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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머니가 나를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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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머니가 나를 잊어버렸다

[그녀들의 맛있는 한의학] 19화. 나를 잊고 잃어가는 병, 치매.  

"건망이란 일을 할 때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고, 말에 앞뒤 분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병이지,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어 사리 분별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戴氏曰, 健忘者, 爲事有始無終, 言談不知首尾. 此以爲病之名, 非生成之愚頑不知人事者."

-동의보감 내경편 권1 신(神) 중에서

"망각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 -니체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3년 정도 전이었다. 몸이 아파서 오긴 오지만, 해가 갈수록 한의원에 오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셨다. 그러다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 사태로 할머니의 내원은 중단되었다.

가끔 따님에게 안부를 물으면 치매 증상이 조금씩 더 진행되고 있고, 고집은 더욱 세어졌으며, 집 밖으로 나서려지를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살살 달래서 햇볕도 쬐고 바람도 쐬면서 집 앞이라도 걷게 하시라고 당부했다.

얼마 전 따님이 조심스레 왕진이 가능한지 물었다. 할머니가 이전부터 허리가 아프다가 요즘 들어 부쩍 더해져서 밤에 잠을 못 주무실 지경인데, 병원에 모시고 가려고 해도 꿈쩍도 안 하신다고. 오실 때마다 너무나 밝게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라 다음날 낮에 방문하기로 했다.

점심을 조금 일찍 서둘러 먹고 지도 앱을 켜 댁에 가보니, 요양보호사분과 함께 계신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누구냐고, 자기는 아프지 않은데 왜 왔냐고 하시다가, 마침 걸려 온 따님 전화에 역정을 내신다. 그래도 왔으니 할머니 어디 아픈지 한번 보고 갈게요 했더니, 또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가 아프시다고.

두 분께 번갈아 가며 기본적인 사항을 체크하고 침을 놓는데,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하셔서 가만히 손으로 굳은 근육을 풀어드리니 시원하다고 하신다. 벽에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조랑말을 타고 있는 할머니와 칠순을 맞아 곱게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걸려있다. 내가 기억하는 밝게 웃으시던 그때의 모습으로.

고도성장과 선진국 진입의 이면에는 초고령 사회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고, 산업화 시대의 일꾼으로 열심히 살았더니 늙어버린 분들. 국가 발전의 수혜가 고루 미쳤으면 좋으련만, 거기서 밀려난 대다수의 노인들이 소진한 몸과 막연한 원망과 화를 품고 오래, 그리고 자주 아픈 노후를 보낸다.

노화에 따른 질병 중 어르신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바로 치매(癡呆)다.

한자 '치(癡)'는 병을 의미하는 '병들어 기댈 녁(疒)'자와 의심을 의미하는 '의심할 의(疑)'자로 구성된다. 여기서 '의(疑)'자는 한 사람이 지팡이를 든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 즉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모습에서 나온 글자라고 한다.

치매를 나타내는 영어단어 'Dementia'의 어원 역시 down을 의미하는 'de'와 mental을 나타내는 'ment' 그리고 병명에 사용되는 접미사 'ia'가 결합한 단어로, '정신 기능이 저하되는 질병'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동서양 모두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는 병을 치매라고 본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치매라는 병명은 등장하지 않지만, 정신 기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神)' 부분의 '건망'에 대한 설명에서 치매에 대한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잠시 깜빡하는 건망증과 달리 보감에선 '건망'을 '어떤 일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 심력을 다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볼 때 동의보감의 '건망'에는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증상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치매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뇌 기능의 손상이 일어나면서 발생하는 질환으로, 그중 절반 이상이 뇌세포의 퇴행성 변화에 의한 알츠하이머형 치매다. 그리고 알츠하이머형 치매 환자 중 여성이 남성보다 2배 이상 많다.

여성 치매 환자가 더 많은 이유로는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긴 것과 남성과 여성호르몬 등을 꼽는다. 뇌의 퇴행성 변화로 인한 질환인 만큼 오래 살수록 그 위험성이 높아지고, 폐경 이후 뇌 신경 세포에 대한 보호작용을 하는 여성호르몬이 부족해지면서 치매에 더 잘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이야기 한 것처럼 '기(氣)적인 존재'로서의 여성의 특징이 더해진다고 생각한다. 감정적인 부분에 보다 섬세하고 잘 반응하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서 받게 되는 감정적 스트레스가 기의 흐름에 문제를 일으키고, 이것이 뇌 신경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본다. 실제 우울증 환자의 비율만 봐도 여성이 남성보다 많고, 우울증과 그에 따른 약물의 복용은 치매의 위험성을 높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뇌의 노화가 전체적인 노화 현상의 일부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치매의 예방과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몸은 물론 감정과 정신이 빨리 늙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몸의 노화는 물리적으로는 바로 서는 직립의 구조가 무너지는 것과 신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만성 염증에 초점을 둬야 한다. 감정적으로 가장 나쁜 것은 시큰둥함이라고 생각한다. 호기심을 잃고 오늘을 어제처럼 살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것이 어쩌면 분노나 우울보다도 더 나쁠 수 있다. 정신에 있어서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더 깊어지거나 확장되면서 성장하는 기쁨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큰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세부적인 부분을 살펴야 한다. 뇌에 좋다는 특정한 식품이나 약물은 작은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큰 흐름을 바꾸지는 못한다. 흐름의 변화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시작된다.

공중보건의 시절 동네 할머니 두 분이 베드에 누워서 나누시던 대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암은 두렵지 않아, 그냥 팍 죽어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치매는 절대 걸리지 말아야 혀. 나도 못 할 짓이고 자식도 못 할 짓이여."

치매가 두렵다면 몸과 감정과 정신을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바르게 서고 걷고 달릴 수 있는 몸, 춤추는 감정 그리고 성장하는 정신을 놓치지 않아야 치매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고은정

그녀들을 위한 레시피 : 연잎수육 

-고은정 약선음식전문가

나이가 들면서 하루하루가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그래서 매시간이 소중하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지낸다. 그 노력 중에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중에 가장 큰 노력은 치매라는 친해지고 싶지 않은 단어로부터 나를 멀리 떼어 놓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니 아침마다 눈을 뜨면 바로 차를 마시고, 중학교 1학년 시절에나 배웠을 외국어를 10분쯤 공부하고, 정해 놓은 책 한 권을 가져다 소리 내서 한 페이지 읽는다. 가능하면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상관없이 잠시 시간을 만들어, 손글씨도 한 페이지 정도 써본다. 어찌 생각하면 나 스스로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듯, 혹시라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나를 잃어버리고 나를 잊을까 하여 안간힘을 쓰는, 조급해하는 어설픈 몸짓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나는 치매에 대해 걱정을 넘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지낸다. 왜냐하면 치매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나신 시어머니 가까이서 보낸 10년을 훌쩍 넘는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것으로 치매에서 멀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렇지 않으니 다른 노력도 해야 한다. 그 노력 중의 또 하나가 끼니를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는 것이다. 거르지도 않지만 가능하면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다.

머리가 맑아지도록, 또 내가 살아내는 시간들이 온전히 향기롭도록 기원을 담아 연잎을 한 장 뜯어다 돼지고기와 삶는다. 물 1L, 된장 1큰술, 마늘 5쪽 ...... 재료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챙기는 일도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일과 다르지 않다. 조리의 모든 동작이 모두 나를 잃지 않고 잊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다.

조리가 끝난 연잎수육을 앞에 놓고 앉아 젓가락을 들기 전, 나는 아직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부터 챙기며 안도한다.

<재료>

덩어리 돼지고기(통삼겹살 혹은 앞다리 사태) 1kg

물 1L, 연잎 1장(小), 된장 1큰술, 마늘 5쪽, 대파 1뿌리, 양파 1/2개, 통후추 1작은술, 생강 10g, 청주 1/2컵

<만드는 법>

1. 1L의 물에 연잎 1장, 된장, 마늘, 대파, 양파, 통후추, 생강을 넣고 끓인다.

2. 물이 끓기 시작하면 덩어리 돼지고기를 넣고 청주를 넓게 뿌려 넣는다.

3. 뚜껑을 덮고 40분간 삶고 10분간 뜸을 들인다. 젓가락으로 찔러보아 핏물이 올라오지 않으면 익은 것이다.

4. 고기를 꺼내 잠시 식힌 후 한입 크기로 썰어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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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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