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 채 끝나기도 전에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 이로 인한 원자재 및 에너지 문제, 여기에 인플레이션에 따른 고금리 상황까지 몰아닥치면서 2023년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한 단어는 '불확실성'이다.
홍기빈 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지난 8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해도(海圖)에 없는 바다(Uncharted Territory)'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 거의 1년이 다 됐지만, 언제, 어떻게 끝날지 예측하기 힘들다. 미국과 중국 관계는 최근 불거진 '정찰 풍선' 사태를 보면, 경쟁을 넘어서 갈등과 불신이 심화되고 있다.
홍기빈 소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냉전시대 이후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며 장기화 가능성에 우려를 표했다.
"군사 행동이 벌어졌을 때 3개월 안에 수습이 되면 그 전쟁은 끝나지만 3개월을 넘게 되면, 여러 가지 이해관계 세력이 개입하고 이와 관련한 이권이 어떻게 배분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익이 관철되지 않는 한 우리는 납득할 수 없다'가 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이 현상 유지 차원에서 '스타트 스코어(start score, 득점 시작)'가 된다. 20년간 진행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그랬고, 9년 이상 벌어진 이라크 전쟁이 그랬다."
홍 소장은 미중관계에 대해선 '2025년 전쟁설'과 같은 비관적 전망이 '프로파간다'에 가깝다면서 "미국과 중국이 갈등 관계이고 말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건 맞지만, 1930년대 파시즘 때처럼 완전히 갈라져서 블록화된 상황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의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 튀르키예나 인도,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홍 소장은 윤석열 정부가 "가치외교"를 내세우고 있는 것에 대해 "불안하다"고 지적했다. 외교에서 가치를 얘기하는 주체로서 '국가'가 될 때, 정책적 유연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 윤석열 정부의 경제 정책 중에서는 "감세 정책"을 문제로 꼽았다. 홍 소장은 윤석열 정부와 마찬가지로 과감한 '감세 정책'을 들고나왔다가 45일 만에 물러난 영국의 리즈 트러스 전 총리와 엄청난 증세 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 바이든 정부를 비교하며 "감세 정책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20년 전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라며 "윤석열 정부가 정말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홍 소장과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2023년, 우리는 '해도에 없는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프레시안 : IMF가 1월 말 '세계 경제 전망(WEO) 수정 보고서'에서 석 달 전에 비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0.2%p 상향했지만, 전 세계 경제가 그렇게 밝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올해 세계 전망 경제 전망을 큰 틀에서 전망한다면?
홍기빈 : 코로나19 이후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인플레이션 충격 여파로 '활황은 아닐 것이다'라는 예견을 한 것 같다. 에너지·원자재·식량 시장 등 이 세 가지가 비용 부분에 있어 제일 중요한 근원적 요인인데, 세 가지 모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은 만큼 '경제가 활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프레시안 : 유튜브 방송 <홍기빈 클럽> 에서 현 상황에 대해 "'해도에 없는 바다'로 들어간다"고 말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홍기빈 : 2020년 3월 코로나19가 시작될 때 프레시안과 인터뷰하면서 '코로나19로 한 6개 정도 큰 기둥이 흔들릴 것'이라고 얘기했다.(☞ 관련 기사 : '목숨 걸고 일터 나와!'로 버티던 체제, 코로나가 박살 냈다)맨 아래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지정학적 구조'와 '생태위기'라는 두 개의 문제고, 그 위에 4개의 층위가 있는데, 하나는 '지구적인 가치 사슬망', '지구적 산업화'라는 것이고, 그 위로 '금융 시스템의 안전성 문제', 그 위로 '도시화 문제', 그리고 맨 위에 '민주주의 위기'가 있다고 했다.
이 가운데, 최근 2~3년간 생태위기 중에서도 기후위기가 제일 급박한 문제가 됐다. 기후위기는 지정학적 구조와도 맞닿아 있는 문제인데, 코로나19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지난 30년간 유지되어 왔던 '미국의 일극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이에 기후위기 대응 협조 체제 역시 혼란에 빠지게 됐다.
일극 체제가 불안정해지면서 지구적인 가치 사슬도 교란 상태에 빠졌다. 코로나19 때는 단기적인 무역 문제였지만, 지금은 미국이 구상한 반도체 공급망인 '칩4(한국·미국·일본·대만) 동맹' 등으로 배타적인 산업 정책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원자재 및 에너지 문제 등 지정학적 구조가 가치 사슬망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지정학적인 갈등에 제일 큰 영향을 받는 부분이 에너지·원자재·식량인데, 이 세 개의 시장은 수요 공급에 의해 작동되기보다는 지정학적 안정성에 따라 관리된다. 이에 더해 인플레이션과 고금리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외부적인 비용 요인에 따른 결과다. 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지정학적 불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021년까지만 하더라도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금리 인상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이후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급격하게 올렸다. 그로 인해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상황이 나타났고, 금융 시스템을 작동하는 데 있어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미국의 금리, 연준 금리를 역사적으로 보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계속 올랐다. 이후 2021년까지는 마이너스 금리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이게 지금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올해 5% 초반 때까지는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는데, 연준 금리가 5%가 넘는 상황은 지난 30년과는 전혀 다른 '뉴노멀'이 되는 셈이다. 즉, 금융 시스템의 작동 규범이나 룰이 변하고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19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지정학적인 구조가 바뀌었고, 이에 따른 지구적 가치 사슬과 고금리라고 하는 금융 시스템의 변화까지, 지금 크게 보면 이런 흐름이다.
모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공모자'
프레시안 : 지정학적 변화에 영향을 끼친 것이 크게 두 가지인데,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이다. 두 가지 모두 쉬 끝날 것 같지 않다.
홍기빈 : 지정학적인 구조 변동 상황에서는 거의 모든 담론이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성격을 갖는다. '러시아 쪽이 이긴다, 러시아 쪽이 정당하다'는 것도 프로파간다고, '러시아가 악마고 우크라이나가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것도 하나의 프로파간다다. 이때 프로파간다는 뭐가 옳다거나 그르다는 게 아니고, 상황을 객관화해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는 프로파간다가 아닌 얘기가 거의 없다. 따라서 사건을 예측해 '언제 끝난다'라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떤 여파를 끼치고 어떤 충격을 가져오고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이 냉전시대 이후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냉전시대에는 미국하고 소련,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전 지구 모든 영역에서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더 큰 갈등으로 비화할 위험성이 있어 일정 정도에서 '이 갈등을 끝내야 한다'는, 어떤 힘이 작동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난 이후에는, 전쟁의 양상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쉽게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떤 갈등 즉, 군사 행동이 벌어졌을 때 3개월 안에 수습이 되면 그 전쟁은 끝난다. 그런데 3개월을 넘게 되면, 여러 가지 이해관계 세력이 개입하고 이와 관련한 이권이 어떻게 배분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익이 관철되지 않는 한 우리는 납득할 수 없다'가 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이 현상 유지 차원에서 '스타트 스코어(start score, 득점 시작)'가 된다. 20년간 진행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그랬고, 9년 이상 벌어진 이라크 전쟁이 그랬다.
전쟁을 적극적으로 제어하려고 하는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모두가 '컨스파이어(conspire)'가 된다. 음모는 없지만 공모는 있는 상황. 명시적으로 공모하지 않았지만 힘을 가진 사람 중에는 불행한 사람은 없는, 그저 죽어나가는 러시아 청년들과 우크라이나 사람들만 희생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그런 상황이 됐다. 이해관계 세력의 이해득실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쟁은 내일 당장 끝날 수도 있고, 한없이 계속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원자재·식량에 대한 불안이 가중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예측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끝난다고 해도 전 세계 경제에 상당 기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홍기빈 : 미국의 인플레이션, 물가 인상률은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든 것 같다. 파월 의장 또한 '디스인플레이션이다. 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할 때가 됐다'면서 속도 조절에 나섰다. 이건 어디까지나 외생적인 충격이 더 발생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했을 때 이야기다.
그러나 어떤 충격으로 또다시 유가가 급등하고 천연가스 공급이 막힐지 알 수 없다. 러시아가 지금보다 더한 공격성을 띤 채 무역 질서를 파괴할 수도 있고 반대 진영에서도 그럴 수 있다. 따라서 근원적인 불확실성 요인은 계속 남은 채 전쟁이 어떤 형태로 마무리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중 전쟁설' 또한 프로파간다…튀르키예·인도·일본의 움직임에 주목하라!
프레시안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러 관계뿐 아니라 미중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에 이어 중국의 '정찰 풍선' 논란까지 미중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2025년 미중 전쟁설'까지 거론되고 있는데, 어떻게 봐야 할까?
홍기빈 : 그런 '설' 자체가 프로파간다다. 2025년의 일을 어떻게 예측하나.
러시아와 중국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기본적인 사고 틀이 바로 해묵은 지정학 이론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하트랜드(Heartland Theory)', 즉 '심장지대'에 걸쳐 있는 두 나라가 연합을 하면 미국은 섬이 된다는 주장 아닌가.('심장지대' 혹은 '심장부' 이론은 지정학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해퍼드 존 매킨더(Halford John Mackinder)가 1904년에 출간한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에 처음 등장했다. 국내에서는 <심장지대>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출판됐다.) 100년 된 얘기를 또 들고나와서 중국하고 러시아가 유착하면 미국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갈등 관계이고 말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건 맞지만, 1930년대 파시즘 때처럼 완전히 갈라져서 블록화된 상황과는 다르다. 1934~5년에는 '파시즘 세력과 영미 세력이 전쟁을 벌이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얘기가 팽배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힘을 가진 두 나라 간의 갈등과 견제는 국제정치에서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세계대전 때처럼 블록화 될 것이라는 건 너무 앞선 얘기다. 이런 갈등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최대한 전략적인 유리함을 얻어내겠다는 작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튀르키예나 인도 같은 나라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튀르키예는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일원이고, 인도는 미국이 주도하는 안보협력체 '쿼드(미국·인도·일본·호주)' 일원이다. 이 나라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중국이나 러시아하고 일정하게 관계를 맺고, 또 무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기도 한다. 따라서 굉장히 유동적이다. 만약 튀르키예나 인도가 어느 한쪽으로 붙어버리면, 끝난다. 그러면 진짜 블록이 돼 중립국가가 거의 없는 1930년대와 같은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튀르키예나 인도 같은 나라들은 미국이나 중국 혹은 러시아와도 일정 부분 관계를 가진 채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봐야 한다. 동남아시아와 일본도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나라들은 하나의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나라들이 중간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세력 균형이 바뀔 수가 있다.
'가치외교' 내세운 윤석열 정부의 외교…"아찔하다"
프레시안 : 지금과 같은 예측불허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은 '미국 일변도'라는 점에서 우려를 안 할 수가 없다.
홍기빈 : 제일 불안한 말이 '가치외교'다. 외교에서 '가치'는 중요하다. 전쟁을 불사하면서라도 지켜야 하는 가치가 있기 마련이다. 그걸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얘기해야 하는 발화자, 즉 주체는 대부분의 경우 국가는 아니다.
시민사회라든가 각종 세력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가치를 가지고 최대한 목소리를 내고 이를 어떤 외교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게 외교에서의 '가치'에 대한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서 민간 집단이나 학계에서는 러시아를 저주하고 푸틴을 정죄하고 하는 걸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 해야 된다. 반대로 러시아도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이 가치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느 한쪽으로 줄을 서는 게 아니라 굉장히 유동적이 돼서 '해도에 없는 바다'로 들어가는 상황이다. 따라서 최대한 탄력적이고 유연한 어떤 포지션을 점하는 게 중요한데, 왜 국가가 나서서 '가치외교'를 말하고 있는 건지….
한국이라는 나라의 외교적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치외교' 같은 얘기는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가치외교' 다음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지난해 7월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 관련 브리핑을 하면서 "중국의 대안 시장이 필요하고 시장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유럽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행동을 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미국과 중국의 양국 체제를 가리키는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말이 있다. 차이메리카 시절에 제일 큰 수혜를 본 나라 중의 하나가 한국이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아시아-태평양 시대가 열리는 상황에서 한국이 이 기회를 활용해 자유무역 질서에 적극 편입하고 이를 통해 남북 관계의 긴장도 완화하자는 게 김대중 정부의 노선이었다. 지난 20~30년 동안 민주당 세력의 변하지 않는 외교 노선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바뀌었고 아시아-태평양의 질서라는 것도 불안해졌다. 또 산업적인 면에서 반도체 수출을 놓고 미국과 중국은 완전히 갈라서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지금의 외교 노선은 하나의 색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냉전시대 외교 정책도 안 되고, 김대중 정부의 외교 노선을 고수해서도 안 된다. 지금은 완전히 새로운 판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외교 정책은 하나의 노선으로 일관하는, 단순한 접근법을 유지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군사 안보 등 군사적인 협력 문제도 따로, 경제적인 통상 문제도 따로, 인권이나 가치 문제도 따로다. 다층적인 차원에서 외교를 다변화해야 한다. 쟁점과 문제에 따라서 스탠스를 달리하는 복합적인 외교를 해야 한다.
프레시안 : 국민들이 보기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외교무대에서의 실수도 잦은 편이다. 한국 정부의 외교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의문이 들 정도다.
홍기빈 : 경제 정책과 마찬가지로 외교 정책도 공무원과 관료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정치인들이 방향을 정해 '이렇게 해라' 하고 지시를 내려야 한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책임을 지는 정치인이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문재인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책임질 일을 안 했다.
결국은 정당 정치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지금 외교 정책을 어떤 노선으로 할 건지? 인플레이션이나 고금리 상황에서 경제 정책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정치인들이 책임을 갖고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여도 야도 그런 기능을 하지 않고 있다. 정치가 마비된 상황이다. 언론도 '김건희 특검' 같은 쓸데없는 얘기로만 지면을 채우고 있다.
불확실성 시대에 '감세 정책' 내세운 윤석열 정부…"난감하다"
프레시안 : 윤석열 대통령이 정권을 잡긴 했지만, 이렇다 할 정책 방향이라든가 뚜렷한 어젠다가 보이지는 않는다.
홍기빈 : 윤석열 정부가 하는 경제 정책 중 걱정되는 것은 감세 정책이다. '감세가 투자를 촉진한다'는 것은 근거가 굉장히 미약한 말이다. 특히 지금처럼 불확실성 요인이 클 때는 더 그렇다. 재정을 튼튼하게 해놔도 부족한 상황인데, 감세를 통해 투자를 일으켜 경제를 살리겠다? 이건 20년 전 교과서에 나온 얘기다. 20년 전 교과서에 나온 얘기를 가지고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 들이대고 있다는 게 굉장히 난감하다.
반면교사가 될 두 개의 예시가 있다.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가 지난해 9월 '미니 예산안'을 들고나왔다가 45일 만에 쫓겨났다. 반면 미국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한국에서 전기자동차 보조금 문제만 이슈가 됐지만 사실은 엄청난 증세 법안이다. 증세를 통해 놀고 있는 유동성을 세금으로 흡수해 산업에 투자한 뒤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약값을 내려서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겠다는 내용이다.
똑같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영국은 감세를, 미국은 증세를 하겠다는 것이다. 왜 이런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20년 전 교과서에 나오는 감세 정책을 하겠다는 건지. 윤석열 정부가 정말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문제다.
한국 경제가 처해 있는 문제는 굉장히 복합적이다. 계층 불균형 문제만 해도, 부부 합산 3억 이상의 고부가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부터 100만 원 이하에 불과한 아주 낮은 저부가 가치 노동을 하는 사람까지 다 있다. 한국이 지구적인 가치 사슬망에 깊이 편입된 결과다. 이 같은 격차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
또 한국에서는 부동산이 유일한 부의 저축 수단이라는 점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부동산 외에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경제 전체가 지속적인 '투기적 경제'가 된다. 투자가 활성화된다기보다도 투기적 자산 거품만 일으키는 특성이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다. 우리가 지금 안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는 하나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복합적으로 나타난 여러 가지 원인 때문이다. 이렇게 복합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한 번 크게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대외적인 변수도 있는 데다가 국내적인 복합적인 문제까지, 여기에 적응할 수 있는 대기업이나 경제적인 강자들은 어떻게 살아나겠지만 경제적 약자들은 당분간 고생하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마비된 '정당 정치',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선거 플랫폼'에 불과하다"
프레시안 : 유튜브 방송에서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개의 대립축이 깨지고 있다. 힘을 잃었다"라고 했다.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언급한 것 같은데, 어떤 뜻인가.
홍기빈 : '진영'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보수진영은 '이승만'이라든가 '박정희-박근혜'라는 아이콘이 있고, '시장주의'와 '부동산 활성화', '대북 강경책' 및 '친미 외교' 같은 가치가 공유되고 있다. 범민주진영에서도 '복지를 강조한다'와 같은 합의가 있고. 사실 진영이라는 것은 이런저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뭉친 큰 캠프 같은 것이다. 개개인이 다르듯이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진영이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무너졌다. 이쪽도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없어졌다.
지금 상황을 봐라. 국민의힘 이준석·나경원·김기현·안철수 등 동상이몽(同床異夢) 상태다. 중심이 되는 아이콘도 없고 가치도 없다. 윤석열 정권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는 알 길이 없고, 그게 이준석의 가치와 뭐가 다른지도 알 수 없다. 지지세력 역시 태극기부대부터 중도우파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까지 다 섞여 있는데 서로 서로를 싫어한다.
범민주진영 같은 경우도 '조국 사태'에서 '이재명의 대장동 사태'를 거치면서 무슨 공통점이 있나. 또 정의당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나.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 내건 쟁점들, '기후위기 막아야 한다, 성평등 이루어야 한다, 소수자들 보호해야 한다, 기업이 사회적인 책임을 가져야 한다' 등 전 세계 정재계 인사들이 모인 다보스포럼에서도 얘기하는 내용이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이슈라는 말이다.
프레시안 : 문제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국민 입장에서는 '각자 도생해야 하는구나' 이런 느낌만 받는 것 같다.
홍기빈 : 정당 정치가 마비됐다. 한국 같은 양당 체제에서는 최종적으로는 '이당이냐, 저당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의사를 표현을 해야 하는데, 어떤 당이든 '나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정당 정치가 마비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대의민주주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벌어진다. 정치인들은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100% 자유를 얻게 된다. 그리고는 이익 정치, 차기 당선 가능성만을 염두에 둔 아주 좁은 의미의 이익 정치에만 골몰한다.
비록 정당 정치가 불만족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래도 집단적 토론의 한 형태로 숙의가 가능한 틀인데, 지금의 정당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 자영업자들의 플랫폼에 불과하다. 국민의힘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당선만을 위한 '선거 플랫폼'이라고 보는 게 맞다.
프레시안 : 이런 결과로 민생 어젠다가 사라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더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홍기빈 : 지난 30년 동안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치가 중요하다'는 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그 결과가 집약된, 최악의 책이 2011년에 나온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이기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을 잡아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이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똑같다. 그래서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정권 쟁취에 쏟는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은 뒤에는 엉뚱한 데 책임을 돌린다. '하려고 하는 프로그램이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사회적인 지지 세력이 충분하지가 않아서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핑계를 댄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사회 탓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5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한다. 박근혜 정부도 그랬고, 문재인 정부도 그랬다. 이게 '닥치고 정치'의 한계다.
다르게 말하면, 정치적·사회적 에너지를 모으는 방식이 잘못된 건데, '정권을 잡으면 세상이 바뀐다. 세상을 바꾸려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지난 30년 동안 한국 정치를 지배한 하나의 신화다. 그러다 보니, 선거가 무슨 패싸움이 되어 버렸다.
정권을 잡는 게 먼저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어젠다가 무엇이고, 그 어젠다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힘을 모으고 조직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정치로 나가야 한다. 무조건 정권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한 다른 세력, 시민·사회 역시 반성해야 한다. 보수진영이든 범민주진영이든 마찬가지다. 지금 시민단체를 보고 정당과 무관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 정당 정치는 망했고, 시민운동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해도에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스톤'을 찾아라!
프레시안 : 이 험난한, '해도에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홍기빈 : 바이킹들이 배를 타고 가다 해도에 없는 바다에 이르렀을 때는 '선스톤(Sun Stone)'이라고 하는 반투명의 장석류인데, 이 썬스톤을 이용해 해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한다. 지금이 해도에도 없는 바다 위에 표류한 바이킹과 같은 상황이다. 살아남기 위한 좌표를 찾아야 한다.
특히 '선스톤'과 같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자신만의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한다.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내 마음'. 그러니까 '내 마음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게 바로 '선스톤'이다. '나'를 확장하면 '우리'가 된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우리에게도 소중한 무엇이 되지 않겠는가. 가장 근본적인 가치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음으로, 허무·고독·불안으로 산업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비인간화가 돼 서로 싸우는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이때 해야 하는 고민은 '어떻게 사는 게 정말 좋은 삶이냐?'라고 하는 질문이다. 그 결과를 놓고서 미중 갈등 및 우크라이나 문제, 그리고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문제를 바라봐야 자신의 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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