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하고 있다. 민주주의, 통일, 기득권 타파 등 거대담론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정치의 시대가 됐다."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최근에 정계은퇴 선언을 하면서 꺼내 든 말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현재 우리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성찰하며 던진 말일 것이다. 정치는 이제 진보, 보수, 정치 민주화를 넘어 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질을 높이는 복지국가를 추구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정치의 담론이여야 하고 생활정치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진보·보수를 넘어 복지국가의 길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빠른 기간에 이룩한 한국은 서양의 250년 된 자본주의를 60년의 짧은 기간 동안 축약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유엔에 의해 선진국이 되었다는 인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짧은 기간의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군사정부와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리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성취했고 고도의 경제성장은 이루었지만, 국민의 '삶의 질' 측면에서는 한참 부족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은 무조건적으로 우선시 되었고, 안정적인 복지와 분배는 경제가 안정된 이후 나누어야 할 가치로 철저하게 후순위로 밀렸다. 재벌과 거대 산업자본에 경제 활동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면 그로 인한 부의 성장이 부의 분배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수 효과는 실패했고 소득불평등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오히려 복지와 분배를 선순환시키며 소득 격차를 줄이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정책을 추진한 북유럽 국가들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고 있다. 유럽 각국이 시도한 복지국가의 체제는 공공투자를 통해 수요를 증가시키고, 일자리 창출과 동시에 사회 보장과 사회 복지를 확충했다. 그 과정에서 양극화도 해소해 나갔다. 특히 스웨덴은 복지국가의 제도 및 정책들이 경제성장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복지, 고성장의 동시 실현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국가, 미국도 유럽 복지를 따라간다
지난 해 미국 의회는 "우리가 그동안 걸어온 길은 극소수 사람들에게 부의 집중을 초래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생존 투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다른 길을 시도해야 할 때" 라며 빈곤해결을 위한 국가 정책 마련에 나섰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인들의 삶에 '임신에서 노년까지' 영향을 미치는 복지제도를 근본부터 유럽식으로 완전히 바꾼다는 계획으로 향후 10년간 3조5000억 달러(약 4050조 원)의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해 사회안전망을 대대적으로 확충·재정비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미국의 가장 중대한 사회안전망의 확대로서 자녀에 대한 세액 공제의 형태로 매달 소득보조금 지급, 노인 소득보조, 간병인 훈련 프로그램, 근로 재교육 기회 증가, 노약자를 위한 공공의료보험와 각종 세금 공제 혜택을 확대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사회의 노인 빈곤 현실과 원인
'3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듯, 한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 고령화, 중산층의 붕괴, 일자리 감소 문제는 미국 사회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소득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소득양극화 격차는 더 벌어졌다. 특히 노인은 한국에서 가장 소득불평등을 심하게 겪는 집단이다. 정부는 우리나라의 소득양극화 지표가 나빠진 원인은 고령화 때문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우리 사회 전체의 소득불평등 완화와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우선 과제는 심각한 노인빈곤의 해결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국내 연령대별 빈곤율을 보면 65세 이하의 상대적 빈곤율은 평균 10% 정도이다. 65세 이상의 빈곤율은 약 45% 이다. 노인층의 빈곤율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4배 이상 높다. 66세 이상 75세 미만은 34%, 75세 이상은 55.6%로 연령이 높아질수록 빈곤율도 올라간다.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다. 그런데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원래 높았을까? 아래 표를 보자.
표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상식적이라 믿고 있는 것은 '복지 선진국인 북유럽 국가들의 노인 빈곤율은 상당히 낮다'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는 맞고, 다른 한편으로는 틀렸다. 이들 국가에서 복지 혜택을 받기 전 노인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보다 빈곤율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놀랍게도 그렇다. 한국에서 노인들의 소득이 더 높다. 이런 면에서 북유럽보다 한국의 빈곤율이 높다는 추측은 틀렸다. 그런데 국가의 복지혜택을 받은 후, 즉 연금, 수당 등 공적 소득이 이전된 다음에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노인기초연금 등 공적이전 소득을 지급한 후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유럽에 비해 급격히 높아진다. 그와 달리 프랑스는 노인빈곤율은 85.9%인데 소득재분배 후 3.6%로 급격히 감소한다. 독일은 80.8%인데 9.1%가 된다. 80~90%에 육박하던 빈곤율이 공적 소득 이전 후 무려 한자리 수 비율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59.9%의 빈곤율이 43.4%로 약간 감소하는데 그친다. 우리나라가 프랑스, 독일, 스웨덴보다도 노인빈곤율이 낮았는데 소득재분배 후에 다른 국가보다 빈곤율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노인 빈곤의 주원인은 정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 등 공적이전 소득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노인의 연금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노인 단독가구의 경우 11.9%, 노인부부가구도 소득의 22.5%에 불과하다. 이는 2003년 기준 공적연금 소득이 90.6%를 차지한 네덜란드, 프랑스(88.5%), 독일(86.7%), 스웨덴(85.9%), 이탈리아(81.1%), 영국(72.1%), 아일랜드(62.9%)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우리나라는 노인소득을 위해 지금보다 3배는 지출해야 OECD 평균 정도에 달한다. 이 정도는 늘려야 노인 빈곤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 결국 노인의 가난은 본인 자신의 소득이 적어서만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 실패로 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노인 개인의 책임으로, 부양자녀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 원인은 국민연금의 늦은 도입과 낮은 소득대체율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20년 OECD 회원국 의무가입 연금제도의 평균 소득대체율은 51.8%인데 반해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31.2%로 OECD 38개국 중 34위로 완전 하위권이다. 2020년 국민연금 평균액 54만 원과 기초연금 30만 원을 합해도 최소생활비에 미달하고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소득대체율을 합해도 우리나라 공적연금의 보장성은 여전히 OECD 하위권이다.
기초연금 확대로 노인소득 강화해야
현재 노인의 빈곤은 노후보장제도의 중심인 국민연금의 낮은 보장성과 사각지대로 인함이 크다. 이미 노인이 되어버려 국민연금 제도에 새로 진입할 방법이 없는 현재 노인에게 국민연금 개혁은 빈곤을 벗어날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인 수당 성격의 기초연금 인상과 확대로 노인소득을 강화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다. 사회보장정책 중 사회수당이 재분배 효과가 가장 크고 사회수당 가운데에서도 불평등 완화 효과가 큰 것은 기초연금이다. 기초연금은 노인 중 소득하위 70%에게 지급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실 수급률은 58% 정도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의해 중위소득 이하에게 지급하는 생계급여(54만8349원, 2021년)를 받는 저소득층 노인 약 50만 명은 기초연금 수급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기초연금 비혜택자로 분류된 상위 30% 노인층에도 비록 일부 자산이 있어도 매월 일정한 실소득이 없어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지역의 노인정에 들르다 보면 기초연금 때문에 어르신끼리 다투는 모습을 종종 본다. 한 할머니가 "내 평생 고생해서 죽은 남편이랑 조그만 집 한 채 달랑 있다. 변변한 수입도 없는데 어째서 나한테는 기초연금을 안 주느냐?" 내게 말씀하시니 옆에 듣고 계시던 할머니가 "당신은 집고 있고 자식도 있잖아. 나같이 집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이나 받아야지 별걸 다 욕심낸다"며 쏘아붙이신다. 그러자 "자식새끼 하나 있는 게 돈도 제대로 못 벌어서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데 자식이 뭔 소용 있어.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까 빨리 말린 적이 있다.
집이 있으나 수입은 거의 없는 노인 중에는 라면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집은 처분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언제까지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 자산을 월 소득으로 생각하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지난 국정감사에서 노인 100%에게 기초연금 30만 원을 지급하고 연금액을 지속적으로 올리는 법안을 대표 발의하였다. 현재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상태다.
또한 노후소득보장 강화 방안을 시급히 마련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기초연금 확대를 제안했다.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과감히 정책을 도입할 수 있는 기회다. 지난 대선에는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인 소득불평등과 양극화, 코로나19로 인해 불안한 국민의 삶 곳곳에 사회안전망을 깔아놓는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초연금 인상 제안 시 재정 소요가 크다는 반론을 늘 받아왔기에 대통령의 비전과 철학으로 공약에 넣어서 과감히 추진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내심 컸다.
재정만 약간 더 뒷받침된다면, 소득구분 없이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50만 원 정도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싶은 게 나의 소신이자 소망이다. 실제 나의 100% 노인대상 기초연금 대표발의 법안도 참조하여, 대한 노인회에서 이번 대선국면에서 각 후보들에게 요구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증세가 어려운 현재의 재정상태도 고려하고, 민주당 대선캠프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성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조정안을 만들어 캠프에 제시했다. 65세 이상 노인을 70세 전후로 구분하여 달리 적용하는 안이다. 노인의 건강나이가 상승하기에 이를 고려하여 예산의 실효성을 높이는 안이다.
65세 이상 하위 70% 40만 원 안에 10조 원가량 예산이 소요되기에 5조 원 정도를 추가 편성하면 된다.
재정 소요의 부담을 완화할 수 있고 노인 연령을 상향 조정할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있었기에, 연령을 조정하여 100% 노인에게 똑같이 지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는 단초를 마련하기위한 제안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재정소요 부담, 100% 지급에 대한 인식 통일 부족 등의 이유로 현 상태인 65세 이상 하위 70%에게 40만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공약이 정해졌다. 이 안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같이 제안한 공약이 되었다. 10만 원 인상 공약은 이뤄졌지만, 지급대상을 노인 100%로 확대하지 못한 점은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노인은 차별 없이 보편적 복지로 지원해야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노인에게 예산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가난을 참으라고 할 것인가. 노인은 지금의 선진국을 만든 주역이 아니었던가. 노인이 노인이 된 것은 노인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 노인은 대한민국이 일어서는 것보다 잿더미에서 장미가 피는 게 빠를 것이라는 나라를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로 만들었다. 일 밖에 모르는 사람,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던 사람. 그들이 지금의 노인이다.
근로 능력이 없는 노인은 아동과 같이 사회적 위험에 처한 취약계층이기에 보편적 복지 형태로 지원해야 한다. 아동은 부모라는 보호자라도 있지만, 노인은 보호자가 국가밖에 없는 최하 사회적 취약층이다. 기초연금은 단순히 노인 빈곤만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비용으로 보면 자녀의 부담을 줄여 자녀 소득을 높게 만들어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 노인소득 문제는 우리 공동체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는 현재 노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현재 청장년들의 머지않아 닥칠 미래의 문제이다.
스웨덴, 핀란드 등 고성장 고복지를 실현한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국민과 노인을 대상으로 50~60년간 차별 없는 복지를 실현해왔다. 스웨덴은 이미 2014년 노인 수가 전체 인구의 20%를 초과했지만 2018년 기준 노인빈곤율은 10.9%이다. 핀란드는 6.5%, 독일은 9.1%이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이 43.4%인 것과 크게 대조된다.
기초연금액의 상승이나 100%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는 방식이 국민연금과의 연계 문제를 일으킨다는, 즉 기초연금 인상이 국민연금을 무력화한다는 반론을 받는다. 보편적 복지형태의 기초연금이 재정을 악화시키고 양극화 해소를 더디게 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얘기 했듯이 노인들에게는 국민연금 사각지대도 많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이 미미하다는 사실로 인해 절대적, 상대적 빈곤층이 많이 양산된다. 따라서 향후 대한민국 노인들의 전반적인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러 안정되기까지는 보편적 노인수당, 즉 100% 모든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형태로 기초연금을 지속적으로 인상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보편적 지급과 급여 인상으로 소요되는 재정 투입을 일방적 예산낭비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수요창출로 인한 경제효과를 같이 보아야만이 균형 잡힌 시각이 될 수 있다. 빈곤율이 높은 노인들에 대한 보편적 기초연금은 대부분 소비로 연결되어 구매력을 높인다. 또한 소득이 안정된 계층에 대한 무차별적 수당은 소득재분배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지만, 사회적 위험 계층이나 복지수요가 강하게 요구되는 아동, 노인, 장애인, 실업자, 환자 층에 대한 보편적 복지는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소득재분배에 기여하게 된다. 북유럽이 보편적 복지 정책으로 양극화를 해소해나가는 과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상위 30% 노인에 대한 기초연금 지급은 사각지대 해소와 노인 전반의 소득 상승을 이끌려는 것이다. 자산이 많거나 소득이 있는 노인들은 어차피 다양한 형태의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보편적 복지는 모든 국민에게 복지 혜택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삶의 안정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금 부과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약화시켜 장기적으로는 세수 증가에 기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노후보장 안전망을 위해서는 보편적 형태의 기초연금을 노인소득보장 피라미드의 1층 계단으로 단단히 까는 것이다. 그 위에 국민연금, 퇴직연금 등의 계단이 쌓여 다양한 형태의 안전망이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캐나다 모델이 이에 근접한다.(매달 모든 노인에게 약 65만 원의 노인수당 지급) 노인은 보편적 복지의 대상이다. 노인에게 닥치는 사회적 위험은 공동체의 책임이다. 아동이 공동체 책임이기에 조건 없이 아동수당을 지급하듯, 노인도 조건 없이 기초연금을 지급해야 한다. 노인의 소득 안정화를 위한 기초연금 제도 재정비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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