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미국 중간선거 결과는 지난해 미 의회의사당 난입을 비롯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극단주의 범람에 대한 미국 사회의 우려에 적지 않은 안도감을 줬다. 선거 사기를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전 대통령이 지지한 핵심 후보들이 대거 낙선하고 유권자들이 임신중지권 보호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투표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9일(현지시각) 전날 치러진 선거에 대한 개표가 아직 진행 중인 가운데 미 CNN 방송은 연방하원에서 공화당이 209석을 확보해 191석을 확보한 민주당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봤다. 최종적으로도 공화당이 하원 435석 중 과반인 218석을 넘기리라는 전망이 대부분이지만 기대됐던 "레드 웨이브(붉은 파도)"는 없고 "잔물결"에 그쳐 민주당에 대한 소폭 우세만이 점쳐진다. 방송은 총 100석 중 35석에 대한 투표가 진행된 연방상원의 경우 기존 의석을 포함해 공화당이 49석, 민주당이 48석을 확보한 것으로 보여 접전 중인 애리조나주와 네바다주의 결과가 드러나고 다음달 6일 결선투표를 치르는 조지아주의 개표 결과가 확정될 때까지 결과를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저조한 데다 유권자들의 최우선 관심이 인플레이션에 쏠려 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집권당인 민주당이 대패할 것이라는 기존 전망과 거리가 있는 결과다.
민주당의 예상 밖 선전 배경으로는 우선 지난 6월 보수 우위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권에 대한 헌법적 보호(로 대 웨이드 판결)를 철회한 것에 대한 반감이 꼽힌다. 대법원이 임신중지권 보호 여부를 개별 주 권한으로 떠넘겨 버린 탓에 각 주는 혼란에 휩싸였고 민주당이 우세한 주와 공화당이 우세한 주 간 임신중지권 보호 여부가 크게 갈리게 됐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다수가 임신중지권 보호를 원하는 것이 드러나며 민주당은 임신중지권 보호를 중간선거의 주요 의제로 삼아 선거운동을 벌였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이 임신중지권 보호보다 인플레이션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나오며 민주당의 이 전략이 유효하지 않다는 비판이 내부에서까지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유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시간주에서 임신중지권 보호를 전면에 내세운 민주당 그레첸 휘트머 주지사의 대선이 확실시되는 것이 그 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미시간에서는 유권자의 45%가 임신중지권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꼽으며 인플레이션(28%)에 대한 관심을 눌렀다.
공화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들을 대거 후보로 내세웠지만 이 후보들의 극단주의적 견해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민주당 후보들이 이들의 임신중지권에 대한 극단적 견해에 맹공을 퍼붓거나 이들을 민주주의의 적 그 자체로 묘사하는 전략을 구사했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사기 주장을 적극 옹호한 더그 마스트리아노 공화당 후보가 펜실베이니아주 선거에서 민주당 조쉬 샤피로 후보에게 패한 것 등을 들며 이 전략이 많은 지역에서 유효한 것으로 판명됐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편집위원회 의견을 통해 "급진적 선거 부정 주장자들이 패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극단주의에 대한 혐오가 빛을 발했다"고 평가했다. 매체는 "현 상태에 안주"해서는 안 되지만 이번 선거에서 "민주주의와 합리성이 몇 가지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며 "미국인들은 안도했을 것"이라고 썼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부터 이어진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 뒤 유권자들이 극단적 후보나 큰 변화보단 안정을 선호하게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민주당 여론조사원인 피터 하트는 <워싱턴포스트>에 "미국은 (코로나19 이후) 힘든 2년을 보냈다. 이념보다 정상성에 대한 선거였다"는 견해를 밝혔다.
정치적 분열이 고착되며 '스윙 보터(부동층)' 자체가 줄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높은 물가 상승 등 현 정부를 흔들 수 있는 요인이 많음에도 많은 유권자들의 지지 정당이 굳어진 상태라 특정 사안을 이유로 지지 정당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상하원 선거에서 경합주가 많지 않았고 대체로 기존 의석을 가진 정당이 승리했다고 짚었다.
지지 후보 패하고 드샌티스에 치이며 수세 몰린 트럼프…입지 다진 바이든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뉴욕, 위스콘신 등에서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대거 낙선한 데다 차기 대선에서 유력한 당 내 경쟁자로 꼽히는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가볍게 재선에 성공하면서 이번 선거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입지를 좁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를 자처해 온 이들부터 앞다퉈 그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오랜 지지자였던 피터 킹 전 공화당 하원의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더 이상 공화당의 얼굴이 되어선 안 된다고 강하게 생각한다"며 당이 "개인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킹 전 의원은 덧붙여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자기 홍보와 론 드샌티스 주지사와 미치 맥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포함한 공화당 내부를 향한 공격이 이번에 공화당이 '레드 웨이브'를 일으키지 못한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매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옹호해 온 미 보수 방송 폭스뉴스와 소셜미디어(SNS)에서 활동하는 보수적 인사들의 트럼프 비판도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경계심을 표출한 드샌티스 주지사는 재선에 성공하며 공화당 차기 대선주자로 급부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호하는 매체인 <뉴욕포스트>조차 드샌티스(DeSantis) 주지사를 그의 이름에 미래(future)를 합성한 "DeFuture"로 표현하며 추켜세웠다.
바이든 대통령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탄탄해졌다. 대체로 집권당이 수십 석의 의석을 잃는 중간선거에서의 선방은 그의 재선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다. 낮은 지지율과 고령으로 고전하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에 대해 민주당 내부에선 선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칠 경우 공개적 재선 포기를 요구할 것이라는 조짐까지 나오고 있던 상황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9일 백악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지난 40년간 어떤 민주당 대통령보다 집권 1기 중간선거에서 잃은 의석이 적다"고 강조하며 2024년 재선에 출마할 의향이 있고 내년 초에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압승이 아니라도 하원 과반이 공화당에 넘어갈 경우 국정 운영에 일부 차질이 빚어질 전망이다. 코로나19 회복을 위한 확장 재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에 공화당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관해서도 공화당이 선거 과정에서 백지수표식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만큼 지원 규모를 두고 마찰이 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이날 연설에서 "국가 전역에서의 임신중지 금지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하겠지만 "많은 문제에 대해 공화당과 타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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