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시리즈 모아보기)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part 3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㊳ 들어가는 글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건 창조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바로가기)
㊴ 넬슨 만델라 上 27년 6개월의 투옥, 교도소의 핵인싸가 되다(☞바로가기)
㊵ 넬슨 만델라 下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우분투!(☞바로가기)
㊶ 레흐 바웬사 上 공산당은 한국에서 과연 좌파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바로가기)
㊷ 레흐 바웬사 下 (☞바로가기)
노회찬, 칠레 사회당의 아옌데 대통령과 마주치다 : 1973년 9월 11일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노회찬재단 기록연구실이 재단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는 <노회찬의 오늘> 9월 11일자인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회찬의 길동무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가 쓴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서해문집, 2017)를 언급하면서 「아옌데, 21세기 리더십의 길을 열다」는 제목의 칼럼에 "<살바도르 아옌데>를 읽자"며 이렇게 적었다.
살바도르 아옌데, 그는 누구? :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사회당) 출신의 대통령
2008년 칠레 국민 150만 명이 뽑은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1위, 그의 이름은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7.26.~1973.9.11.)였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칠레의 소아과 의사 출신 정치인이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급진당의 핵심당원이었다. 집안 분위기의 영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던 아옌데는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운동권 학생' 아옌데는 반정부 투쟁을 하다가 두 번 구속됐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가 의사로서 하층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며 분노했듯이, 아옌데 역시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며 사회적 모순을 실감했고 이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사회정의, 빈곤과 질병의 관계 등에 대한 신념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나라였다. 유럽에서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칠 때에도 칠레에서는 선거와 의회 제도가 계속 작동했다.
칠레에는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지만 아옌데는 '사회당'을 창당(1933.4.19.)하는 데에 앞장섰다. 소련의 세계 혁명 전략을 추종하며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는 공산당이 아닌, 남아메리카와 칠레의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 정당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정치 목표는 '좌파연합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선거로 집권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낸다'는 것이었다.
1937년 아옌데는 사회당의 깃발 아래 하원의원이 됐고 31세 때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의 연립정부에서 보건부장관을 맡기도 했으며 상원의원도 역임하는 등 정치적 이력을 쌓아 나갔다. 아옌데는 '대권 장수생'이었다. 1952년, 1958년, 1964년 모두 6년 임기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칠레의 보수 세력과 좌파들의 분열 탓에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리고 1970년이 왔다.
1970년의 칠레는 극대화된 사회적 모순으로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토지 없는 농민들과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은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1969년에 1939건, 1970년에 5295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농민들의 토지 점거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으니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 칠레 서민들의 열망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이에 197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질적인 분열 상태에 놓여 있던 칠레의 좌파 세력도 6개의 정파로 구성된 '인민연합'(Unidad Popular)을 결성했다. 아옌데는 민중 시인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1971)인 공산당 후보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 1904~1973)와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며 인민연합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칠레의 저항가수이자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의 대표적 가수였던 빅토르 하라(Víctor Jara, 1933~1972)는 아옌데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벤세레모스>(Venceremos,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선거 때만이 아니라 칠레의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국민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노래로 생명력을 얻게 됐다.
노래 가사처럼 1970년 9월 4일의 역사적인 선거에서 아옌데와 그의 인민연합은 승리했다. 대선에서 36.6% 득표율로 승리한 아옌데는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칠레 사회당)의 대통령이 됐다. 임기는 3년이고 최대 6년까지 허용됐다.
아옌데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호치민과 체 게바라의 초상화를 흔들며 열광했다. 네루다는 승리의 감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대통령이 된 아옌데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La via chilena al socialismo)이라는 사회주의 정책 실행에 착수했다. 이에 따르면 대규모 산업(특히 구리 광산과 은행)의 국유화, 정부의 의료 및 교육 복지 관리, 영양실조로 병든 어린이에 대한 무료 우유 배급, 연금 개혁, 토지개혁, 공공 근로 사업을 통한 일자리 제공 등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후생 증진 추진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옌데의 정책 추진에 다국적 기업들과 미국 등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칠레에 대한 경제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닉슨 행정부의 압력으로 국제 시장에서 구리(칠레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출 소득이 떨어졌다. 그의 임기 내내 토착민·빈민층과 백인 정착민 출신 상류층 사이에 긴장이 높아져갔다.
당시 칠레의 상황과 아옌데의 리더십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존재했다. 앞서 인용한 장석준의 칼럼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이런 상황에서 아옌데의 재집권이 두려웠던 미국과 친미 성향의 칠레 기득권층의 전략은 이러했다. (이창희, 「칠레의 2019년... 대한민국이 얻어야 할 교훈-[오늘날의 책읽기]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를 읽고」, <오마이뉴스>, 2019.11.20.)
1973년 3월 안팎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옌데는 1970년 대선 때보다 더 많은 표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옌데의 지지층은 견고한 만큼 그 반대자들의 완강함 또한 그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아옌데가 모색한 돌파구는 또 한 번의 투표였다. 자신의 신임을 걸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그 승리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투표일은 1973년 9월 11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국민투표는 실시되지 못했다. 투표 당일인 9월 11일 새벽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11.25.-2006.12.10.) 국방장관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옌데는 총을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옌데가 방아쇠를 당긴 AK-47 자동소총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친구 살바도르에게, 피델로부터."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민주적인 선거로 정권을 잡은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선물한 총이었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 지휘관은 군사평의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아옌데의 사망 소식을 들은, 1970년 아옌데 대선 승리에 "무책임한 칠레 국민들로 인해 한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왜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CIA를 통해 수백만 달러를 칠레군 장교들의 호주머니에 넣어줬던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환호했다. (김진호, 「피노체트 사망…"어둠이 갔다" "장군 추모" 칠레의 두 마음」, <경향신문>, 2012.7.10.)
산티아고의 봄은 짧았다. 30여 년의 투쟁을 통해 숱한 우여곡절 끝에 수립된 칠레의 민주정부는, 단 3년의 짧고도 고된 집권을 무력의 위협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 피노체트 측이 망명을 권하며 준비한 헬기를 물리친,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라디오 생방송을 통한 마지막 연설은 이랬다.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미 국무부 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는 "미국은 쿠데타를 직접 실행한 것은 아니지만,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전제 조건들은 미국이 창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기획한 핵심 추동자였다.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통해 합법 정부를 전복시킨 피노체트는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야당 정치인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이듬해인 1974년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국회와 정당, 언론자유, 인신보호영장제도, 노동조합을 없앴다. 1990년까지 17년 동안 집권하면서 극단적 반공주의를 앞세운 철권통치로 3만8000명이 고문과 옥살이를 했고, 3200명이 피살되거나 실종됐으며 50만 명이 망명길을 떠났다.
피노체트 정권은 시장만능주의 경제학의 메카인 시카고대학 출신들('시카고 아이들', The Chicago Boys)을 경제부처에 배치하여 국유화를 취소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폈다. 쿠데타 몇 달 뒤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의 영수 밀턴 프리드먼과 아널드 하버거가 칠레를 방문해서 '칠레 경제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찬양했다.
그러자 시카고대학 출신으로서 종속이론 중에서 유명한 '저발전의 발전' 가설을 만든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공개편지를 학술지에 실어 살인마 정권을 찬양한 두 명을 정면 비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도 프리드먼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을 공개 비판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 「네루다, 피노체트, 바첼레트」, <한겨레>, 2009.9.22.)
피노체트의 업적이라는 경제성장의 실상은 지표상의 성장일 뿐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았다. 칠레의 경제성장 모델은 이후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노믹스 등 신자유주의로 이어졌다.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피노체트는 7년간 군총사령관으로, 면책특권을 갖는 종신 상원의원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을 오가며 소일하던 피노체트의 말년 설계가 어그러진 것은 1998년 스페인 법정이 구속영장을 발부, 신병인도를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쿠데타 때 다수의 스페인 사람들을 살해한 혐의였다. 피노체트는 뜻밖에 영국 감옥에 갇혔고, 마침내 정의가 실현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대처 총리의 도움으로 무사히 칠레로 돌아갔고, 2006년 늙어 죽을 때까지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이달 초 칠레 법원이 쿠데타 때 고문, 학살 혐의자 129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칠레의 과거사 청산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 「네루다, 피노체트, 바첼레트」, <한겨레>, 2009.9.22.)
2000년 3월 피노체트가 돌아오면서 칠레는 양분됐다. 광적인 지지자는 환호했고, 탄압의 희생자와 유족들은 300여 건의 줄소송을 냈다. 칠레 대법원은 그의 정신 및 건강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2004년 미 상원 조사 결과 피노체트는 2700만 달러(약 270억 원)의 불법자금을 외국은행에 은닉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2006년 12월 10일 91세를 일기로 피노체트가 사망했다. 칠레는 피노체트의 죽음에 두개의 얼굴을 드러냈다. 어두운 역사의 마감을 축하하는 측과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장군'에 대한 추모가 엇갈렸다. (김진호, 「피노체트 사망…"어둠이 갔다" "장군 추모" 칠레의 두 마음」, <경향신문>, 2012.7.10.)
"중대한 인권 학대를 종식 및 예방하며 권리를 침해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요구하고자 행동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그의 사망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남미판 박정희'라 불린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사망한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인권의 날'인 12월 10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나치가 전 세계에 던진 충격 속에 유엔 총회가 채택(1948.12.10.)한 <세계인권선언>(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2013년 칠레의 작가이자 아옌데의 조카인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는 1973년 9월 1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던 날이 그녀의 삶과 그녀의 나라가 이후 어떻게 변하게 됐는지 '국제앰네스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소회를 전했다. (「독재자 피노체트 치하의 삶: 우리의 자유를 묻던 날」, <국제앰네스티>, 2013.11.)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빅토르 하라 :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조국과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던 전사들"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빅토르 하라. 이들 세 명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이전 사회주의 칠레를 상징했던 인물들이다. 칠레의 혁명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펜이 총이었다면,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대를 살다가 같은 시기에 작고한 빅토르 하라에게는 기타가 총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제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심장을 겨눈 총알이 있었다. 시 그리고 노래. 네루다는 민중 속으로 시를 들고 갔고, 하라는 민중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국과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칠레 군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의 소용돌이에 갇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빅토르 하라,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2008.10.14.)
공산당 출신으로 상원의원까지 지낸 네루다는 1971년 대선에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출마를 사양한 채 아옌데를 적극 지지했었다. 집권에 성공한 아옌데는 네루다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했다. 건강 악화로 2년 여 만에 귀국한 네루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군부와 우파의 아옌데 정권을 겨냥한 '백색 테러'를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1973년 쿠데타 직후 군인들이 네그라섬 그의 집을 수색하러 왔을 때 네루다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12일 뒤인 9월 23일 그는 산티아고의 한 병원에서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늙은 시인의 여린 가슴이 더 이상 반역의 유혈참극을 견뎌내지 못했다. (정인환 기자, 「피노체트의 '탱크와 군화발' 자국 선명한 발파라이소」, <한겨레>, 2005.11.25.)
사망 당시 69세였던 네루다가 전립선암으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는 점에 미뤄 일단 공식적으로는 자연사로 정리됐지만, 망명을 위한 출국 하루 전 돌연 사망한 사실을 두고 독살설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다. 암살 의혹이 끊이지 않자 칠레 정부는 2013년 네루다의 무덤에서 유해를 발굴해 조사에 착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살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잠정 발표했다. (<경향신문>, 2016.4.28.)
노래를 통한 사회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기수였던 빅토르 하라. 그는 군부를 비판하는 노래를 부르며 민중 운동을 지원하고 군부의 쿠데타 모의를 규탄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의 행보는 피노체트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1973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의해 즉시 체포돼 산티아고 에스타디오 경기장에 구금됐고, 심한 구타를 당한 후 나중에 44발의 총탄 자국과 함께 시체로 발견됐다. 누에바 깐시온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을 실천해왔던 그의 손목은 부러져 있었다.
1973년 9월 14일과 15일 집단 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빅토르 하라는 인민연합 찬가 <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를 쉬지 않고 부르며 동지들을 다독거렸다고 한다.
2018년 7월 3일, 칠레 법원은 빅토르 하라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던 8명의 퇴역 군 장교들에게 1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살해를 은폐한 혐의를 받는 9번째 용의자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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