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 신혼부부 오지현 씨는 전세사기 피해자이지만 피해를 인정받진 못하고 있다. 가구 합산소득 7000만 원 이하, 보증금 5억 원 이하의 '피해자 자격'에 해당하지 않아서다. 전셋값이 급등하던 지난 2021년 입주한 전셋집의 보증금은 5억 2000여만 원으로 지난 6월 시행된 전세사기 특별법상 피해자 자격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초과했다.
입주한 이듬해에 바지사장으로 밝혀진 집주인은 여전히 보증금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면 거리로 쫓겨날 수 있는 상황, 당장의 미래가 불투명한 지금 투명한 건 "매달 쌓이는 대출이자뿐"이다. 정부는 부부의 소득기준을 피해자 자격에서 제외했지만, 그들에게도 5억 원 규모 보증금은 '큰맘 먹고 당겨온' 은행 대출금이었다.
오 씨는 입주 시 주택도시보증공사(HUG)를 통해 임차인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했다. 하지만 대출 과정에서 은행과 진행한 질권설정이 문제가 돼 이조차도 무용지물이 됐다. 보험사가 보험가입자에게 보증금을 지급하는 대신 보증금반환채권을 받아오는 게 전세보증보험의 구조다. 은행이 질권설정을 통해 확보한 우선변제권은 HUG의 보증금 지급 기피 명분으로 작용했다.
피해자 입장에선 사기피해에 대한 사전조치를 충실히 수행했음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셈이다. 특별법상 '전세사기 피해자 등'에도 포괄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부는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는 물론 국민신문고, 금융감독원 등 공식 창구 어디에서도 피해를 제대로 호소할 수 없었다.
이들은 지난해 12월부터 집주인 및 HUG 등을 상대로 전세금 반환 소송을 청구해 진행 중이다. 소송의 결과를 장담할 순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본인과 유사한 사례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지만 "모두 마땅한 창구도 없이 서로에게 피해사실만을 털어놓고 있는 실정"이다. 오 씨는 "피해지원을 받은 바 없는 케이스이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의 재판이 선례가 되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조사해주지 않는 전세사기 피해, 특별법 개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정부는 오는 12월 전세사기 특별법을 개정·보완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그러나 오 씨는 "정부가 낸다는 개정안에 별 기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세사기 피해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지 이제 1년이 넘었지만, 오 씨와 같은 사각지대의 피해사례가 여전히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 씨는 "전세사기피해자모임에서도 저 같은 사례는 찾지 못했다"라며 "결국 온라인에서 알음알음 자기들끼리 피해상황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런 사례들을 정부 차원에서 조사하지도 않고 어떻게 법이 제대로 보완될 수 있겠나" 물었다. 그가 자신의 피해사례를 '접수'할 수 있었던 최초의 창구는 정부 공식기관이 아닌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의 전세사기 고충 접수센터였다.
개인소송의 1심 공판을 몇 주 앞둔 지난 6일, 오 씨는 서울 영등포구 국회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시위에 나섰다. "제대로 된 피해조사 없이 개정하는 특별법은 쇼일 뿐입니다." 제대로 된 '보완입법'을 위해선 "피해규모 및 유형, 피해자의 신용, 건강, 주거 수요 등" 다양한 사각지대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게 오 씨의 주장이다.
민주당 전세사기 고충접수센터 측은 "정부 차원의 조사가 없어 전세사기 피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아무도 모르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며 전세사기 고충 민원인들의 릴레이 1인시위를 센터 차원에서 지원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오 씨와 함께 현장을 찾은 권지웅 민주당 전세사기 고충 접수센터 공동센터장은 특히 "전세사기 피해구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빈약해 보인다"고 평했다. 국토교통부는 현재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피해결정 신청을 통해 피해현황을 조사하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실질적으론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통해 한 차례 '필터링'된 피해자들만이 조사대상이기에 정확한 고충파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 4월 발표된 특별법에 따르면 피해자는 △대항력을 갖추고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 △임차주택에 대한 경·공매 진행(집행권원 포함) △면적·보증금 등을 고려한 서민 임차주택(세부요건 하위법령 위임) △수사 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 △보증금의 상당액이 미반환될 우려 등 6개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특별법 상의 '피해자'에 포함될 수 있다.
이에 피해자모임 등지에선 △불가피한 이유로 대항력을 상실한 피해자들은 지원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 △경매진행이 늦어지는 경우 지원이 늦어지거나 지원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점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주요지역이 서민임차주택의 기준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점 △전세사기 사건의 수사 자체가 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 △'다수의 피해자 발생 우려 시', '보증금의 상당액 미반환이 우려되는 경우' 등 기준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 등을 국토부가 제시한 6가지 요건의 문제점으로 꼽은 바 있다.
"전세사기 피해 사각지대 보완하기 위해선, '피해조사'부터 선행돼야"
특히 △다가구주택 △근린생활시설·상업용 오피스텔 등 비거주용 주택 △불법 건축물 △후순위 임차인 등은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에도 현재의 특별법 적용을 받을 수 없는 대표적인 사각지대로 꼽히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다가구주택 전세사기 피해로 보증금 8000만 원을 잃은 50대 세입자 A씨가 '돈 받기는 틀렸다'는 말을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일이 알려지기도 했다.
국회 국토교통위 소속 심상정 정의당 의원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지난달 31일 국회 본관에서 열린 '전세사기특별법 도입 후 현황과 보완대책 간담회'에서 신탁 등기 주택을 이용한 신종 전세 사기 등 특별법상의 피해 사각지대에 대한 보완 입법을 요구했다.
권 센터장은 "전세사기의 피해 유형과 범위가 워낙 넓기 때문에 '피해 사각지대'를 법적으로 보완하기 위해선 결국 세세한 피해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라며 "이는 모든 사기 피해자에게 국고를 통한 전폭적인 지원을 감행하라는 말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유형의 피해자를 지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피해가 있고 그 피해자들은 어떤 고충을 겪고 있으며 국가는 이들 구제를 위해 어느 정도 선까지 나설 수 있는가'를 논의하기 위해 피해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권 센터장은 "오늘 1인시위에 나선 고충인(오 씨) 같은 경우에도 최종적으론 특별법에 포함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라면서도 "그러나 이러한 피해사례가 피해조사를 통해 파악되고 논의되기 시작한다면, 대안 대출 등 특별법 밖에서나마 정책적인 상담·지원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지금의 (피해지원) 구조는 범위가 좁은 특별법상 피해자를 설정해 놓고 '여기에 속하지 않으면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이라며 "전세사기 피해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다면, 지금의 정책으로 포괄되지 않고 있는 여러 피해자들의 피해를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를 더 적극적으로 논의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피해결정신청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행 특별법상 피해조사는 보증금 미반환에 대한 우려 정도, 미반환에 있어서의 의도성 여부 등에 집중돼 있어 "전세사기가 피해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다.
권 센터장은 "전화면접이나 문항수를 높인 설문조사 등 지금의 시스템보다 더 세세하게 피해조사를 할 수 있는 방안은 많다. 지금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피해를 알리고 싶은데 못알리고 있는 실정"이라며 "(정부는) 특별법 보완요구를 정치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보완이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전격적인 피해조사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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