'에 대한 경계 등이 한 위원장을 '응징'하려고 했던 복합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김 비대위원이 김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로 비유한 건 부적절했고 맞는 비유도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실이 한 위원장의 사퇴를 생각하게 된 인식의 저변에는 김 여사 명품백에 대한 한 위원장과 김 비대위원의 발언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다. 그 이전에 대선 과정에서 후보단일화의 당사자였던 안철수 의원, 여당 대표였던 이준석 대표, 유승민, 나경원 전 의원 등은 윤 대통령의 권력 앞에 속절없이 내몰리기도 했다. 김기현 체제의 등장과 퇴장도 대통령실의 영향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치는 포용과 타협의 산물이다. 특정 이슈가 법적 논쟁의 영역에 있느냐의 여부를 논하기 전에 국민일반이 갖고 있는 '여론'에 책임지거나 부응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건 시간문제다. 국민의 중간지대의 인식이 어떠한가를 살피고 성찰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의 출발이다.
여권이 정권 출범 이후 총선 국면에서 위기에 처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화석화된 권력의 과도한 행사가 지지층의 이탈을 가져오고 무능과 불통의 이미지로 굳어진 탓이다. 이를 인식한 여권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낸 카드가 한동훈 카드임은 말 할 것도 없다. 김 여사 명품백 논란에 대해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한 게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린 거라면 김 여사는 성역화된 존재나 다름없다. 이미 민주주의의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 조짐이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다.
향후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의 관계를 논하기 이전에 수직적 당정 관계와 국정 기조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여권 내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권력 갈등의 측면을 노출한다면 여권은 이번 사태의 봉합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향후 여권 내의 역학관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권이 여전히 성찰과 자기반성에 인색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구조적이고 원천적 한계일 수 있다. 이번 사태가 여권의 근본적 변화의 기폭제가 될지 전방위로 갈등이 확산될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여권 핵심이 민심의 소재와 민의에 둔감하다는 그동안의 지적과 비판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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