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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과 룰라, 노동 운동에서 정당 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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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과 룰라, 노동 운동에서 정당 정치로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㊻]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 룰라 다 시우바 中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시리즈 모아보기)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part 3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㊳ 들어가는 글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건 창조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바로가기)

㊴ 넬슨 만델라 上 27년 6개월의 투옥, 교도소의 핵인싸가 되다(☞바로가기)

㊵ 넬슨 만델라 下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우분투!(☞바로가기)

㊶ 레흐 바웬사 上 공산당은 한국에서 과연 좌파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바로가기)

㊷ 레흐 바웬사 下 폴란드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흔적과 마주치다(☞바로가기)

㊸ 살바도르 아옌데 上 (☞바로가기)

㊹ 살바도르 아엔데 下 (☞바로가기)

㊺ 룰라 다 시우바 上 (☞바로가기)

(노동)운동에서 (정당)정치로 : "해결책은 외부에 있었다"

삶의 여정, 인생의 전환점 : '선반공 룰라'와 '용접공 노회찬'

인생이란 묘한 우연에 좌우되는 경우가 있다. 또 삶의 전 여정에서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뜻밖의 장소에서, 여러 방식으로 인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을 맞이한다.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어디서 올지 미리 알 수는 없지만, 그 전환점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

룰라와 노회찬의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어떤 상황이었을까? 그 '전환'은 "행복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두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줬을까?

"그의 삶은 브라질의 현대사 그 자체이자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거울이요, 이제 1억 7천만 브라질 국민의 희망이자 상징이 됐다." (박원복, 「역자 서문: 브라질의 희망, 룰라를 소개하면서」, 브리뚜 알비스, 박원복 옮김, <브라질의 선택 룰라: 금속노동자에서 대통령으로>, 가산출판사, 2003)

그의 이름은 룰라였다.

▲EBS 지식채널e '눈물의 룰라 1부'(2011.1.22.) 화면 갈무리

상파울루의 거리에서 행상과 구두닦이로 밥벌이를 하다가 금속공장의 평범한 선반공으로 취업한 룰라는 공장에서 산업재해로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룰라가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첫 번째 아내가 간염에 걸려 병원에 갔지만 돈을 먼저 요구하는 의사 때문에 치료도 못 받고 뱃속의 8개월 된 태아와 함께 사망하게 된 데서 온 충격과 상처였다. 아내의 병은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악화된 것으로 여겨졌고, 적절한 치료만 받았으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것이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삶의 여정에서 맥락은 다르지만, 노회찬도 용접공이 아니라 룰라처럼 선반공이 될 수도 있었다. 김어준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관련 대목을 소개한다. 

김어준 : 갑자기 생각난 건데, 왜 하필 용접을 택해서 자격증을 따려고 하신 거예요?

노회찬 :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기능 익히기가 다른 기능보다 쉬웠어요. 선반, 밀링보다는 익히기가 쉬웠어요. 

두 번째는 더 흔해요 이게. 그래서 쉽게 취직할 수 있는. 그 때는 도망 다니다가도 취직할 수 있는 걸 연구 많이 했어요. 누구처럼 보일러 기사할 거냐, 그거 아니다. 토론도 많이 했고, 내린 결론이 용접이다, 해서 용접했고.

김어준 : 실제 용접공 생활은 몇 년 하셨습니까?

노회찬 : 길진 않았죠. 3년. 하다가 집 털리고 이러니까 짐 다 놔두고 도망가고. 직장도 옮겨야 되고.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룰라는 개인적인 성장 과정을 이야기할 때, 자신은 1970년대 초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노동조합 활동가였다고 회상한다. 그런 룰라가 적극적인 노조활동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에 투신하게 된 데에는 1975년 그의 형(조세 페레이라 다 실바)이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구속돼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구속된 형을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룰라는 단순히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하는 노동자를 잡아가 고문까지 하다니 도대체 무슨 논리로 그러는 것인가 라며 자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막상 형이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룰라는 이때가 자기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자신의 정치의식이 질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고 회고했다. 이 사건 이후 룰라는 어느 모임에서든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했고 경찰은 물론 군사독재자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브리뚜 알비스, 박원복 옮김, <브라질의 선택 룰라: 금속노동자에서 대통령으로>, 가산출판사, 2003)

▲경기고 시절의 노회찬 ⓒ노회찬재단

노회찬의 인생의 전환점은 부산고 입시 낙방 후 서울로의 상경이었다. 노회찬이 부산고 입시에 떨어져 재수를 하고 한 해 늦게 경기고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의 한 미스터리였다. 1등부터 45등까지는 평균적으로 합격하는 부산중에서 부산고를, 반에서 1, 2등 하던 그가 떨어졌으니 말이다. 전날 먹은 약(감기약 또는 알러지약)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긴 한데, 아무튼 서울로 올라온 노회찬은 재수생활을 거쳐 1년 뒤인 1973년에 경기고에 입학했다. 훗날 노회찬은 이렇게 회상했다.

"72년도에 서울에 왔죠. 그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아마 부산에 있었으면 이 길에 안 들어섰겠죠. 부산에 있었으면 반항심은 극대화됐을 거 같고, 친구들과 어울려 이상한 길로 빠졌을 가능성도 매우 높아요. 

서울로 오면서 철이 든거지. 나 혼자다 보니까. 친구들도 처음엔 없었을 거 아니에요. 재수하는 처지에 친구 사귀고 돌아다닐 처지도 아니고. 그러다보니까 사회를 보기 시작한 거예요."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2013년 <동아일보>의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된 노회찬. <동아일보>는 '귀하가 현재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인생의 계기나 전환점, 또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소개해 주세요'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아쉽게도 그에 대한 답변은 공란으로 비워져 있었다. (<동아일보>, 2013.4.2.)

<par1 혁명 그리고 정치>의 '여는글'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서울로 올라온 노회찬은 두 번에 걸친 전쟁 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첫 번째 경험은 박정희의 유신 선포였다.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10.17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해 '종신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유신독재의 길을 열었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

"유신이 일어난 날, 그 날이 내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10월 유신 선포와 '긴급조치' 발동으로 상징되는 박정희 유신독재는 노회찬을 '10대 반독재 민주투사'의 길로 이끌었다. 두 번째 전쟁 같은 경험은 20대 때인 '80년 5월광주'의 충격과 아픔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학생·지식인들의 저항만으로는 저 폭압적인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중의 힘에 기반을 둔 혁명 말고는 독재 타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광주시민들의 외침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올바르고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교신문> 2008.1.26.)

▲1981년 여름 참당암에서 한 달을 보낸 직후의 노회찬 ⓒ노회찬재단

5월광주의 충격은 이듬해인 1981년 여름 노회찬의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서의 한 달 생활'로 이어졌다. 사실 경기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를 다닌 노회찬 앞에는 어느 정도의 장밋빛 청사진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았다. 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기불도 없던 응진전에서, 박쥐가 날고 찬 기운이 올라오는 명부전에서 1개월간 보내면서 부모 및 이성 문제 등에 대해 마음을 정리하고, 또 성찰을 거듭한 끝에 1973년 유신독재반대 박정희 타도 유인물 제작, 살포를 시작으로 몸담았던 10여년에 걸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돼 앞장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이 주인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일생을 투신키로 결단했다." (<매일노동뉴스>, 2004.4.7.)

노동운동에서 정당정치로 : "노동운동, 어떻게 다수를 형성할 것인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8호(2000.5.26.~6.1.)에 기고한 노회찬 글 갈무리

2000년 5월 13일~14일 '노동정치를 위한 하버드대-버클리대 공동센터'가 개최한 심포지엄에 한국과 브라질의 활동가 한 명씩이 초청돼 발표를 하게 했다. 핵심 주제는 '한국과 브라질은 비슷한 시기에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됐는데, 왜 그 후의 과정은 전혀 다르냐'는 것이었다. 

즉 브라질 노동운동은 곧바로 정치세력화로 활발하게 나아갔는데, 한국은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나 제도 개선보다는 임금 문제 등 개별 자본과의 투쟁에 매몰돼 있나 하는 문제였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부대표는 민주노동당 기관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 중에서도 참석자들이 가장 많은 관심과 시간을 할애한 것은 포괄적 시민사회와의 통합전략이었다. 대다수 참석자들에게 노동운동의 헤게모니가 고립된 소수에게만 관철되는 '독야청청' 상황은 경계의 대상이었고 어떻게 다수를 형성하느냐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 

한국의 경우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중간계급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가 논란의 대상이 됐다. 

필자는 한국에서의 정치세력화 과정의 특수성으로 인해 노동자 헤게모니의 확립이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창당 초기부터 노동자 중심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은 곧장 노동자 중심성=프롤레타리아 정당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논란을 야기시켰다.

브라질의 경우 공산당의 지속적인 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성과 반사작용으로 새로운 진보정당 즉 노동자당으로의 진보진영의 결속이 쉽게 이뤄진 반면 한국의 경우 진보정당은 초기부터 정체성 유지에 대한 우려를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이해시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민주노동당 건설을 주도한 민주노총의 경우 수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분되는) 중간계급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노동자계급으로서의 동일성으로 단결하고 있다는 설명에 이르러서야 오해가 풀리는 듯했다." (노회찬, 「(하버드-버클리 공동주최 국제심포지엄) 민주노동당 '노동자 중심성' 놓고 열띤 논쟁」, <진보정치> 8호(2000.5.26.~6.1.)

한국측 발표자로 초청된 노회찬은 브라질과 한국이 대비되면서 마치 청문회에 불려 나온 증인처럼 질문 공세에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구영식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74-75쪽)

구영식 : (1987년) 6월세력과 789세력의 엇갈린 운명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6월세력이 세 명의 대통령과 많은 국회의원을 배출했는데도 왜 789세력들은 민주파 정부 이전에 해왔던 투쟁들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나?

노회찬 : 1987년 이후의 노동운동 전개과정과 오늘의 무기력한 현실을 모두 '자본과 정권'이라는 '남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여러 역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87년 체제' 하에서도 노동운동에겐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노선 때문에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 

브라질은 쿠데타, 군부독재, 국민적 민주화운동, 군부독재 후퇴, 직선제 개헌 등 많은 면에서 한국과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차이가 있다면 바로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사례 즉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동시에 폭발한 것이다.

민주화의 결과가 아니라 민주화의 과정에서 브라질 노동운동은 처음부터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여 1979년 브라질노동자당(PT)을 창당했다. (☞ 정확히는 1979년 창당 준비대회, 1980년 창당대회, 1982년 정당 등록: 필자 주). 

브라질 민주노총 격인 CUT는 그 후 PT가 나서서 1983년에야 만들어졌다. 그러던 1988년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자 대선에 도전하기 시작하여 결국 2002년 노동자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지금까지 네 번 연속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도 브라질처럼 789 노동자 투쟁의 힘으로 즉각 정치세력화에 나서야 했다. 정당을 만들어 정당으로 대응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6월항쟁 세력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연대하고 견제하면서 함께 전진하는 관계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이를 훗날의 과제로 미루고 경제투쟁에만 매몰됐다. 그러면서 노동문제를 보편적 문제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당사자 문제로 축소됐다. 

(…) 

노동문제가 보편적 문제가 아니라 힘 있는 사람들의 '철밥통'을 지키는 운동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회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자기 실리를 지키는 운동이 돼버렸다. (보편적) 노동자운동이 아니라 종업원운동으로 전락했다. 지난 20년의 과정이 그랬다.

1987년에 나타난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나 거대한 에너지를 사회변화의 물길, 특히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나아가는 물길로 만들지 못했다. 

여기에는 당시 노동운동을 이끈 사람들의 잘못된 노선과 철학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그런 정치적 구상(독자정당 건설)이 힘을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봤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러한 오판이 노동운동의 성장을 방해하고, 노동운동을 약화시켰다."

"프랑스 국민에게 노동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나라를 지킨 구국의 역사로 기억된다. 독일 국민에게 노동운동은 대학 무상교육을 실현시킨 경제민주화의 주역이다. 

우리 국민에게 노동운동은? 불행히도 최근 역사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이 우리 국민 다수의 보편적 행복을 위해 헌신하고 기여한 기억이 없다."

룰라의 '(노동)운동에서 (정당)정치로'

1975년 성 베르나르두 두 깡뿌-지아데마 금속노조의 위원장에 선출됐다. 룰라가 이처럼 노조에서 가파른 성장을 한 것은 그의 놀라운 적응력과 지도력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1978년 룰라는 노조의 98%라는 찬성이라는 전대미문의 지지표를 받으며 위원장직에 재선됐다. 노조 역사상 신화가 창조되는 순간이었다. (브리뚜 알비스, 박원복 옮김, <브라질의 선택 룰라: 금속노동자에서 대통령으로>, 가산출판사, 2003, 85~87쪽)

▲노조파업으로 구속돼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혔을 때의 룰라 (사진 출처는 못 찾음)

노조 파업으로 구속된 룰라는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아 군사재판소에서 3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최고군사법원에 의해 형집행이 취소된 뒤 31일간 구금상태로 지내야 했다. 

수감생활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은 룰라는 집에 돌아와 새장에서 키우던 새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아무리 큰 사랑으로 그 새들을 다루었다 해도 그 새들은 어디까지나 감옥과 같은 새장에 갇힌 포로 신세였기 때문이다.

1978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향상된 권리 의식은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 곧 브라질 노동자당(PT)으로 발전했다.

"해결책은 외부에 있었다." 룰라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투쟁하며 찾고자 했던 해결책들이 그들의 공장과 노조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무장투쟁이 아니라 투표를 통한 선거가 그것이었다. 

룰라는 합법 진보정당을 통한 사회변혁을 꾀했고, 상파울루 주 금속노동자대회(1979.1.)에서의 창당 부결 등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 전국을 누비며 지지자들을 끌어 모은 끝에 군사독재 시절인 1980년 2월 10일 마침내 노동자당, '뻬떼'(PT, Partido dos Trabalhadores) 창당에 성공했다. 당 강령은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착취, 지배, 억압, 불평등, 불의, 빈곤을 없애기 위해 투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노동자와 소외계층을 위한 정당'을 표방한 노동자당의 등장은 국민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소수 엘리트만의 무대로 여겨졌던 정치권에서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룰라는 강력한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노동자당의 결속력을 다졌다. 불필요한 이념 논쟁보다는 살아있는 행동을 촉구하면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끊임없이 모색했다. (김재순, 「인물로 보는 라틴아메리카: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 데 실바」, <LAKIS>, 2017.3.7.)

룰라와 노동자당은 패배를 통해 배웠고 발전했으며 변화했다. 1982년 상파울로 주지사 선거에서의 패배는 룰라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노동자가 조합의 명령에 따르듯 노동자 후보에게 표를 찍지 않는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로, 룰라는 이렇게 밝혔다.

"사람들은 과거에 무엇을 했던 사람이니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의 실생활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으며 그 일에서 승리한 자를 원할 뿐 과거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원치 않는다." (<뉴스앤조이>, 2010.8.14.)

※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순결한 운동가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때를 묻히더라도 민중의 삶을 반 발짝이나마 전진시킬 정치가의 길을 선택한"(구영식),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유형의 진보 정치인인"(김어준) 노회찬도 여러 차례 했다.

"과거 민주화운동은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도 많다. 하지만 이젠 흘러간 옛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아련한 추억에 매달려 낡은 훈장인 양 연연해하며 자기들이 희생하고 운동할 때 운동하지 않은 다수에게 우월의식이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 

참 놀랐던 일이 하나 있다. 현재 제1야당의 초선의원인데 이 사람도 옛날에 감방에는 안 갔지만 노동운동을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감방에 안 갔다 온 사람은 행세를 못 한다'고 했다. 나이가 40, 50이 넘어가는데 그것을 따지고 있다. 

극단적인 일화이긴 하지만, 이제는 운동권적 진보에서 탈운동권적 진보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진보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다르고, 왜 나왔는지를 새롭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인정받아야 한다. 더디지만 이 아픈 과정을 거쳐야 한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우리가 어렵게 일을 하다 보니까,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보다는 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데에 너무 매몰돼온 건 사실이에요. 

제가 가장 문제 있다고 여기는 자세가 뭔가 하면, 나는 감옥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감옥 가는 걸 감수하거나 감옥 가도 변치 않겠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좋은 태도긴 하지만 사실 감옥 간다는 것은 진다는 얘기거든요. 

(…)

그러니까 그 속에는 뭐가 있냐면,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질 가능성이 더 높다, 지더라도 변치는 않겠다, 이런 얘기라고요. 그건 생존을 위한 철학은 될지 몰라도, 변혁을 위한, 변화를 시키는, 이겨야 변화를 시키는 건데, 그 길은 많이 못 미치는, 그런 점에서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태나 운동방식도 그걸 못 벗어나고 있다." (김어준, 「회찬 씨, 농담도 잘하셔」,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2006년 대선에서 재선이 확실시 되고 있는 룰라 브라질 대통령 ⓒ브라질 대통령궁

여러 번의 선거를 경험하면서 룰라는 바뀌었다. 룰라는 자신의 슬로건과 연설을 바꾸었고 다른 사회 계층과 다른 지역의 유권자를 찾아 나섰다. 노동자당도 바뀌었다. 사회는 변화를 요구했다. 룰라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대다수 브라질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2002년 10월 기호 13번의 룰라는 3전4기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이후 최초로 선거에 의한 '좌파' 정부가 남미에 출현한 것이었다. 4년 뒤 2006년 대선에서도 룰라는 재임에 성공했다.

<아빠의 현대사>를 펴낸 노동운동가 이근원은 1999년 브라질 노총(CUT)과 노동자당(PT)의 초청으로 브라질 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 룰라는 브라질 노동자당의 성공 요인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PT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PT 안에는 기독교도가 있는가 하면 무신론자도 있다. 가톨릭도 있다. 심지어 무장투쟁을 했던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노동조합 활동에서 정치활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노동자들은 한 번에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적 훈련이, 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조합처럼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열려져 있는 정당이 돼야 한다. 노동운동의 프로젝트를 정치프로젝트와 혼동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노동조합을 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의 얘기만 들으면 된다. 그러나 정치프로그램에는 많은 다른 영역의 제안을 들어야 한다. 실업자, 학생, 여성, 중소기업가, 농민 등 각기 다른 영역에 속한 사람들을 정치로 모아내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근원, <아빠의 현대사>, 레디앙, 2013)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노조 활동에서 정치 활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노동운동의 프로젝트를 정치의 프로젝트와 혼동하면 안 된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 룰라와 노동자당이 강조한 말이었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했다.

"중요한 핵심이다. 정치의 해법과 노동조합의 해법은 다르다. 노동조합운동의 연장선에서 정치를 바라보면 결국 이익집단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정치가 또 하나의 해결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와 노동운동은 그 문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부르주아 대의체제 하의 모든 정당들은 선거를 통해 평가받고 선거 결과에 따라 영향력의 증대와 쇠퇴를 겪게 된다. 정당인 한 이것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는 것은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진보정당으로 성장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자기고백이다. 100년을 넘어서는 유럽 진보정당의 역사는 자신들이 취한 정책의 변천과 선거에서 획득한 의석 수의 변화를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노회찬, 「진보정당 건설의 전략과 전망」, <노동사회> 통권 37호, 1999년 10월호)

노회찬의 '(노동)운동에서 (정당)정치로'

▲정운영, <우리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책표지 갈무리 Ⓒ랜덤하우스중앙

2004년 17대 총선을 마친 어느 날 정운영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세월이 진보를 희롱하더라도 '진보의 파수꾼'이 돼 그 희롱을 잠재우기를" 바라면서, "첼로 켜던 소년에서 노동투사를 거쳐 진보정치의 선봉이 된" 노회찬에게 물었다.

정운영 : 노동운동가에서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된 사정을 들려주시지요.

노회찬 : 예정된 수순입니다. 한편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과 노동운동의 성장, 다른 한편으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지배력 확장 등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대중운동'과 합법적 '정당운동'이란 양 날개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노동운동이 지체된 정치운동의 세력화를 추진함에 따라 민주노동당 창당도 이뤄진 것입니다. 1987년 이래 진보정당운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라 판단했고, 1992년 출소 이래 이 운동에 전념했습니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대중의 힘에 기반을 둔 혁명을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를 꿈꾸던 '반체제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대학 졸업을 전후한 시기에 용접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그것은 인민노련을 조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89년 12월 인민노련 활동으로 체포돼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노회찬은 감옥생활을 통해 생각을 가다듬었다. 한국에서는 점진적인 민주화가 진행되고, 또 소련과 동구의 현존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청주교도소의 '수인번호 336번' 노회찬이 결심을 굳힌 것은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1990년대 어느날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 신입회원 교육 기념촬영 (사진 제공: 양난주 님)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를 만기 출소한 이래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같은 해 4월 민중당 해산과 함께 진보정당은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때 '진보정당추진위'로 남은 동지들과 함께 항해를 떠났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고난의 행군'이 수년 간 계속될 때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가지 '진보정당 만들기'만 하다가 끝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또 어떠랴." (노회찬, 「후기: 한국정치 최대의 히트 상품」,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노회찬의 결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1992) - 국민승리21(1997) - 민주노동당(2000) - 진보신당(2008) - 통합진보당(2011) - 진보정의당(2012.10.21.)으로 이어졌고 당명을 변경한 정의당(2013.7.21.~)이 그의 마지막 정치적 거처가 됐다.

"진보정당이야말로 21세기 한국정치 최대의 히트 상품이 될 것입니다." (노회찬, 「후기: 한국정치 최대의 히트 상품」,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2000년 1월 30일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민주노동당 창당대회. 가운데 권영길 당대표 왼쪽에 노회찬 부대표 Ⓒ민주노동당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에 대해 훗날 노회찬이 변영주 감독과의 대화에서 소회를 밝혔다.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노회찬이 진보정당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 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회찬, 「(여는글)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 다시, 꿈꾸기 위하여」,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 「서문」,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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