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는 '국가'가 본연의 책무를 이행하지 못해서 발생한 참사로, 경찰뿐만 아니라 지자체, 행정안전부도 이번 사태에 관한 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날선 비판이 법조계와 시민단체로부터 나왔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8일 서울시 서초구 민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참사 후 지자체와 행안부가 '주최자가 없는 행사'라는 등의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오민애 민변 '10.29 참사' 대응 TF(이하 TF) 공동간사 변호사는 △용산구가 이미 3년 전 핼러윈 축제 당시 이태원 거리에 밀집한 인파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점 △10월26일 상인회 등 유관기관과 간담회를 진행한 후에도 용산구가 안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점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후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이미 예상되었던 점 등을 보아 "주최단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자체가 관련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오 변호사는 '재난 안전관리 기본법(이하 안전관리법)'과 동법에 기반한 지자체 조례 등을 고려할 때 안전 주무부처 장관과 서울시장, 용산구청장에게는 재난예방조치 의무와 응급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됐음에도 이들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이는 법률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재난이 예상되는 상황에 미리 안전대책을 세우거나, 시민이 밀집한 후에는 현장에 대피명령, 통행제한 등의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이 같은 책무 이행 상황이 없었다는 지적이다.
"행안부·서울시·용산구 법적 책임 뚜렷"
특히 안전관리법 중 '지역축제 개최 시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하고 안전관리에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66조의 11)'는 조문의 존재 이유가 '안전 문화 진흥'임을 고려할 때, 해당 법은 주최자가 있는 경우에만 주무부처 장관이나 지자체장 등에게 안전 관련 조치 의무를 부여한 제한 규정으로 볼 수 없다고 오 변호사는 주장했다. 주최자가 없는 경우에도 안전을 위한 조치를 강구할 책임이 단체장 등에게 부여된다는 뜻이다.
오 변호사는 "법에서 지역축제를 언급한 이유는 지역축제의 경우에만 안전조치를 취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자체의 '안전 문화 진흥' 의무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며 "현재까지 나온 상황만 보더라도 서울시와 용산구가 안전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데 따른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행정안전부 또한 지자체의 안전대책을 점검 및 관리하지 않은 점에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오 변호사는 판단했다.
국가배상책임 역시 명백하다는 해석이 내려졌다. 법원 및 헌법재판소 판결을 고려할 때 "반드시 법령에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및 공무원은 국민의 생명·신체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포괄적 의무"를 지기 때문에 안전 대책 및 응급조치 위반 등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창민 TF 공동간사 변호사는 "경찰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이미 핼러윈 대책을 세운 바 있었음에도 올해는 안전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참사 직후에도 안전 관리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업무상과실치사죄가 성립한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아울러 "현장 출동 경찰관이 위험 발생을 인지했음에도 상부에 기동대 요청 등을 하지 않은 점이 확인되거나, 현장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상부가 시위 등의 이유로 경비인력(기동대)을 의도적으로 출동시키지 않았다는 점이 인정되면 직무유기죄가 성립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직권남용죄와 증거인멸죄 성립 가능성도 제기됐다. 참사 전 인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취지의 보고서가 올라왔지만경찰 상부가 삭제를 지시했다면 "정보를 삭제할 의무가 없음에도 정보 삭제 의무를 부과했다는 점에서 직권남용이며, 인파 운집 위험성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증거인멸죄"라고 이 변호사는 주장했다.
"과거 해외 참사 사례와 유사…사후 법적 판단도 유사할까"
인파 운집에 대한 안전 대책을 세우지 않고, 사고 후 조치가 미흡했던 점에 대해서 정부 및 유관기관이 책임을 졌던 해외 사례도 제시됐다.
1989년 영국 잉글랜드 셰필드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94명의 관람객이 압사한 사건에 대해 영국 법원은 "팬들의 안전을 확보해야 할 당시 경찰 책임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明石)시 불꽃축제 당시 인파 운집으로 11명이 사망한 사고에 대해 일본 법원은 혼잡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정 등을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효과적인 방안이 강구되지 않았고, 일선 경찰관으로부터 기동대 출동 검토를 요구하는 취지의 보고를 받았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 공무원과 경찰 간부, 경비업체에 업무상 과실치사상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법원은 피해자 및 유족들이 이들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도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양성우 TF 공동간사 변호사는 위 사례를 제시하며 "영국의 경우 배심원들이 사고 전 경찰이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지 않았고, 사고 후에도 비상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시했다"라며 경찰의 사전 대책이 없었고, 참사 전·후 기관 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참사가 유발·확대된 점을 미뤄 보면 "힐스버러 참사는 이번 이태원 참사와 원인과 사후 정부 대응이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양 변호사는 일본 아카시시 사례에서도 "참사 발생 직전에 경찰 신고가 수차례 있었을 뿐 아니라 기동대 등 추가인력 요청이 이루어졌지만 경찰·소방 등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경찰이 많은 인파로 인한 재난 및 안전사고 등에 대비하기 보다는 폭주족 또는 마약 대비 등 다른 목적에 보다 집중함으로써 안전사고 등에서 경찰인원이 제대로 배치되지 않은 점" 등이 이번 참사와 상당수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이상민 장관, 정치적 책임 져야"
정부가 법적 책임을 넘어 정치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상희 참여연대 공동대표는 "법적인 책임만 물으면 가장 근접한 자리에 있는 말단 행정직만 책임을 지는데, 이러면 재난 처리에 필요한 재발방지나 넓은 의미의 피해 보전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며 "재난이 발생하면 반드시 재난에 대한 정책 결정권을 가지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책임 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특히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해서 "경찰·지자체 대책에 대한 궁극적인 통할 권한은 행안부에게 있다"라며 "재해안전관리법상 행안부의 권한 등을 고려했을 때도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임의 귀착점은 행안부 장관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참사 피해자가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태호 4.16연대 집행위원장은 알 권리, 피해자 참여권 등 "피해자의 권리가 무참하게 침해받고 있다"라며 "참사 초반 행안부 장관이 '사회적 책임이 아니었다'고 선언하면서 생존자와 실종자는 비난과 혐오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라고 비판했다.
이 위원장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대해 '순수한 피해자 답지 않다'라거나 '재난의 정치화'라는 말도 나온다"라며 "피해자들이 모이는 것이 정치라면 그 정치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참여연대와 민변은 향후 참사 피해자를 위한 법률 지원과 함께 증거보전신청 등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하주희 민변 사무총장은 "피해자 유족이 대리인 요청을 해왔다"라며 "향후 피해자를 위한 모든 법률적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안전대책 필요 보고 문건 삭제 지시 등 증거 인멸 우려가 있어 증거보전신청을 한 후 순차적으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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