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대한 물음이 쏟아지는 나날이다. 인권보장을 외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사이, 한편에선 그 목소리의 정당성을 두고 격론이 펼쳐진다. 갖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프레시안>과 한국인권학회가 만났다. 인권은 사회적 화두인 동시에 연구와 학문의 대상이다. 학계가 쌓아온 '인권학' 연구를 사회적 화두로 다시 던진다. 평화-인권-환경 연구자인 황준서 박사가 글을 쓴다. 편집자 주.
인간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일 수 없다. 특히 인간의 생존은 지속가능하고 건강하며 깨끗한 지구 생태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평균 온도는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지구 온도 상승은 지구 생태계 붕괴와 이상기후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올해 여름에도 우리나라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정부의 대응 실패로 인해 대규모 인명피해가 따른 참사가 발생했다. 한편 폭염 아래 노동자들은 건강과 생명을 위협받고 있으며, 빈곤층은 겨울이면 찾아올 한파에 벌써 떨고 있다. 급작스러운 환경변화로 인한 동식물의 고통도 말할 수가 없다. 모두의 존엄한 삶과 행복을 위해 환경을 지킬 권리, 환경권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인류의 시대'
공식적으로 오늘날 지질시대는 '홀로세(Holocene)' 또는 충적세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의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이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2009년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인류세연구집단(Anthropocene Working Group)'은 인류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인해 엄청난 플루토늄이 지층에 축적되기 시작한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작으로 제안했다. 2024년 부산에서 열릴 '세계지질과학총회'에서 이 제안에 대한 동의 여부를 투표할 예정이다.
한편 "1950년대 이전에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뜻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인류세연구집단의 결정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리고 제이슨 무어(Jason W. Moore) 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인류세'라는 말이 오히려 제국의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인간과 자연 착취를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인류세라는 말 대신 현세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세를 인류세(인간)로 부르던 자본세(인간이 창조한 자본주의 제도)로 칭하던, 인류가 지구환경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바야흐로 '인간의 시대'이다. 인류는 지구의 지층에 잠들어 있던 화석들을 '연료'로 불태우면서 '성장'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폭주하는 전차에 탑승해 있다.
전차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전차가 지나간 길을 돌아보지 않는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막대한 부와 기술발전을 이룩하였지만,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종의 터전인 지구를 불태우고 있다. 그 대가를 이상고온, 극단적 기후현상, 농경지 감소, 생물다양성 손실 등으로 돌려받고 있다. 파괴전차는 끊임없이 달리고 있지만, 그 전차가 달릴 수 있는 행성은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환경에 대한 권리'
오늘날 수많은 '기후위기' 완화 및 적응 정책들은 모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자연을 자원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인간 사회에서 위기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기회, 다른 하나는 위험이다.
가령 기후'위기'로 인해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고, 생물다양성 손실이 빨라지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재난으로 취약해지는 사람들이 증가한다고 있다는 연구와 보도가 이제는 '보통 일'처럼 느껴진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사 창립자 빌 게이츠,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 같은 부자들은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은 북극에서 "저탄소" 기술을 활용하여 니켈, 리튬, 코발트 같은 광물매장지를 탐사하고 있다. 기후위기 상황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 지구적 환경파괴는 불평등의 문제이며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이 존엄한 삶을 영위할 토대를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이다. 환경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1969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UN Economic and Social Council)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에 대한 유엔 회의 개최를 결의하였다. 3년 뒤인 1972년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 인간환경회의(UN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채택된 '스톡홀름 인간환경 선언'은 인간의 존엄한 삶과 행복을 위해서는 그 수준에 맞는 자연환경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깨끗한 환경을 누릴 인간의 권리를 간접적으로 인정하였다. 2022년, 유엔 인권이사회(UN Human Rights Council)는 스톡홀름 인간환경회의 50주년을 기념하고, 전 지구적 생태불평등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면서 만장일치로 ‘깨끗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을 누릴 권리(the human right to a clean, healthy and sustainable environment for all people)’를 인권으로 인정하는 결의를 채택했다(UN Human Rights Council 결의 48/13호 참조).
우리나라는 1980년에 처음으로 헌법에서 '환경권'을 명시하였고, 이후 1987년 헌법 제35조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국가의 환경권 보장 책임과 국가와 국민의 환경보호 의무를 규정했다. 다만 환경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법률에서 규정하도록 유보하였고, 그동안 헌법상 환경권은 '실체가 모호한 권리'라는 상태로 남아있었다.
환경권 보장을 위한 진전도 꽤 있었다. 이 시기부터 환경정책기본법 등 각종 환경 관련 법률들을 비롯하여 환경영향평가, 환경분쟁조정제도, 환경오염 피해 배상 및 구제 등 각종 환경 관련 제도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의 악의적인 탄압에 맞서면서 환경보호에 앞장선 수많은 환경운동가들과 시민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깨끗한 환경을 유지·영위·보전할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첫째로 환경파괴의 주요 원인인 '성장을 향해 달릴 뿐인 파괴전차'가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환경권의 의미가 여전히 구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환경권은 환경정보에 대한 접근 또는 의사결정에 참여할 절차적 권리 중심으로 보장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환경파괴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환경파괴가 인권침해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김민성 연구자는 기존 환경권 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환경권을 6가지 의미의 권리로 제시한다. 첫째, 지구와 생명공동체의 보호를 고려한 자원이용에 대한 권리와 책임이 있다. 둘째, 환경보호와 평등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개발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 환경과 인권에 대해 교육받고 정보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 넷째, 환경재난에 대해 법적 구제와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다섯째, 건강한 생태환경에서 발전할 권리가 있다. 마지막으로 환경오염에 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저항할 권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경제성장을 목표로 전국에 조성된 국가산업단지들은 모순적으로 환경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가장 적극적인 환경권 침해 당사자이기도 했다는 징표이다. 김민성 연구자는 1980년대에 조성된 충남 서산 석유화학단지에 주목한다. 충남 서북부에는 석유화학단지와 화력발전소 등 '기후위기' 원인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
한 때 "조용한 오지"라고 불리던 서산을 "제2의 울산"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국가와 기업의 야망은 서산 주민들의 삶을 담보로 현실화되었다. 한때 풍부한 어족자원을 바탕으로 세워진 서산 지역 어업 공동체는 현대정유, 현대석유화학, 우주항공산업 등 여러 공장단지가 세워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간 주민들의 생계가 위태로워졌고, 대기와 지하수 등 각종 환경오염으로 건강도 나빠졌다. 주민들의 지구와 생명공동체 보호를 고려한 자원이용에 대한 권리가 침해당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삶은 기업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어업 대신 공장 주변 식당이나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가 하면, 어떤 주민들은 터전을 떠났다. 공장과 공장 주변 마을 주민들 사이 소득 격차가 벌어졌고, 교통·문화·의료·복지 등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리기 위한 인프라는 공장 위주로 설계되었다. 국내 최대규모 석유화학단지가 조성되면서 외부 인구의 유입이 증가했고, 도로나 상권이 조성되는 등 주변 인문환경도 크게 변화했지만, 지역공동체의 연대의식과 평등의 문화는 점차 소실되었다.
한편 건강 악화를 호소하는 주민들은 공장에서 어떠한 물질이 다뤄지고 있는지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으며, 공장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이나 각종 사고로 인한 피해를 적절히 보상받기도 어려웠다. 가장 주요한 원인은 공장의 환경오염이 주민들의 건강 악화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입증하기가 어렵고, 이러한 인과관계 조사를 위해 역학조사를 주민들이 사비를 들여서 실시하기에는 너무나 비용이 컸기 때문이다.
주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부'를 창출하고 '지역경제' 소득을 올려주는 기업의 편에 서서 각종 환경규제를 적극적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서산을 비롯하여 당진, 태안 등 충남 서북부 도시들이 스스로를 '주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니라 '기업하기 좋은 명품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대가로 주민들의 환경정보에 대한 접근권과 환경오염에 대해 보상받을 권리는 외면당했다.
깨끗하고 적절한 자연환경을 누리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이나 공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거나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주민들의 존엄한 삶과 생활수준에 직결되는 공장단지 등 환경오염시설 건설에 있어서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공장단지가 조성되던 시절 정부는 국가의 경제성장을 이유로 주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공장단지 조성을 추진했다. 성장을 향해 달리는 파괴전차 앞에 주민들의 목소리는 그저 기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스쳐 지나치는 간이역에 불과했다.
인권의 관점에서 환경오염은 본질적으로 존엄한 삶을 위협하는 불평등의 문제이다. 서산 주민들의 삶에서 보다시피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역 경제의 규모는 성장했지만,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 차별은 더욱 고질적인 일상이 되었다. '공장 들어서고 박탈감 느껴서 자살한 마을 여성들이 꽤 있다'고 말하는 주민들도 있을 정도이다.
'깨끗한 환경을 누릴 권리'는 공장에서 오염물질 배출기준을 잘 지켜서 환경오염만 최소화하면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나 기업 등 특정 집단의 환경오염은 자연환경과 사람들이 맺는 다양한 관계가 성장의 논리에 갇혀서 파괴되고 있다는 징표이다. '인류의 시대'에 환경권을 외치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를 끝내고, 지구와 공생 속에서 인간의 존엄한 삶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시대를 열고자 하는 전복적인 시도가 되어야 한다.
※ 본 연재에서는 한국인권학회·인권법학회에서 공동 발간하는 학술지 『인권연구』에 실린 시의성 높은 논문을 선정하여 소개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논문은 아래 링크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소개논문> 김민성. 2023. “환경권의 의미 확장을 위한 시론적 고찰: 서산 대산공단 인근 주민 사례를 중심으로” 『인권연구』 6(1): 101–147.
<다운로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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