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김기현 대표, 주호영 원내대표 등 정부·여당 지도부 인사들이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일제히 불참했다. '4.3 사건 김일성 개입설'을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던 태영호 최고위원은 오히려 이날도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해 사과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현 지도부는 물론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제주를 찾아 대조를 이뤘다.
대통령실 "韓총리 메시지가 尹정부 메시지"…김기현 "민생 때문에 불참"
3일 제주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윤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한 총리가 대독한 추념사에서 "정부는 4.3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생존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고 보듬어 나갈 것"이라며 "희생자들의 넋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무고한 4.3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유가족들의 아픔을 국민과 함께 어루만지는 일은 자유와 인권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며 "희생자와 유가족을 진정으로 예우하는 길은 자유와 인권이 꽃피는 대한민국을 만들고, 이곳 제주가 보편적 가치,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더 큰 번영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날 기자들과 만나 "지난해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참석했고, 같은 행사에 매년 가는 것에 대해 적절한지 고민이 있다"며 "올해는 총리가 가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한덕수 총리가 내놓는 메시지가 윤석열 정부의 메시지"라며 이같이 말했다.
민주당 소속 오영훈 제주지사는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방미 일정 준비, 그리고 여러 가지 일정 때문에 참석이 어렵다는 얘기를 (통보)받았다"며 "도민들과 유족들 입장에서는 75 주년을 맞는, 의미가 남다른 해여서 대통령께서 참석해서 같이 함께해 주셨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많은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주호영 원내대표도 추념식에 불참했다. 김 대표는 이날 서울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4.3 추념식 불참 이유에 대해 "제가 당 대표 권한대행 시절에도 4.3 평화공원을 참배했다. 우리 당이 가진 4.3 사건에 대한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다만 시급한 민생 현안이 있다. 오늘도 당장 민생 현안 관련해서 회의도 하고 주요 이슈를 해결해야 한다. 중소기업 관련한 주요 민생 현안도 있고 부산엑스포 관련해서도 당력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김 대표는 "우리 당을 대표해서 최고위원, 정책위의장, 사무총장을 비롯해 다수 의원이 참석해서 우리 당의 의지를 표명했다"며 "여러 현안이 있기 때문에 당내 지도부가 역할을 나눴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서는 이날 추념식에 김병민 최고위원, 박대출 정책위의장, 이철규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태영호, 4.3 당일에도 적반하장…"무턱대고 사과하나? 4.3 용어부터 동의못해"
보수정권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은 늘 논란의 소재가 돼왔고, 앞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도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경우 지난해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 차례 참석했음에도 이번 4.3 추념식 참석 여부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앞서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의 '4.3 망언' 논란 영향이 컸다.
태 최고위원은 전당대회 후보 시절이던 지난달 13일 제주 4.3 평화공원을 방문해 "4.3 사건은 명백히 김 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며 "김 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제주 4.3희생자유족회 등으로부터 역사적 사실과 다른 극우적 주장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태 최고위원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대한 당 차원의 징계도 없었다.
오히려 태 최고위원은 이날도 기자들이 '사과 의향이 없느냐'라고 묻자 "저는 어떤 점에서 사과가 (해야) 되는지 아직까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제가 어떤 특정인들에 대해 조롱하거나 폄훼한 일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는 "사과해야 한다면 무엇을 사과해야 되는지가 먼저 규명돼야 한다. 무턱대고 사과한다? 사과하려면 왜 사과해야 될지 어떤 점에 대해서 사과해야 될지 이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고도 했다.
태 최고위원은 "4.3 사건이라고 하는 용어부터 저는 동의할 수 없다"며 "4월 3일에 일어난 일은 결국 남로당 제주도당의 결정이고, 그에 의해 12개의 경찰서와 관공서에 대한 무장 공격이 있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는 계속 주장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발언에 대해 4.3 유족과 제주도민들이 비판한 데 대해 그는 "제 발언의 취지에 대해서 과연 유족들과 피해자 단체에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도 저는 궁금하다"고까지 했다.
태 최고위원은 앞서 이날 최고위 모두발언에서는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할 때"라면서도 "그러자면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을 폄훼하고 과를 부각하는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4.3 사건 당일 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이 전 대통령의 공을 강조한 발언을 내놓은 것이다. 김기현 대표도 회의 후 기자들이 이 발언에 대한 평가를 묻자 "4.3과 직접 관계가 있다기보다도 전체적으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미흡했다는 말씀이고 그 인식에 공감한다"고 역성을 들었다.
국민의힘을 대표해 추념식에 참석한 김병민 최고위원은 이날 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치인의 발언으로 오늘 다시 유족의 아픈 마음을 상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오늘 국민의힘 최고위에서도 4.3을 추념하면서 같이 아픔에 공감하기 위한 노력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고, 태영호 의원도 이런 국민의힘의 입장에 반드시 함께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헛된 기대에 그쳤다.
천하람 "尹 불참, 굉장히 아쉽다"
정부·여당 지도부의 4.3 추념식 불참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천하람 국민의힘 순천갑 당협위원장은 이날 기독교방송(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굉장히 아쉬운 결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지금 제주도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다. 올해가 독특한 것이, 단순히 평온한 4.3이 아니다. 이번에는 태 의원의 발언뿐 아니라 여러 극단적 정당에서 4.3에 대해 굉장히 공격하는 현수막을 제주 전역에 붙이기도 했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천 위원장은 "대통령께서 못 오신다면 당 대표께서 오셔서 제주도민들께 4.3에 대해 우리 정부·여당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진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갖지 않도록 했어야 된다"며 "현실적인 면도 고려하자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실질적으로 마지막 4.3이다. 총선 직전에 대통령께서 내지는 여당 대표가 (제주를) 찾는 것은 '총선 앞두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런 인식을 드릴 수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尹대통령 약속, 부도 났다…4.3 부정 극우세력 활개쳐"
야권 인사들은 이날 제주에 총집결해 4.3 추념일을 기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위성곤·김한규·송재호 등 제주 지역구 의원들은 이날 오전 제주4.3기념관에서 현장 최고위원회를 개최한 뒤 4.3희생자 추념식에도 연이어 참석할 예정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4.3 유족회의 초청을 받아 이날 제주를 찾기로 했다.
이 대표는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여당의 극우적인 행태가 4.3 정신을 모독하고 있다"며 여당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이 대표는 "제주도민께선 모진 상처를 이겨내고 죽은 이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는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실천해왔다"면서 "그러나 4.3의 완전한 해결이라던 대통령의 약속은 부도났다. 정권의 퇴행적 모습 때문에 4.3을 부정하는 극우 세력이 활개 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4.3은 김일성 지시로 촉발됐다'는 망언을 한 여당 지도부는 사과 한 마디 아직 하지 않는다. '4.3은 공산세력 폭동'이라 폄훼한 인사는 아직도 진실화해위원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과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을 겨냥한 발언이다. 그는 "역사의 법정, 진실의 심판대에 시효란 없다"며 "반인권적 국가폭력 범죄 시효 폐지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3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4.3 희생자 신원 확인 유전자 감식 등에 민주당이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4.3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온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 바로 1년 전 4.3 추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말했다"면서 "하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추념식인 오늘 대통령은커녕 여당 주요 지도부 모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 원내대표는 "아마도 내년엔 (총선) 표를 의식해서 얼굴을 비출 것이다. 이게 4.3을 대하는 윤석열 정권의 민낯"이라고 직격했다. 그러면서 "국민을 기만한 이중적 행태에 제주도민과 함께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오영훈 제주지사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최근 현수막과 관련해서 4.3을 폄훼하는 극우단체나 보수정당의 메시지가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에 매우 걱정스러운 분위기도 존재하고 있다"며 "태영호 의원이 최고위원 선거 과정에서 촉발시켰고, 과거사 문제 해결 전반에 대한 보수진영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오 지사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윤석열 대통령께서 오늘 참석하셨으면 이런 문제들이 해소가 됐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다"며 "특히 오늘 국민의힘 당대표나 원내대표 또한 참석하지 않고 있는 점은 이러한 부분에서 오히려 4.3에 대한 그런 접근이 옳다는 메시지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이 걱정스럽다"고 우려했다.
문재인, 오후 제주 찾아 개별 참배…"더 이상 이념이 상처 헤집지 않길"
오 지사는 한편 "문재인 전 대통령도 오늘 오후에 (제주에) 와서 개별적으로 참배를 할 예정"이라며 자신이 문 전 대통령의 참배에 동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 지사는 "문 전 대통령 재직시 4.3 특별법과 관련돼서 큰 진전이 있었고 큰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동행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SNS에 쓴 글에서 "4.3을 앞두고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책을 읽으면) 4.3의 상실과 아픔을 깊이 공감할 수 있다"며 "더 이상 이념이 상처를 헤집지 말기를 바란다. 4.3의 완전한 치유와 안식을 빈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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