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지을 것인가, 태양광을 지을 것인가.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그간 수없이 들어왔던 질문이다. 지구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재생에너지와 농촌의 경합은 아픈 손가락 같은 것이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에너지 부정의가 반복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부정의는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좀 더 멀리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경관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을 연결하여 생각거리를 남기고자 한다.
태양광 경관의 어두운 면, 잘 고려되고 있는가?
재생에너지가 공간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확대한다는 점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확인되고 있는 현상이다. 전 지구적으로는 개발국들이 저개발국에 재생에너지 시설을 설치하면서 '식민화'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까지도 나온다. 재생에너지 시설이 지속적으로 농촌에 입지하게 되는 경향은 사회 구조적 불평등에 기반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건 농촌 지가가 저렴하니 농촌에 입지하게 되고, 그렇게 생산된 전기는 멀리 산업과 소비의 공간으로 흘러들어간다. 농지가 생태적·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도 굳이 태양광으로 대체돼야 하는지, 농사짓던 임차농이 다음 농지를 구하지 못하는 데 대책은 있는지 등 농업·농지 측면에서의 논점들도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근처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공식창구가 없어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해오기는커녕 외면만 해왔다.
그런데 과연 도시민들도 동일한 이유에서 농촌 태양광에 부정적일까? 농촌 태양광 반대가 앞선 농촌사회의 불평등을 진지하게 의식한 숙고의 결과일까? 대부분 도시민들은 태양광이 농촌에 입지하는 것이 '심각'하다고 여기기보다는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불편함의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농촌=자연'이며, '자연=보존'이라는 도식이 자리한다. 즉,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농촌에 태양광을 많이 설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피상적인 태양광 반대를 '농촌 경관 보존론'으로 별도로 구분하여 부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런 식의 주장을 특히 정치권에서 많이 만날 수 있다. 태양광도 하지 말자고 하지만 농촌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의해 농촌 태양광은 정치화되고 농촌은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왜곡되고 있다.
농촌 태양광이라는 어휘도 농촌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을 반영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태양광 설비를 농사짓던 땅에 세우는 경우라도 농지, 염해농지, 영농형 태양광으로 나뉜다. 산이 도시보다는 농촌에 많다는 이유로 산지 태양광을 농촌 태양광으로 섞어 부르는 경우도 흔하다. 농어촌공사의 농업용 저수지에도 수상태양광이 많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것도 농촌 태양광으로 불린다. 이들 태양광들은 입지하는 위치가 다른만큼 법령과 절차도 다르기에 구분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농촌 경관, 혹은 인류세 경관
5년 전 논문에서 나는 농촌 주민들이 태양광에 반대하는 이유가 장소애착(Place Attachment)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농촌의 주민들은 경관에 나에게 체현되는 익숙한 것, 나와 자연의 일체감을 주는 것, 떠날 수 없이 의존해야 하는 삶의 터전 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농민들의 생각에 뿌리박힌 농촌 경관을 대체하는 식으로는 태양광 경관이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농촌 경관 대 태양광 경관의 대립 구도에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내가 텃밭 농부가 되면서부터이다.
고작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면서, 농업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인간 정복의 역사라는 점을 절감하게 되었다. 농사를 시작할 땐 모든 밭의 흙을 뒤집는 로타리치기(써레질)를 하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 몇 명이 하긴 어려운 일이라 바로 옆자리 농사짓는 분이 디젤 경운기로 도와주셨다. 멀칭은 흙이 마르거나 잡초가 발생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멀칭을 하지 않은 땅은 잡초들이 빼곡하게 자라나기에 밭 면적을 다 덮어줘야 한다. 볏짚이나 잡초로 흙을 가리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검은 비닐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은 봄철 땅을 변형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종자를 심을 것인가가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다양한 근대적 씨앗들을 개발한다. 육종이라는 과정을 거쳐 인간이 원하는 형태로 식물을 진화시킨다. 더 많은 열매를 위해 열매 성과가 좋은 식물끼리 교배를 반복한다. 물론 이제 생명공학 기술을 사용한 유전자 변형 생물(GMO) 작물 생산으로 생물학적인 정복은 훨씬 수월해졌다.
인류세 경관은 질문한다, 그 익숙한 농촌 경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평균 기온에 상관없이 우리나라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는 농업의 에너지 의존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관이다. 하우스 경관은 사시사철 푸른 채소를 먹고자하는, 자연을 거스르고자 하는 소비자 욕망의 산물이다. 거의 모든 밭에서 사용하는 멀칭용 검은 비닐은 석유로 만든다. 검은 비닐 아래는 햇볕 없이 온도만 어마어마하게 뜨거워 잡초도, 다른 작은 생명들도 자라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흙이 엉겨 붙은 폐비닐은 재활용도 되지 않아 농촌 폐기물 문제를 야기한다. 이제 사물인터넷(IoT)에 기반한 스마트팜 경관은 노동력 절감을 약속하며 농촌을 더 자본 의존적, 에너지 의존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나간다.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 이는 로레인 대스턴이 쓴 <Against Nature>의 한국역저 제목이자, 내가 농촌 경관 보존론에 제기하고 싶은 질문이다. 현재의 경관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 같지만, 이는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농촌은 자연이 전혀 아니다. 농촌 주민들의 장소애착도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환경을 변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인류세에서도 농업을 주목한다. 인류세 가설 중 러디먼의 가설은 초기 인류 농경을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꼽는다. 초기 인류의 쌀 생산으로 인해 온실가스 메탄이 배출되어 약 5000년 전 대기 중 메탄 농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하버와 보슈의 합성질소 발명은 1950년대 이후 전개된 녹색혁명을 이끌었으며 동시에 지구의 질소순환체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엄청난 생산량 증대로 가축을 먹일 사료용 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의 동물 축산 체제의 밑거름이 되었다.
인류세 시대의 농촌 태양광을 위해
농촌 경관은 지속적으로 바뀌어왔고, 그 과정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농촌 경관을 태양광 경관으로 무분별하게 대체하자는 주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촌과 나란한 시선에서 탄소중립 과제를 풀어나가기를 요청한다. 농촌을 낭만화하고 미화하는 단편적인 시선이 당장은 태양광에서 농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나, 언젠가 독이 될 것이다. 농촌을 자연(自然)으로, 즉, 늘 원래 그랬던 것으로 박제하는 것은 고통 받는 농촌의 실체에 침묵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농형 태양광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농형 태양광은 작물을 기르는 그 위로 태양광 시설을 올리는 것이다. 국내외 실증 연구들의 결과들은 태양광 시설과 작물의 햇빛 공유가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모아지고 있다. 일부 작물은 태양광 시설이 냉해나 지나친 고열을 막을 수 있어 더 도움이 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에 햇빛 공유가 적합한 작물이 무엇인지 찾고, 농지 중간중간 설치된 태양광 설비 기둥을 고려해 손작업할 작물을 고르고, 농민이 태양광에 실질적으로 투자해 주인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나가야 한다.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가 내년 국제지질학총회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많은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많은 것들과 결별하고 또 만들어나가야 한다. 늘 그랬듯, 탄소중립 문제는 고차방정식을 푸는 것과 같다. 농촌과 태양광의 관계는 먹거리체계와 에너지체계라는 각각 거대한 두 체계가 만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 농촌과 기후는 각각 티핑포인트를 문턱에 두고 있다. 이제 한 쪽 편을 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정의로운 전환 관점에서 윈윈할 수 있는 참신한 대안을 만들어내고 실험해나가야 한다. 농민들이 에너지 전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재생에너지 투자와 이익으로만 환원돼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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