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로 '내몰리는' 이들 있다 … 취약계층 여성에 '임신중단권' 보장해야
2021년 3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성 A 씨는 경제적인 이유로 육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임신중단 수술을 결심했지만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비용 문제로 수술을 미루던 A 씨는 결국 당해 7월 자신의 주거지에서 아이를 출산한다. A 씨는 출산 직후 아이를 방치했고, 결국 아이는 사망했다.
2020년 6월 임신 사실을 인지한 여성 B 씨와 그의 남성 연인 C 씨도 비슷한 경로로 '영아살해'를 저질렀다. 어린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던 둘은 경제적 능력 부족으로 임신중단을 원했지만 병원비용이 모자라 포기했다. 집에서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출산한 이들은 그 직후 영아를 살해했다.
최근 '수원 영아시신 유기사건'을 계기로 영아살해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 아동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으로는 미등록 아동 발생 방지를 위한 출생통보제와 해당 범죄에 대한 형량강화가 주로 꼽힌다. 여기서 빠진 논의가 하나 있다. 바로 많은 가해자들이 처음 시도했던 일, 임신중단에 관한 이야기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한국에서 임신중단은 비범죄화됐다. 그러나 산모가 경제적 부담이나 의사의 거부 등을 이유로 적절한 시기와 방식의 임신중단을 행하지 못하는 경우들은 지난 4년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후속 입법 조치가 없어 수술, 약물 등 임신중단 관련 행위가 모두 병원이나 산모 개인의 재량에 맡겨진 탓이다. 수술에 필요한 고가의 비용이 유지됐고, 임신중단을 위한 방법은 한정됐으며, 주변인들은 물론 산모에게 수술을 처방해야 할 의사들의 인식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가 개인의 원치 않는 임신을 완벽히 통제할 순 없다. 임신중단권이 적절히 보장되지 않는다면 원치 않는 임신을 맞은 이들, 그 중에서도 취약계층의 여성들에게는 임신중단이란 선택지조차 사라진다. 그렇게 임신중단을 원하는 이들이 임신중단에 대해서도 장벽에 부딪힐 때, 영아살해 범죄의 발생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임신중단권을 잃은 이들 중 일부가, 특히 경제·사회적으로 고립돼 임신출산 부담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의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더 자주 더 쉽게 영아살해라는 범죄를 자신의 선택지에 올리게 된다.
영아살해 및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 씨와 B 씨의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주변의 시선 및 가족과의 불화 등을 염려해 임신 사실을 숨기는 등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 △출산을 원하지 않았지만 임신중단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채 출산일을 맞았다는 점 등을 명시했다.
이는 영아살해라는 범죄 자체의 비도덕성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특정 집단이 특정 사회적 조건에 의해 특정 범죄군으로 내몰리는 경향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보다 앞서선 임신한 여성의 건강과 재생산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낙태죄 폐지됐지만, 낙태약은 도입 요원 … 오정보, 불법수입에 의존하는 여성들
전문가들은 △유산유도제의 필수의약품 지정 △임신중지 비용의 건강보험 급여화 등을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꼽는다. 비용부담을 덜어 취약계층의 임신중단 접근성을 키우는 한편, 그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정확한 방식의' 임신중단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보건기구(WHO)가 18년 전부터 '필수의약품'으로 권고하고 있는 유산유도제의 경우 임신중단권 보장의 핵심요소로 꼽히고 있지만, 국내에선 낙태죄 폐지 이후로도 여전히 유산유도제의 공식 유통망이 부재한 상황이다. 때문에 임신중단을 원하는 산모들이 효과가 불분명한 비공식 수입 약품을 구입해 복용하거나, 아예 잘못된 방식의 처방에 노출되는 일도 잦다.
지난해 1월 전라북도 전주에서 한 여성이 임신 3분기(28주)에 유산유도제를 복용하다가 임신중단에 실패, 조산아를 출산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일례다. 당시 해당 여성은 임신주수를 이유로 병원 수술을 거부당한 끝에 부정확한 정보와 유통경로가 불분명한 약품을 바탕으로 '3분기 임신중단'을 시도했다.
사건이 알려진 당시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인권단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캐나다의 경우 임신 2·3분기의 임신중지에 대한 지원을 위해 법률팀·사회복지사·환자를 연계한 주치의·산부인과 전문의 등으로 위원회를 구성한다"며 이 같은 일을 막기 위해 해외 사례를 따라 "태아 및 여성의 건강 상태, 사회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의료적 시술 방향과 사회복지 등의 지원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비슷한 사례가 그보다 앞선 2019년 5월경 대전에서도 발생했다. 당시엔 유산유도제 '미프진' 판매사이트를 운영하던 약사 및 직원들이 임신 20주차를 넘긴 산모에게 미프진을 처방했고, 이후 태아가 조기 출생하자 영아의 살해 및 시체유기 방법 등을 안내했다가 약사법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유산유도제의 유통·처방, 안전한 사용방식 등에 관한 정보가 부재하는 사이 비슷한 경로의 피해사례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6일 시민사회 연대체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는 서울 광화문 광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산유도제 도입 및 필수의약품 지정을 촉구하는 1625명분의 다수인 민원을 식품의약처에 제출했다. 유산유도제 도입 관련 민원은 지난 21일 의사들이 제출한 민원과 지난 5월 약사들이 제출한 민원에 이어 세 번째다.
식약처는 지난 2020년 헌법재판소가 명시한 낙태죄 폐지 관련 개정입법 시한이 만료됐을 당시 "인공임신중절의약품의 허가심사를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지난해 유산유도제 미프진 허가심사 절차에선 심사를 신청한 현대약품 측에 '자료미비' 등에 따른 보완심사를 요구해 별다른 소득 없이 종료한 바 있다. (관련기사 ☞ 낙태죄 없는데, '먹는 임신중지약'은 불법? … 미프진 국내 도입 무산)
모임넷 측은 특히 "매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임신중지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병원을 방문하지 못하거나 비용 등 기타 여러 이유로 유산유도제의 사용을 요구하는 상황"이라며 "온라인상에서는 쉽게 '미프진'이나 '낙태약'이라는 이름의 불법광고가 넘쳐나며, 광고를 통한 음성적 거래는 실제 약물의 안전한 사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날 민원 제출의 취지를 밝혔다.
민원의 대표 진정인을 맡은 나영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SHARE 대표는 "여전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을 통해서 약을 구하고 그들 중 대부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판매상으로부터 약을 전달받고 있다"라며 "수많은 여성, 시민의 건강과 삶이 정부와 보건당국의 무책임 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동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사무국장은 "유산유도제는 보건의료상 필수적으로 필요한 의약품이지만, 시장적 방식의 도입이 어렵다"며 "우리 사회는 그러한 의약품을 필수의약품이라 부르고 있으며, 식약처를 포함한 정부기관은 이를 국민들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유산유도제의 "안전성과 필수의약품으로서의 도입 필요성이 충분히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약처가 "여전히 이를 이행하지 않고 시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게 민원인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2019년 기준 75개의 국가에서 미프진의 사용을 허가하고 있으며, WHO는 유산유도제를 '필수핵심의약품'으로 분류해 각 국가에서 '미프진 접근성을 키우도록' 권고하고 있다.
유엔(UN)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19년 자유권규약 상의 '생명권' 해석을 두고 "여성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현존하는 장벽을 제거해야 하고, 새로운 장벽을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유산유도제가 도입된다고 임신중단의 '모든 장벽'이 철폐되지는 않는다. 정부와 국회는 낙태죄 폐지 관련 개정입법만 해도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시한을 이미 2년 이상 넘기고 있다. 다만 유산유도제가 불법적이고 비공식적인 방식으로만 유통되는 현 상황이, 임신중단을 원하는 여성에게 강력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임신중단 접근성이 떨어지는 나라의 여성을 위해 임신중단용 약품을 우편으로 공급해온 국제 임신중단권 운동 단체 '위민온웹'의 설립자 레베카 곰퍼츠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낙태와 관련한 모든 장애물은 가장 취약한 여성부터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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