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를 해치는 화는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욕망과 감정에 의해 일어난다. 크게 화를 내면 화가 간에서 일어나고, 취하고 배부르게 먹으면 화가 위에서 일어나며, 성생활이 과하면 화가 신장에서 일어나고, 슬픔과 서러움이 지나치면 화가 폐에서 일어난다. 심장은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곳에서 화가 일어나면 죽는다.
藏府厥陽之火 根於五志之內 六慾七情激之 其火隨起 大怒則火起於肝 醉飽則火起於胃 房勞則火起於腎 悲哀則火起於肺 心爲君主 自焚則死矣."
-동의보감 잡병편 권3 화(火) 중에서
80세 남편을 둔 70세 할머니의 하소연이다. 30년 넘게 남편 병구완을 하느라 속이 다 타버린 환자(할머니)의 마음은 괴로움 반 걱정 반이다. 남편 몸은 분명 좋지 않은데 이상스러울 정도로 부부관계를 요구하니 남부끄러워서 어디다 말도 못 하고 죽을 맛이라고 한다.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피니 한의학에서 말하는 음허화동(陰虛火動)의 상태다. 초가 타다가 거의 다 탈 무렵에 불꽃이 갑자기 커지는 것처럼, 몸은 무너져 가는데 성욕만 과항진된 상태다. 이때의 성관계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소진하는 것으로, 한의학에선 이를 엄격하게 금한다. 할아버지는 복용하는 약물들이 많아서, 주치의에게 처방 약과 관련해서 상담받을 것을 권하고 허화(虛火)를 내리는 치료를 했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는 오랜 기간 할아버지의 건강을 살피느라 가슴의 울화(鬱火)가 타고 또 타서 몸이 다 밭고, 이제는 우울할 힘도 없이 원망과 체념만 남은 상태다.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숨을 쉬며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다고 하신다.
두 분을 진료하면서 부부란 무엇일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이란 자신을 태우며 세상에 작은 흔적을 남기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흔적의 대부분은 금세 사라지거나 잊히고 말지만 말이다.
한의학에서 화(火)는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과하면 내 생명을 잡아먹는 양면성을 가진다. 사람이 살면서 화를 내고, 때론 슬프고 서럽기도 하고, 가끔은 술도 마시고 배부르게 먹기도 하고, 성생활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인간적인 일이다. 만약 누군가 이런 욕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할 수는 있어도 친구로 사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하거나 너무 오래 지속되면 몸과 감정과 정신은 병든다. 적당한 불은 물을 끓이고 밥을 짓지만, 불이 너무 세거나 불을 끌 때를 놓치면 물이 졸고 밥은 타고 심하면 솥까지 못 쓰게 되는 것과 같다. 의서의 '소화생기(小火生氣) 장화식기(壯火食氣)(작은 불은 기를 살리고, 센 불은 기를 먹어 치운다)'란 말은 이런 현상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불을 잘 다루는 일이다. 정당한 분노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지만, 과한 분노는 나와 남을 상하게 하고, 관계를 망치고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슬픔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고 내면을 정화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몸과 정신을 좀먹는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몸을 가진 존재에게 마땅한 즐거움이지만, 탐닉하다 보면 장부가 상하고 정신이 망가진다.
불을 잘 다루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요리사와 도공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맛있는 밥을 짓고 멋진 자기를 구워내는 것처럼, 내 안의 화를 다루는 것에도 의식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당연히 실수도 하고 엉망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불의 색깔과 온도를 조금 더 알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몸과 마음에 화상을 입는 정도와 횟수가 줄어들 것이다. 어차피 우리 삶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아서 떨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치명적 부상을 입지 않고 다시 줄 위에 올라 끝까지 갈 수 있다면 괜찮은 인생일 것이다.
부처님은 '인생은 고해(苦海)고 세상은 화택(火宅)'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속에도 기쁨이 있고 여름날 소나기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살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기쁨과 소나기 같은 일을 조금 더 많이 만드는 정도가 아닐까. 마음속 화기(火氣)를 화기(和氣)로 바꾸는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 확률을 조금은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을 위한 레시피 : 고추간장
최근 화가 극에 달해 숨을 잘 쉬지 못할 정도에 이른 적이 있다.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느낌 때문에 이러다 내가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아주 천천히 숨을 쉬면서 기분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아무리 해도 화가 삭지 않아 힘든 중에, 마침 친구가 찾아와 속에 있는 말을 두서없이 마구 해대었다. 친구는 내 얘기를 들으며 그런 미친 사람들이 있나, 아니 너한테 왜 그러냐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고 나는 약간의 위로를 받았다. 내 감정은 감정이고 찾아온 친구에게 밥은 먹여서 보내고 싶어졌다. 마침 냉장고에 있던 죽순을 좀 썰어 넣고 밥을 지었다. 그리고는 매운 고추를 잔뜩 꺼내 다져서 고추간장을 만들었다. 평소에는 매운 거와 안 매운 거를 반반씩 넣고 만들었지만 그날은 매운 고추만 잔뜩 다져 넣고 만들었다.
냉면대접에 밥을 담고 고추간장을 넣고 비볐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으니 멸치와 들기름이 간장과 만나 내는 짭조름한 감칠맛이 기가 막혔지만, 매워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매운 숨을 후후 내쉬면서도 중독된 사람처럼 다시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입에 넣게 되는 맛이었다. 그러는 동안 묘하게 감정이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어느 순간 친구와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후후, 후후 숨을 내쉬는 동안에 내 안의 화가 숨을 타고 밖으로 나가 나는 평정심을 찾은 것이다.
고추간장은 매워서 뜨거웠지만 내 안의 화를 식히는 한줄기 소나기가 되어 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재료>
국물멸치 1컵, 청양고추 10개, 풋고추 10개
현미유 1큰술, 들기름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물 1/2컵, 간장 4큰술, 조청 2큰술
참기름 1/2큰술, 통깨 약간
<만드는 법>
1. 멸치는 머리와 내장을 제거하고 기름기 없는 프라이팬에 넣어 볶은 후
잘게 부숴 놓는다.
2. 고추는 깨끗이 씻어 4등분하여 다지듯 잘게 썬다.
3. 달군 프라이팬에 식용유와 들기름을 순서대로 두른 후 다진 마늘을 넣고 볶는다.
4. 마늘 향이 밴 기름에 손질한 멸치를 넣고 볶는다.
5. 멸치가 골고루 볶아지면 잘게 썬 고추를 넣고 같이 볶는다.
6. 5의 재료에 물 1/2컵을 넣고 자작하게 끓이면서 간장과 조청으로 간을 한다.
7. 참기름과 통깨로 마무리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