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시리즈 모아보기)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part 3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㊳ 들어가는 글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건 창조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바로가기)
㊴ 넬슨 만델라 上 27년 6개월의 투옥, 교도소의 핵인싸가 되다(☞바로가기)
㊵ 넬슨 만델라 下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우분투!(☞바로가기)
㊶ 레흐 바웬사 上 공산당은 한국에서 과연 좌파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바로가기)
㊷ 레흐 바웬사 下 폴란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흔적과 마주하다(☞바로가기)
㊸ 살바도르 아옌데 上 (☞바로가기)
칠레의 아옌데와 한국의 노회찬 : '절망', 그리고 '희망'
미국 그리고 피노체트의 '콘도르 작전'과 '좌파 사냥'
1998년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안보회의·국무부·국방부 등의 일급 기밀(TOP SECRET) 문서 중 일부가 일반문서로 재분류돼 공개됐다. 이 문서에는 칠레 쿠데타를 전후로 6년간 행해진 미국 정보기관의 공작 실상이 낱낱이 기록돼 있으며, 산티아고를 피로 물들게 한 쿠데타를 사실상 미국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정연주 기자(워싱턴 특파원)의 1998년 11월 30일자 <한겨레> 기사의 주요 글귀를 뽑아보면 이렇다.
20여건 200여 쪽에 이르는 비밀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쿠데타가 일어나기 3년 전 닉슨 대통령이 리처드 헬름스 CIA국장에게 직접 관련지침을 시달하는 등 수년간에 걸쳐 쿠데타 지원공작을 전개했다. 경제봉쇄, 반대파 언론과 정당에 대한 자금지원, 국제금융기관 압박 등을 통해 사회 불안과 위기 조장이 그 핵심 중 하나였다. 칠레의 지배층과 우익은 아옌데 퇴진과 개혁 중단을 목적으로 사보타주와 직장 폐쇄 등으로 힘을 보탰다. (조기원 기자, 「남미 인권유린 '콘도르 작전' 40년 만에 단죄」, <한겨레>, 2016.5.30.)
이후 피노체트가 아르헨티나, 브라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의 친미 독재정권과 함께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1975년부터 1983년까지 국내외의 사회주의자,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살해한 '콘도르 작전'(Operacion Condor)도 미국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1975년 11월 25일, 칠레 비밀경찰(DINA)의 우두머리 마누엘 콘트레라스는 아르헨티나·볼리비아·칠레·파라과이·우루과이의 군사첩보기관의 총수들과 산티아고에서 만나 공식적으로 콘도르 작전을 수행하기로 정했다. 남미의 군사독재정권 공조로 반체제 인사 소탕을 위해 일종의 '국제협력군경테러조직'이 창설된 것으로, 콘도르 본부는 칠레 산티아고의 헌병대 본부에 설치됐다.
미국과 남미의 독재 정권들은 '콘도르 작전'의 명분을 좌파 게릴라 근절을 위한 '반공'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론 자신들의 철권통치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납치‧감금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데 이용했다. 미국을 배후로 6개국에서의 작전 결과 피해자는 살해 6만 명, 실종 3만 명, 투옥 40만 명에 이른다.
※ 콘도르 작전을 주도한, 피노체트의 '오른팔' 콘트레라스는 수십 건의 반인류 범죄로 500년이 넘는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2015년 사망했다. DINA에 피해를 본 가족들을 변호하는 칠레의 변호사 엑토르 살라사르는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콘트레라스는 악의 화신이었다"며 "그는 피노체트의 휘하에 있으면서 모든 범죄를 직접 저지른 인물"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2015.8.9.)
참고로 2009년 9월 1일 칠레 산티아고 법원(빅토르 몬티글리오 판사)은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 야당 정치인과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살해한 독재정권 가담자 129명에게 일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년 가까이 과거사 청산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이들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포 대상자들은 주로 1970년대 피노체트의 지시에 따라 '콘도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에서 야당 인사를 살해한 사람들이다. (구정은 기자, 「피노체트정권 과거사 청산 '끈질긴 칠레'」, <경향신문>, 2009.9.3.)
당시 대통령은 뒤에서 살펴보게 될, 2006년 칠레의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회당 소속의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였다.
전두환 신군부와 '서울의 봄', 그리고 미국
20여 년 전 필자는 '서울의 봄'의 전 과정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신군부세력의 집권과정에 대해 미국은 오랫동안 아무런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한국정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①미국은 '12․12'와 '5월사태'에 관하여 결정적인 부분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점 ②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사실상 실제적인 통제권을 포함하지 않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 ③미국은 전두환 세력이 12․12로 군부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이들과 협조관계가 아니라 긴장관계에 있었다는 점 ④미국은 끝까지 군사적 해결방식을 지양하고 비군사적 수단을 동원할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군부에 촉구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미국이 설령 12.12쿠데타-5.17쿠데타-5.18 유혈 참극의 배후조종세력이 아니라할지라도, 미국의 이런 주장은 사실을 왜곡‧은폐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10․26 직후부터 미국은 암호명 '체로키(Cherokee)'라는 비상대책반을 행정부 내 고위 관리들로 구성하여, 한국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노골적인 활동을 벌여 왔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상황과 인물에 대한 주도면밀한 평가작업을 함과 아울러 국내 주요 인사들을 만나 미국 국익의 관철 입장에서 구체적인 조언과 요구를 한 것, 광주민중항쟁에의 군 병력 투입에 대한 승인 및 지지 통보와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방안 협의 등에서 잘 드러났다. 한국의 민중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민주화의 봄'은 미국에게는 단지 '혼란의 봄'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미국은 한국의 진압을 알고 있었다」라는 제목의 1996년 2월 27일자 <저널 오브 커머스>지의 광주문제 특집기사에 따르면, "80년 5월 22일 소집된 백악관의 한 회의에서는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악화될 경우 미국이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방안도 아울러 협의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는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홀부룩 차관보,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 보좌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데이비드 존스 합참의장 및 스탠스필드 터너 중앙정보국장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1996.2.29.)
이처럼 미국은 당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의 말처럼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12․12 군사변란 이후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전환기에 안정적인 바탕을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적극적인 활동가"가 돼버렸던 것이다. (<한겨레>, 1996.3.24.)
시간이 흐르고 흘러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전직 대통령이자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됐다. 1심 공판에서는 내란 및 군사 반란 혐의로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년6월이 선고됐고, 2심에서는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두환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해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이 선고됐고, 노태우은 징역 17년에 2628억 원이 선고됐다. 죄목은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초병 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이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우리나라의 헌법 질서 아래서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면서 "피고인들의 정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결코 새로운 법질서의 수립이라는 이유나 국민의 합의를 내세워 형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8개월 뒤인 12월 22일 국민대화합을 이유로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이 15대 대선 김대중 당선자와 합의,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해 관련자 모두를 특별사면하고 석방해, 이들에 대한 처벌은 유야무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5대 대선에서 이회창(한나라당),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 이인제(국민신당) 세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대통령 사면조치에 대해 국민회의와 한나라당, 자민련과 국민신당 모두 대변인 성명을 통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지역 및 계층갈등을 뛰어넘어 화해와 포용의 정치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조치를 환영한다'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성명과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4당의 환영 성명과는 달리 '전노 사면'은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여는 전기를 마련했거나 국민화합을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2017년 출판과 배포가 금지된 전두환의 <전두환 회고록>에는 온갖 역사적 왜곡과 허위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낯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는 '후안무치'의 상징 전두환다운 일이었다.
1995년 이런 상황 전개에 앞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대표 노회찬)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전두환 외 46명을 고소·고발했다. 죄명은 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내란목적살인미수·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반란목적군용물탈취·일반이적·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이었다.
이에 대해 검사 김상희가 '서울 마포 합정 426-2 푸른산빌딩 2층 진정추 사무실 노회찬' 앞으로 보낸 결과통지는 '불기소처분'이었다. 불기소처분이란 고소나 고발된 범죄 용의자에 대해 수사를 한 검사가 용의자를 재판정에 세우기 위한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결정을 뜻한다. 이는 1995년 7월 18일 12.12와 5.18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 공안1부장 장윤석 검사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상징되는 검찰의 '공소권 없음의 불기소 처분'과 동일한 논리였다.
특별사면 조치 두 달여 전인 1997년 10월 7일 권영길과 노회찬 등의 국민승리21은 '전두환·노태우 사면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을 가졌다. 국민의 의사를 거스른 채 정략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전노 사면'에 대해 절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조건 없는 전노 사면' 반대는 70%를 크게 상회했다.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1997년 국민승리21 권영길 대통령 후보 정책공약자료집 <21세기형 민주진보사회를 향한 한국사회 대개조 플랜>을 보면, '전‧노사면 절대 반대, 전‧노사면 부추기는 정치권의 정략정치 반대' 항목에서 국민승리21은 이런 주장을 펼쳤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권력은 십 년을 못가고 활짝 핀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영원할 것만 같은 권력이나 아름다움도 흥함이 있으면 언젠가는 쇠하게 마련이다. 그만큼 정치권력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비유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노태우 국가장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김부겸 국무총리는 "노 전 대통령은 합법적 절차로 국민 손에 뽑혀 대통령이 됐고 추징금도 완납했으며 유족들이 광주에 진정성 있게 참회해왔다"며 "국가장은 국민 수용성 여부를 중요하게 판단해 결정되는 사안"이라고 밝힌 바 있다.
노태우는 떠나기 전 나름의 역사적 참회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 아들을 통해 "5·18 희생자에 대한 가슴 아픈 부분, 그 이후의 재임 시절 일어났던 여러 일에 대해서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유언을 전했다. 아들 노재헌은 2019년 8월을 시작으로 3년째 5·18 묘지를 참배하며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죄의 뜻을 표명해왔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진정성을 믿어줄 때까지 계속 사과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연합뉴스>, 2021.10.27.)
전두환은 마지막까지 희생자들에 대한 참회와 사죄 없이 떠난 민주주의 암흑기의 독재자였다. 유족들도 사죄는커녕 "내 남편 전두환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아버지", "나라의 영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계속했다.
"살육과 고문 주범이 사과 한번 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고 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족들의 뻔뻔함'에서 전두환은 피노체트와 닮았다.
2006년 12월 10일 피노체트는 끝까지 자신이 일으킨 유혈 군부 쿠데타를 옹호하면서 모든 죄를 떠안은 채 세상을 등졌다. 인권유린 혐의로 피노체트를 기소했던 히람 빌라그라 검사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피노체트의 죽음은 우리에게서 심판과 처벌의 기회를 앗아갔다. 나는 피노체트가 심판받지 않은 것에 대해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단죄받지 않은 피노체트」, <한겨레>, 2006.12.12.)
2000년 6월 산티아고 항소법원이 전 칠레 군부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종신 상원의원의면책특권 박탈판결을 내리자, 그의 큰딸은 "아버지는 무죄이며, 아버지가 몰락할 경우 군인과 민간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아버지는 법원의 면책특권 박탈판결을 '정치재판'으로 간주하고 있다"면서 "전직 대통령이라면 누구나 재임시절의 일들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끼듯이 아버지의 일도 이런 범주에 속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정도를 넘어선 덮어씌우기"라고 주장했다. (「피노체트 딸 "면책 박탈되면 많은 사람 다칠 것"」, <연합뉴스>, 2000.6.8.)
노회찬이 폭로한 '작계 5027' 및 '전략적 유연성'과 주한미군의 역할 : "국방부 장관은 미국에서 달러로 월급을 받는 사람인가?"
앞서 <빌리 브란트와 노회찬> 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첫해인 2004년을 통틀어 신문과 방송에 가장 많이 나온 민주노동당의 정치인은 노회찬 의원이었다."
2004년 11월 11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 앞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1차 회의록(2003.4.)을 공개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암살 작전' 및 '기습적 대북 공격' 관련한 내용을 언급했다.
※ '작계 5027'(Operational Plan 5027; OPLAN 5027)은 한반도 유사시 '전쟁 시나리오'의 중심이 되는 작전계획으로, 5027이란 숫자는 미 국방성이 지구상 각 지점을 코드화 한 것 중 한반도의 코드란 설이 있다. 태평양사령부(PACCOM)의 작전 번호가 5000번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미군은 10개의 통합전투사령부를 두고 있는데, 각각 아프리카 사령부·중부사령부·유럽사령부·북부사령부·태평양사령부·남부사령부·우주사령부·특수작전사령부·전략사령부·수송사령부·사이버사령부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중 지역별 사령부는 각각의 해당지역을 관할하고, 그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작전을 주도해서 수행한다.
참고로 2021년 9월 국민의 힘 대선후보 토론회(홍준표-윤석열)에서, "작계 5015 아시죠?"라는 홍준표의 질문은 윤석열의 진땀을 빼게 했다. 윤석열을 당황케 만든 '작계 5015'는 한국이 전시작전권을 환수한 이후 북한과의 전쟁을 상정한 '신형' 작전계획이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윤광웅 국방부 장관을 질타한 노회찬 발언의 핵심내용은 이랬다.
2004년 11월 30일 노회찬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정부문서 하나를 공개했다. 2003년 7월에 열린 제3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에 앞서 한국측 협상팀(NSC·외교부·국방부·기획단 포함)의 사전준비회의에 제출된 문서로, 제목은 '주한미군 지역역할 수행 대비책'이었다.
이 문서는 미 2사단의 평택 이전이 주한미군의 광역기동군화, 동북아 신속기동군화를 위한 것으로, 기존 한반도에만 국한되던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변 분쟁까지 확장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평화운동 진영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주장이 정부 공식문서로 확인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한국군 참여'가 포함된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 시나리오를 폭로한 노회찬은 기자회견을 통해 주한미군 후방배치를 위한 용산기지 이전은 '대북 공격용 미군 재배치'이며 또 한국에 배치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대북 공격용 미사일'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 전쟁준비를 위한 이 두 가지 미국의 요구를 한국이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용산기지 이전 비준안 통과' 반대와 패트리어트 마사일 배치 100억 예산 전액 삭감을 요구하고 나섰다(김희원, 「노회찬 '주한미군 역할, 北·中 선제 군사공격 위한 것'-미, 전쟁준비 용납 안돼」, <폴리뉴스>, 2004.11.30.)
2004년 12월 6일 노회찬은 보도자료(「주한미군 지역역할에 대해 떳떳하게 논쟁하자」)를 통해 "그동안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고 했지만, 이 보도(<중앙일보> 2004.12.6.)에서 미 국방부 관계자는 미국은 GPR(해외미군재배치계획)에 따라 해외주둔 미군을 유사시 어디로든 이동시킬 수 있는데 이는 양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미 국방부 관계자가 '협상내용 폭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위반'이라며 협상내용 공개를 문제 삼은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노회찬이 집요하게 정치적 이슈로 삼은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란 미국이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세계 어디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외주둔 미군을 유연하게 배치하려는 전략을 말한다.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처음 언급된 것은 2003년 한미연례안보회의(SCM) 공동성명에서였다. 이 성명에서 한미 양측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지속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다.
전략적 유연성의 본격적인 협상은 2005년 2월 시작됐다. 2005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그 후 우리 측의 입장이 됐다. 협상은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모두 12차례 열렸다.
결국 2006년 1월에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하되 미국은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주한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평화와 애국(심)에 대하여 : "과연 전쟁이 해결책일 수 있을까? 전쟁에서 이기면 평화가 찾아올까?"
노회찬은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과 한반도의 긴장을 조장해온 자유한국당 등 한국의 '얼치기 보수'가 마치 보수의 전유물로 생각하며 앞세워 온 '애국, 애국심'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2014년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이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한 예로, 2017년 9월 20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노회찬 20대 국회 정의당 원내대표는 자유한국당이 전술핵 재배치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겠다는 것에 대해 "유례없이 핵 구걸단이 방미한 거죠. '한 핵 줍쇼' 이렇게. 정말 작년에 왔던 각설이들이에요"라고 꼬집었다.
2017년 10월 25일 전술핵 재배치 요청을 위해 자유한국당 방미단을 대표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미국외교협회(CFR)에서 열린 전문가 간담회의 발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홍준표가 말한 '공포의 핵균형'은 북한이 핵을 보유한 이상 우리도 핵을 들여 공포의 균형을 맞추자는 주장이다. JTBC 시사토크 프로그램 <썰전>(2017.9.14.)에서 보수 쪽 패널인 박형준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의 논리와 동일하다.
하지만 한국의 전술핵 재배치는 이들의 논리와는 달리 북한 핵 개발로 인해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의 수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핵확산 억제라는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해왔다. 또 설사 북한이 핵무기 고도화에 성공했다고 해도, 핵 위협을 상쇄할 능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한반도 문제의 권위자인 셀릭 해리슨은 자신의 책 <코리아 엔드게임>(삼인, 2003)에 이렇게 적었다.
해리슨의 지적대로 한반도에 북한의 핵 선제공격을 무력화할 대응능력이 충분한 상황에서 전술핵 재배치마저 이뤄지면 동북아는 핵무기 과열지구가 될 위험성이 너무 높은 게 사실이다.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 돼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일구는 길을 오랫동안 천착해온 이삼성 한림대 정치학 교수는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한길사, 2018)에서 무력으로는 결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전면전이 시작하면 중국 인민해방군이 자위를 명분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이는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새롭고도 영속적인 분단을 야기한다고 역설한다. 해법은 대화뿐으로, 이삼성은 북한이 그동안 요구한 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무력화'라며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평화체제를 보장해야 북한이 비핵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전망한다. (<연합뉴스>, 2018.4.26.)
'북한의 평화 제스처가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하기에 화답은 북한의 시간 벌기 전략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삼성의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 담긴 역사해석과 처방에 물론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삼성은 북한은 이미 핵무장을 완성했다고 강조한다.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한 핵무장과 장거리핵미사일 능력을 바탕으로 평화협상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 양국에게 군사행동의 리스크는 이제 더욱 커졌다. 회담에 응하는 것이 마치 북한을 타격할 얼마 남지 않은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는 잘못인 양 비판하는 것은 사태 파악을 거꾸로 잘못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책소개 중에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노회찬의 관점은 셀릭 해리슨과 이삼성과 동일하다. 2018년 2월 창비에서 주최한 '지혜의 시대' 연속 특강 시간에 노회찬은 이렇게 묻고 답했다. (노회찬,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돌아온 아옌데, '아옌데의 후예들'
의사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을 역임한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 1951.9.29.~)는 2006년 칠레의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4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바첼레트는 연임 불가 규정에 따라 4년이 지난 2013년 12월 대선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바첼레트는 2006년 대통령 당선 당시에는 53%의 지지율로 당선됐지만 2010년 퇴임할 때는 지지율이 85%에 육박했을 정도로 칠레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임기 중 하루 2.5개꼴로 무려 3500개의 유아학교가 빈민가에 세워졌고, 소득 하위 40% 이하 가정의 0∼4세 아동은 무상급식과 무상교육을 받게 됐다.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일자리를 갖기 시작해 실업률이 떨어졌고 출산율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바첼레트는 남녀 동수로 구성된 내각 장관들과 함께 칠레의 번영을 모색했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 시절 자행됐던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정부 차원의 '배상'과 '진실 규명'을 일관된 의지로 추진했다. "칠레가 당신과 함께한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동안 자신이 외쳤던 구호를 바첼레트는 잊지 않았으며 그녀의 진심이 국가폭력 희생자들에게 전해졌다.
2010년 3월 11일 퇴임식 당시 칠레 국민들은 규모 8.8의 지진이 일어난 엄청난 국가적 재난의 와중임에도 "대통령 고마웠어요. 2014년 다시 만나요"를 외쳤는데 그 바람대로 대통령으로 다시 복귀하게 됐다. (CBS노컷뉴스 권영철 선임기자, 「[Why뉴스]칠레는 왜 바첼레트를 다시 선택했을까?」, <노컷뉴스>, 2013.12.17.)
대통령으로서 바첼레트의 성공은 수평적 민주적인 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소통한 덕분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첼레트가 대통령 시절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 2009년 11월 10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은 6월 4일 칠레 산티아고의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연합뉴스>를 비롯한 6개 외국 언론사 특파원과 조찬 간담회를 가졌다. 일문일답 가운데는 피노체트 군사독재와 관련된 소회도 있었다.
2009년 11월 29일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2010년 서울에서부터 정권 교체를 하자"는 기치 아래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바첼레트 대통령의 칠레를 호명했다.
2013년 바첼레트의 대통령 복귀에 대해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는 이렇게 평가했다.
한편 2014년 2월 27일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딸 이사벨 아옌데 상원의원이 최초의 여성 상원의장으로 선출됐다. 이사벨은 상원의장에 선출된 뒤 "아버지도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딸인 제가 상원 역사에서 최초로 여성 의장으로 뽑힌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사벨이 상원의장으로서 수행할 첫 공식행사는 3월 11일 열리는 바첼레트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식이었다. 취임식에서 이사벨 상원 의장은 바첼레트에게 대통령을 상징하는 어깨띠를 둘러 메주는 역할을 했다. 칠레 언론은 대통령 취임식과 관련,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대통령의 딸이 사회주의 정권의 바통을 이은 여성 대통령에게 어깨띠를 메주는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2015년 5월 이사벨은 집권 중도좌파연합의 최대 정당인 사회당 대표를 맡았다. 82년에 걸친 칠레 사회당 역사에서 여성이 대표를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사벨은 대표로 선출된 뒤 사회당 소속인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했다.
바첼레트는 2014년 3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콘도르 작전'으로 상징되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가진 바첼레트 칠레 정부와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정부는 군사정권에서 자행된 인권범죄에 관한 정보 교류에 합의했다.
2018년 대통령직 퇴임 후부터 2021년 현재까지 바첼레트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재직 중이다. 미첼 바첼레트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사형제도 폐지와 대북 경제제재 완화, 북한 인권 개선, 차별 혐오 금지 등의 정치적 메시지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장영은, 「분노에 기댄 보복이 아닌 '진실·치유·통합'…그는 약속을 지켰다-미첼 바첼레트」, <경향신문>, 2021.2.3.)
유엔 인권최고대표 바첼레트의 정치적 메시지인 사형제도 폐지, 대북 경제제재 완화, 북한 인권 개선, 차별 혐오 금지 등은 생전에 노회찬이 애써온 정치적 이슈이기도 했다.
닫는 글: '절망', 그리고 '희망'에 대하여
아옌데는 그를 '생환'(生還)하려는 길동무들과 후예들,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은 칠레 시민들을 통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화전민 정치'는 어떤가」(<경향신문>, 2021.7.28.)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노회찬과 아옌데를 함께 호명하며 새로운 희망에 대한 염원을 노래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병철이 인용한 아옌데의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 장군이자 시인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이 한 말이라고 한다. '기동전 전략의 선구자'였던 그는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 등에 야전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히틀러의 참모 중 그에게 직언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구데리안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앞서 본 것처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그 암울한 순간에도 아옌데는 "이 어둡고 쓰라린 순간은 극복될 것", "위대한 시대가 다시 열릴 것"이라며 희망을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을 가리켜 '깨어 있는 자의 꿈'이라고 했다. 신영복은 "희망이란 오늘을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다가설 수 있는 창"이라는 말을 남겼다. 노회찬이 "창당만으로도 평생의 꿈의 절반이 이뤄졌다"고 말한 민주노동당의 당가는 이렇게 노래했다.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과, 어두운 밤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에 의해 노회찬의 삶이 그의 꿈과 함께 생환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희망'에 대해 남긴 노회찬의 트위터 말글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기록이야기 <아옌데와 노회찬> 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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