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내 친구가 석탄 발전노동자라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내 친구가 석탄 발전노동자라면?

[초록發光]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우리는 전기 공동체로 연결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노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동은 쉽게 말하자면 직장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남의 직장 이야기는 참 흥미롭다. 시간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는 월급쟁이들에게 작은 것 하나하나가 소중하기에, 우리는 직장 이야기를 나눌 때 차이와 동시에 격한 유대감을 공유한다.

에어팟을 낄 수 있는 사무실

내가 처음 본격적으로 직장이라고 할 만한 곳을 다녔을 때 내 사무실 자리는 첫날 우연히 정해졌다. 그 회사는 사무실 자리에 규칙이 없어서 커다란 사무실에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랜덤하게 앉았다. 내 업무와 관련된 회의가 있을 때만 회의실에 헤쳐-모여를 하는 식이었다. 1년 넘도록 같은 사무실을 써도 옆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몰랐고 이야기할 일도 없어서 종종 에어팟을 끼고 일했다.

그 무렵 내 친구도 동종업계에 있었다. 사무실에서 그의 자리는 팀장 책상과 기역자로 마주하고 있다고 했다. "뭐? <무한 상사>나 <MZ오피스>에서처럼 상사와 하루 종일 같이 지낸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경악했던 것 같다. 하루 8시간을 감시 속에서 일하고, 일이 없을 때도 괜히 심각한 표정으로 웹서핑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자리 칸막이가 충분히 높은가, 본인 뒷자리에 누군가 앉아있거나 스르륵 다가올 수 있는가, 상사가 자주 외근을 나가는가, 그래서 에어팟을 끼고 일할 수 있는가,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더 많은 사람들과 직장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상사 없는 사무실이라는 업무 환경이 굉장한 특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직장 경험이란 수많은 월급쟁이들의 군상 중 너무나도 작고 특이한 조각일 뿐이었다. 반면 남의 직장 경험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면서 동시에 경험할 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린 서로의 직장을 이야기하면서 몰입하고 위안을 얻고 고통을 나눈다.

이어폰을 낄 수 있는 공장

10년 전, 나는 야간조로 핸드폰 공장에 다녔다. 유명 핸드폰사의 5차 하청쯤 되는 공장이었다. 내 일은 핸드폰 액정과 메인보드를 하루에 300~400개정도 붙이는 일이었다. 제품 외관상 보이는 부분이기 때문에 먼지나 잔기스 하나 없이 정확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와 같은 공정 사람들은 같은 칸에서 일했다. 공장 소음과 방진복 때문에 대화는 대체로 어려웠기에, 각자 유선 이어폰을 끼고 지루한 시간을 달랬다. 불량품이 너무 많다 싶을 때만 부품을 점검하거나 기계를 조정하는 회의를 했다.

핸드폰 공장은 작업환경이 깨끗하고 작업물이 가벼워 여성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위험은 적지 않았다. 화학약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공정, 컨베이어벨트에 끼이기 쉬운 공정, 하루 종일 한 자리에 서있어야 하는 공정 등. 더군다나 야간조였기 때문에 졸다가 사고가 나는 일도 있었다. 점심시간은 밤 12시부터 새벽 1시까지였는데, 10분 만에 밥을 먹고 휴게실 빽빽이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때 내가 그나마 나이가 어려서 덜 위험한 공정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어폰을 꼽고 내 할 일만 해내면 되었던 것 역시 나에게 주어졌던 일종의 특혜였던 것이다.

이 친구 잘못이 아니잖아요

2주 전, 나는 우연히 태안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났다. 기후위기 시대에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된다는 이야기, '발전소 노동자들도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동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으나 막상 사정을 잘 알진 못했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한 태안 화력발전소 노동자모임(정태모) 소식지도 읽어본 바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노동 경험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후위기에 공감한다고 한들, 내가 다니는 회사 문을 닫는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동의할 수 있을까?

우선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노동해서 어떤 식으로 전기를 만들어내는가 하는 소박한 이해부터 필요했다. 태안화력 발전소에는 3000명가량이 근무하고 있다. 오, 상당히 많네요. 태안 발전소는 석탄가스화복합발전(Integrated Gasification Combined Cycle, IGCC)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한다. 석탄에 고온 및 고압을 가해 가스로 만들고 이를 이용해 터빈을 구동한다. 오, 위험할 것 같은데요? 한여름에는 작업장 온도가 섭씨 40~50도가량 되는데 방진복도 입어야 하고, 화학약품도 사용하고, 엄청 무거운 물건들도 날라야하고…. 그런데 3000명 중 절반이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오, 세상에, 너무 힘들 거 같아요!

그와의 만남에서 가장 놀랐던 것을 고백하자면 사실 그가 나와 몇 살 차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난 어느 샌가 친구와 직장 이야기를 할 때처럼 탄식하고 분노하고 걱정했다. 젊은 날에 성실히 기술을 쌓아 괜찮은 공기업 쪽에서 일하게 된 그가 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는 건가? 몇 년을 근속한 비정규직보다 어제 입사한 정규직을 더 챙겨줘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기후와 노동자 모두에게 가혹한 이런 회사는 역시 폐쇄되는 것이 마땅한가?

그와의 대화에서 점점 확실해진 것은, 위험, 차별, 고용 불안정, 그리고 폐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에 그는 잘못이 없다는 점이다.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던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 더군다나 기후위기처럼 체계적인 이유에 따른 일자리 문제라면 더 많은 사회적 대책이 필요하다. AI가 우리 일자리를 뺏어갈 것이라고 걱정하는 감각의 10분의 1이라도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다면 좋을 것이다. 무관심은 결국 전환의 문제를 노동자 개인에게로 돌린다. 그리하여 전국 5만여 명의 석탄 일자리 종사자들과 그 지역사회에 너무나 가혹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전환의 방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전기에너지를 누릴 수 있도록 기여해 온 그와 그의 동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

한국 정의로운 전환의 현주소

2025년, 그가 일하고 있는 태안 석탄화력발전소의 10호기 중 1, 2호기가 폐쇄될 예정이다. 전국적으로는 이미 보령 1, 2호기를 시작으로 석탄화력발전소 폐쇄가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정의로운 전환이 법제화된 지 2년이 지났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은 정의로운 전환을 '탄소중립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지역이나 산업의 노동자, 농민, 중소상공인 등을 보호하여 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을 사회적으로 분담하고 취약계층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책방향'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지금 국회에서는 산업전환, 노동전환, 일자리 전환이라는 이름을 건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탄소중립기본법만으로는 부족한 점들을 채우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직장을 '모두'를 위해 폐쇄하는 것을 수긍하는 그를 만나면서, 그런데도 이들을 위한 정치적 대책은커녕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법령에 활자로 찍힌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말이 얼마나 속 빈 강정인가를 생각했다. 그의 직장 태안 석탄화력발전소는 석탄이라는 화석연료와 한국이라는 노동후진국의 교차점이다. 기후악당 한국의 석탄발전 비율은 2021년 41.9%로 세계 5위이다(에너지경제연구원, 2022 에너지통계연보). 국제노총이 국제노동기구(ILO)의 기본협약에 비추어 전 세계 국가들의 노동권 수준을 매년 평가하는 바에 따르면, 한국은 노동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나라(5등급)로, 법치가 완전히 붕괴된 나라를 제외하고는 최악의 수준이다. 이대로라면 한국이 가는 에너지 전환은 '가장 정의롭지 못한 전환'의 길이 될 것이 뻔하다.

우리는 전기 공동체로 연결되어야 한다

2015년, ILO는 이미 정의로운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정의로운 전환의 씨앗은 있는 셈이다. 이 씨앗이 노동인권 감수성이 메마른 한국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피어나려면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노력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정의로운 전환의 첫 사례를 지지하는 정치적 노력이다. 석탄발전소 노동자들은 보호가 필요한 '취약계층'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함께 요구할 권리, 안전하게 일할 권리, 과도한 근무를 하지 않을 권리, 대안적인 일자리를 얻을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 당사자이다. "다른 일자리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니야?"가 아니라 "뭐라도 정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질문을 바꾸는 것은 그들의 전환정치를 지지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둘째는 친구로서 연결되기 위한 공동체적 노력이다. 한전KPS 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인 그는 사람들이 전기 콘센트를 보면서 우리 발전소 노동자들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는 내 손으로 석탄을 태우지 않아도 전기를 쓸 수 있는 엄청난 특혜 속에 살고 있다. 밥을 먹을 때 농부들을 생각하면 경외감을 느낄 수 있듯, 전기를 쓸 때 발전소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전기가 눈물을 타고 흐르지 않도록, 그리고 열악한 노동환경과 허무하게 쫓겨나는 상황에서 눈물로 만들어지지 않도록, 전기 공동체에 연결되는 상상이 필요하다.

ⓒ환경운동연합(이지언)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