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취지를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이 법사위에서 논의 중이다. 지난 5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양당은 큰 이견 없이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법을 통과했다.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통과되면 본회의 절차만 남겨둔 셈이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보험업계의 노림수
금융당국과 양당, 그리고 보험업계는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가 되면 연간 2000~3000억 원의 보험가입자의 금전적 편익을 예상한다고 주장한다. 그간 보험가입자는 보험청구를 위해 의료기관을 직접 방문해서 서류를 발급받아 보험사에게 제출해야하는 번거로움으로 인한 불편이 해소될 뿐 아니라, 그로 인한 보험금 미청구도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요지다.
그렇다면 보험가입자에게는 좋은 정책일 것이다. 그런데 의아스런 점이 있다. 도대체 보험업계는 왜 이 법안에 찬성할까. 실손의료보험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보험사의 위험손해율이 130%에 이르는, 아마도 보험사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손실을 발생시키는 상품이다. 보험업계에 수천억 원의 손실을 더 초래할 청구 간소화법을 지지한다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법 취지가 사실이라면, 보험업계가 절대로 수용할 리가 없다. 손해 보는 장사할 보험업계가 아니지 않는가.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법을 절대로 '청구 간소화'라는 편리성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청구 간소화라는 주장의 다른 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청구 간소화법은 의료민영화 비판받은 '제3자 청구제'와 같은 취지
내 기억으로 보험업계는 실손의료보험 출시된 직후부터 위와 같은 주장을 해왔다. 당시엔 실손의료보험 '제3자 청구제'로 불리웠다. '제3자 청구제'란 환자에게 발생한 본인부담금을 보험가입자가 아닌 의료기관이 보험사에게 직접 청구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보험가입자는 의료기관에 본인부담을 미리 낼 필요도 없고 청구도 직접 할 필요도 없어진다. 의료기관은 환자로부터 받아야할 본인부담금을 보험사에게 청구해서 받게 된다. 보험가입자 입장에서 편리성은 최고가 된다. 당시에도 보험업계는 보험가입자의 편리성을 내세워 제3자 청구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보험업계의 주장은 '의료민영화법'으로 비판받았다. 환자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고 발생한 본인부담금을 의료기관에 지불한 후에 보험사에 사후 청구하는 것과 의료기관이 환자가 아닌 보험사에 청구하여 지불받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전자에서는 보험사와 의료기관간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후자의 방식에서는 갑과 을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후자에서 보험사는 의료기관의 청구한 의료비 내역을 들여다볼 것이고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후자에서는 보험사가 심사기능을 갖게 되는 셈이다.
보험사가 국민건강보험처럼 진료비 심사기능을 갖게 되면 국민건강보험과 대등한, 그리고 경쟁할 수 있는 의료체계가 형성된다. 심지어 경쟁에서 승리하면 국민건강보험을 완전히 실손의료보험이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구상은 실제로 삼성생명의 내부 보고서에서 담긴 바 있다. 의료민영화법으로 비판받은 이유다. 보험사의 이런 구상은 의료민영화 반대 여론에 밀려 좌절되었다.
청구 간소화의 속셈, 소액은 지급하고 고액은 거부하려는 것
이후 보험사는 '제3자 청구제'가 아닌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내세운다. 청구 간소화란, 보험가입자의 청구 절차를 의료기관이 대행토록 하자는 것이다. 제3자 청구제와의 차이점은 '청구 간소화'하에서는 보험사에 청구서류만 제출할 뿐 의료비까지 직접 청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보험업계는 이 청구 간소화를 추진하기 위해 보험가입자의 편리성, IT 발달에 따른 청구의 전산화 필요성 그리고 소액 미청구 보험금이 수천억에 이른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 세련된 논리에도, 보험사의 노림수는 제3자 청구제와 대동소이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보험업계가 수천억의 보험금이 추가로 지급되어 손실을 키울 제도를 찬성할 이유는 없다. 청구 간소화로 소액 청구 증가에 따른 손실보다 최소한 몇 배 더 큰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셈법이 작용한 것이다. 그것은 제3자 청구제의 노림수와 비슷하다.
보험사는 현 보험업법상에서는 환자가 청구하는 진료비를 심사하고 지급하는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심사하고 지급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 실손보험사들은 보험가입자의 청구가 많거나 과잉진료가 의심되면, 보험사와 비밀 계약한 자문의사의 자문을 받는다. 일종의 심사기능으로, 보험사가 보험청구에 지급을 거부할 때면 항상 내세우는 근거가 자문의사의 자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보험사 자문의사는 보험사로부터 거액의 자문료를 받기에 보험사의 요구대로 작성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실손의료보험에서 도덕적 해이 논란이 큰 도수치료, 백내장수술, 암치료 등에서 보험가입자의 보험금 청구를 거부하고 일방적인 자문의사의 의견을 토대로, 혹은 과잉진료라는 법적 대응으로 보험금 거부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최근엔 백내장 수술 보험금이 급격하게 늘자, 보험사들은 지난해 대규모 지급거부와 법적 소송을 진행했고, 그 결과 지난해 하반기부터 보험금 지급이 급감했다. 아마 올해 백내장 보험금 감소규모는 수천억에 이를 것이다. 지금도 많은 보험가입자들이 보험사와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 외에도 도수치료나 암치료 등으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들이 많다.
청구 간소화법은 모든 환자 진료정보를 보험업계가 집적가능하게 해
청구 간소화가 노리는 속셈은 여기에 있다. 청구 간소화법은 보험 청구에 필요한 세부 진료내역과 환자의 개인질병정보들이 전산화되어 집적되도록 한다. 보험사는 청구 자료들을 전산화하여 대규모로 진료 정보를 축적할 수 있게 되고 개개인의 세세한 진료내역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보험업계는 보험가입자의 보험금 청구를 거부할 수 있는 자료를 빅데이타 수준으로 축적하게 되고, 그 자료는 다시 보험가입자의 보험금 지급을 삭감하는 무기로 활용될 것이다. 보험업계는 언제든지 의료기관에게는 과잉진료로, 보험가입자에게는 도덕적 해이라는 프레임을 씌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무작성 청구 간소화를 반대만 할 수는 없다. 4차 산업혁명으로 IT 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AI 시대가 성큼 다가온 시대에 보험금 청구를 위해 의료기관을 직접 방문하고 종이서류를 발급받고 다시 팩스로 보험사에 보내는 방식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도 족하다. 즉, 보험 청구 절차의 전산화 자체를 반대하긴 어렵다. 문제는 전산화가 아니라, 전산화를 통해 개인질병 데이터가 쌓이고 이를 손쉽게 다른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논의와 규제방식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는게 문제인 것이다.
실손의료보험, 비급여 팽창의 악화 요인일뿐 해결주체 될 수 없어
우리 의료계에 만연한 비급여의 팽창과 과잉진료의 문제도 심각한 건 사실이다. 과잉진료와 비급여는 건강보험의 보장 노력을 좌절시키고 있고, 불필요한 낭비를 키우고 있기에 반드시 통제가 필요하다. 문제는 비급여와 과잉진료를 통제하는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가에 있다. 이에 대한 고민도 부족하다.
사실 비급여와 과잉진료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건강보험제도에 있다. 건강보험의 보장률이 낮으니 비급여가 만연하고 있고, 이를 실손보험은 보장해주는 것이고 의료공급자는 이를 활용하여 비급여 가격을 올리고 남발하는 과잉진료가 유발되는 것이다. 즉 실손의료보험은 비급여의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므로, 비급여와 과잉진료의 해결 주체가 아니라, 비급여의 문제와 함께 개혁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건강보험의 비급여 자체를 규제해야 한다. 비급여가 양산되는 구조 자체를 없애서 실손의료보험과 의료기관이 이를 영리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규제의 핵심이어야 한다.
청구 간소화법, 심사숙고 하며 재논의해야
청구 간소화법이 가입자 입장에서 일면 편리한 측면이 분명 있는 게 사실이지만, 또 다른 이면을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단순히 가입자의 편리성 증대만으로 이유로 청구 간소화법을 찬성해서는 안 된다.
분명 청구 간소화법은 보험가입자에게 부메랑이 되어 보험사의 횡포를 더욱 조장하는 무기가 될 것이고 보험가입자에게 더 큰 피해와 분쟁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와 대책 마련은 너무도 부족해 보인다. 청구 간소화법을 다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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