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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흔적'과 마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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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폴란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흔적'과 마주치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㊷]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 레흐 바웬사 下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시리즈 모아보기)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part 3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㊳ 들어가는 글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건 창조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바로가기)

㊴ 넬슨 만델라 上 27년 6개월의 투옥, 교도소의 핵인싸가 되다(☞바로가기)

㊵ 넬슨 만델라 下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우분투!(☞바로가기)

㊶ 레흐 바웬사 上 공산당은 한국에서 과연 좌파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바로가기)

노회찬, 폴란드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흔적'과 마주치다

"사회주의의 꿈 자체가 원래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5년 3월 동유럽을 방문한 17대 국회 해외사법제도 시찰단 Ⓒ노회찬재단

2005년 3월 8일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국회 해외사법제도 시찰단의 일원으로 출국해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 하원 입법위원장과 위원들, 상원의 입법준법위원회 위원장단, 법무부 차관과 면담했다. (노회찬, 「새벽에 쓰는 편지」, <난중일기>, 2005.3.10.)

"폴란드 방문의 주요 목적은 폴란드의 법제 및 사법제도의 운영 현황을 조사하여 제도개선과 입법활동에 참고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정도의 목적이라면 주한폴란드대사를 부르거나 전문가를 초빙해 설명을 들어도 될 일입니다. 

결국 비싼 돈 들여서 방문하는 목적은 직접 만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설명이나 신문과 책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눈빛과 체온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고뇌와 희망을 읽는 일입니다."

이어 노회찬은 폴란드의 이라크 파병 병력 감축에 대해 전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질타했다.

"폴란드는 한국에게 중동부 유럽의 최대투자국이며 폴란드에게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나라입니다. 또 폴란드는 한국에게 중동부 유럽국가 중에서 최대의 무역흑자국입니다. 폴란드는 대우자동차의 진출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아직도 한국자본의 진출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국제적인 문제에 강경한 것은 인상적입니다. 반핵, 반테러, 유엔개혁 등을 강하게 제기하는 모습은 한반도 문제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한국 정부에 비해 꽤 대조적입니다."

"몇 년 전 650만 달러를 들여 새로 지었다는 한국대사관저는…. 인도네시아에서도 한국 공관은 인도네시아 무장경찰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미국과의 오랜 특수관계 때문에 이라크에 참전한 폴란드도 병력을 점차 줄여가고 있습니다. 쿠르축 하원 입법위원장은 이라크의 폴란드군이 머지않아 완전철수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국회의 결의로 이라크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 파병된 한국의 자이툰 부대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 6개월 간 자이툰 부대가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자이툰 부대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자이툰 부대 기지를 '건설'하는 일이었습니다. 쿠르드 자치정부가 한국 측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주둔 대가로 막대한 재정적 요구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해외 주재 대사관이 무장병력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국가정책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눈물 몇 방울로 그 정당성이 회복되진 않습니다."

▲(왼쪽) Palace of Culture and Science in Warsaw(Pałac Kultury i Nauki); (오른쪽) 모스크바대학 본관 건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노회찬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우연히' 스탈린과 마주쳤다. '뜻밖의' 만남에 대한 소감을 노회찬은 <난중일기>(2005.3.9.)를 통해 이렇게 피력했다.

"파리를 거쳐 바르샤바에 도착한 것은 어제 밤 10시. 22층의 호텔 방에 들어서면서 창밖을 보니 놀랍게도 너무나 친숙한 거대한 건물이 호텔 바로 건너편에 서 있었습니다.

스탈린. 바로 그였습니다.

소련의 건축가 레프 루드네프가 이 건물을 설계한 것은 모스크바대학 본부건물 건축공모에서 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이 설계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높이 240m 정면 길이 450m의 웅장한 모스크바대학 본부 건물은 1953년 완공되었습니다. 

그 후 '스탈린 양식'으로 불린 이 건물에 몹시 만족한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똑같은 건물을 6개나 더 건축하게 하였습니다. <모나리자>가 잘 그려졌다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똑같은 걸로 6개 더 그리게 한 것과 마찬가지 처사였으니 이 일을 떠올리는 건축가들의 치욕감을 이해할만 합니다.

바르샤바에서 이 건물의 이름은 '문화과학 궁전'입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의 85%가 파괴된 바르샤바 시의 재건 당시에 스탈린이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루드네프의 모스크바대학 본관 설계도에 의해 1955년 완공된 이 건물은 높이 234.5m로서 바르샤바시의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고 바르샤바의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아직도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에 올라가서 밖을 내다볼 때 가장 좋은 점은 바르샤바에서 이 건물을 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장소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깊은 밤 창밖으로 만 50년 된 '스탈린 양식'을 보며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여덟 번째의 <모나리자>는 동유럽에 이식된 스탈린주의의 건축사적 기록입니다. 여덟 개나 되는 <모나리자>를 보며 우리는 질식해간 개인의 창발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모나리자>를 여덟 번씩이나 그리게 한 우상의 만용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은 민주주의의 비참했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바르샤바는 하루종일 장마비처럼 눈이 내렸습니다."

※ 2004년 17대 총선을 마치고 <신동아> 황호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공포정치, 개인숭배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스탈린을 조용히 호명했다. 이어 사회주의에 대한 관점도 피력했다.(「[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빨강이든 파랑이든 색깔 진하게 가져야"」, <신동아>, 537호, 2004.5.27)

황호택 : 얼마 전 TV에 나와 정형근 씨와 토론하는 것을 인상 깊게 시청했습니다. '인류문명 5000년 중에서 자본주의는 200년밖에 안 된다. 자본주의가 완벽한 체제는 아니지 않느냐. 우리는 자본주의 다음 단계의 사회를 만들어보려 하는데 그것을 사회주의라고 이름 붙였다'고 하더군요. 

노 총장이 말하는 '다음 단계의 사회주의'는 동구와 소련에서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혹은 잔명(殘命)을 보전하고 있는 쿠바나 북한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건가요.

노회찬 : 다르죠. 그들도 나와 같은 이상을 품고 시작했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사회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부족했습니다. 시장을 배제하고 국가통제만으로 경제를 꾸리는 비현실성이 드러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히틀러 독재에 버금가는 공포정치를 불렀습니다. 스탈린 공포정치도 있지 않았습니까. 

국가계획경제의 한계도 드러났습니다. 사실 계획 없는 경제란 없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 자본주의 국가가 더 많은데 폐쇄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문제가 생긴 거죠.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는 제도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특히 개인숭배는 아주 잘못된 거죠. 원래 사회주의는 그런 거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건데 적지 않은 나라에서 개인숭배가 극심했습니다.

황호택 : 동구와 소련의 몰락과 함께 인류를 대상으로 한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것 아닐까요. 봉건주의가 역사의 유물이듯 사회주의도 역사의 유물이 된 것 아닙니까. 사회주의에 아직도 미련을 갖는 사람은 실패를 인정하는 데 따른 수치심 허탈감 그리고 희생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새로운 합리화를 모색하는 게 아닐까요.

노회찬 : 역사의 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죠. 소련사회에서는 유물이 됐지만 사회주의 전반이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자본주의도 역사의 유물입니다. 

사회주의의 경직성에 대해서는 나도 날카로운 비판자입니다. 심지어 레닌도 '관념적 사회주의자보다는 합리적 자본주의자가 더 낫다'는 글을 썼습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전부 다 완벽하고 깨끗하고 합리적이고 머리 좋은 건 아닙니다. 게으른 사람, 꼴통, 이중인격자가 있는 거죠. 킬링필드의 폴 포트도 사회주의자입니다. 사회주의가 인민을 망하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의 꿈 자체가 원래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노회찬은 '좋아하는 정치인' 3인 중 한 명으로 레닌을 꼽은 적이 있다. 레닌은 <유언장>으로 알려진 편지에서 스탈린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스탈린은 너무 거칩니다. 이런 결함은 우리 안이나 우리 관계에서는 충분히 참을 수 있지만, 서기장이라는 자리에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물러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는 방안을 생각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보다 참을성 있고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동지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보다 덜 변덕스럽다는 장점만으로도 다른 모든 면에서 스탈린을 능가하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 말입니다."

본래 이 편지는 1923년 4월로 예정되어 있던 볼셰비키 제12차 당대회에 보내려던 것이었다. 이 문서가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단지 크룹스카야와, 레닌의 구술을 받아 기록했던 두 명의 비서 M.A. 볼로지체바와 L.A. 포치예바 만이 알고 있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이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진 직후, 크룹스카야는 이 문서를 비밀에 부쳐 보관했는데, 레닌의 타계 다음 해(1924년)의 제13차 당대회 직전에야 공개하였다. 이 편지가 레닌의 <유언장>으로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훗날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스탈리나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딸로서 침묵한 나도 공범자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없으니 그 죗값은 나의 것이다."

2009년 노회찬은 전원책과 인터뷰를 하면서 스탈린과 박정희와 헌법 119조를 함께 불러온다.

"스탈린식 국가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하였고 박정희식 국가동원체제 역시 오늘의 현실에는 맞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

헌법 119조가 말해주고 있듯이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더라도,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구제와 조정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원책이 만난 사람들 ④] 어려운 시대에 건강한 좌파의 길을 간다-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2/2)」, <대한변협신문>, 2009.5.18.)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 노회찬의 '안나 까레니나는 누가 썼나'

"'쓰러진 자는 때리지 말라'라는 전 인류적인 관용의 법칙은 스딸린의 도형(徒刑 = 죄인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 형벌: 필자) 수용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쓰러진 자를 오히려 더 때린다! 그리고 서 있는 자는 사살된다."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모든 동물들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1973) 책 표지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1945) 책 표지 갈무리

노회찬.유시민.진중권의 <폭넓은 생각을 위한 역사 속 말빨 사전 101>(웅진지식하우스, 2015)은 66번째 '말빨'로 작가 솔제니친의 말을 추천했다.

"위대한 작가는 말하자면 그의 나라에서는 제2의 정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권도 별 볼 일 없는 작가라면 몰라도 위대한 작가를 좋아한 적이 없다."

'러시아의 양심'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12.11.~2008.8.3.)은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1945년 11월에 투옥되어 8년 동안 강제수용소 생활을 한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솔제니친은 1973년 유형지에서의 인권유린 실태를 생생하게 고발한 <수용소군도>의 출간으로 이듬해 체포, 추방되었다. 오랜 추방생활 끝에 1994년 러시아로 돌아온 후 솔제니친은 옐친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1998년 옐친 정부가 그에게 훈장을 서훈하기로 했음에도 그는 "몇몇 권력자들 때문에 러시아는 실패한 국가로 전락해버렸다. 나는 이 상을 수여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절했다.

2008년 솔제니친이 타계하자 <에이피>(AP) 통신 등 주요 외신들은 이렇게 전했다.

"러시아의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강제수용소'로 대표되는 옛 소련 체제의 억압성을 신랄하게 폭로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성도 동시에 지적하는 등 끊임없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갈증을 표출해왔다." (<한겨레>, 2008.8.5.)

한편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알려진 <동물농장>(Animal Farm)은 영국의 작가이자 영국 독립노동당의 당원이기도 했던 조지 오웰(George Owell)이 1945년에 출판한 풍자 소설이다. 전체 줄거리는 존스 농장에 살던 동물들이 가혹한 생활에 못 이겨 주인을 쫓아내고 직접 농장을 운영하지만, 결국은 혁명을 주도했던 권력층의 독재로 농장이 부패해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메이저 영감'은 레닌을 상징하는, 농장의 모든 동물의 존경을 받았던 늙은 수퇘지다. '나폴레옹'은 독재자 돼지로 스탈린을,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상징한다. 이들은 '매너 농장'(농노가 해방되지 않은 제정 러시아)에서 봉기를 일으켜 농장주 '존스 부부'(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를 상징)와 일꾼들을 쫓아내고 동물농장을 선포한다.

봉기 이후에 각종 단체를 조직하는 열성적 혁명가 스노볼과는 반대로 나폴레옹은 비밀리에 '블루벨'이 낳은 개(비밀경찰) 9마리를 친위대로 키운다. 나중에 스노볼과 풍차 건립 문제(경제개발 문제)를 두고 크게 대립하게 되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친위대인 9마리의 개들로 스노볼을 축출하고 독재자의 자리에 오른다.

'독재자 스탈린'의 시대에 대해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안나 까레니나는 누가 썼나」(2008.8.1.)는 글을 올렸다. '오래된 얘기 하나'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질식시킨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0년대를 주된 무대로 한,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이다. 길지만 그대로 옮겨본다.

8월 1일 (금) 흐리고 비

중복과 말복 사이이니 진짜 무더위는 이제 시작인가? 오래된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어느 날 소련공산당 니키타 흐루시쵸프 서기장이 소련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신무기개발의 최일선을 담당하고 있는 젊은 과학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서기장은 소련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과학자들의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장 자신이 모스크바 스탈린공대를 졸업한 이과 출신인데다 평소 자연과학도들도 인문사회과학에 대해 일정한 교양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한 젊은 과학자에게 서기장이 질문했다.

"연구원 동무는 <안나 까레니나>를 누가 썼는지 알고 있지?"

똘스또이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기 위해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이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젊은 과학자는 난처한 얼굴로 서기장 얼굴을 쳐다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알지 못합니다. 서기장 동무."

당황하기로는 서기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재차 물었다.

"<안나 까레니나>를 누가 썼는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이미 서기장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젊은 과학자가 답을 하는데 아까보다 더 긴 시간이 흘렀다. 골똘히 생각하던 끝에 그가 다시 말했다.

"정말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쓰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흐르시쵸프 서기장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크렘린으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위원회(KGB) 책임자를 호출하여 질책했다.

"<안나 까레니나>를 누가 썼냐고 물었는데 자기가 안 썼다고 대답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도대체 KGB가 어떻게 활동하길래 이런 답변이 다 나오나?"

비록 정치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스탈린의 우상숭배를 날카롭게 비판해온 서기장은 스탈린식 공포정치의 도구가 되어온 KGB에 대해서도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터였다. 며칠 후 KGB 책임자가 밝은 표정으로 흐루시쵸프 앞에 섰다.

"서기장 동무, 지난번 말씀하신 이후 국방과학연구소의 KGB 책임자가 그 젊은 과학자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장시간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 젊은 과학자는 자신이 <안나 까레니나>를 썼다는 것을 자백하였습니다."

미소 냉전시절 서방측에서 소련을 폄하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공세 차원에서 만들어낸 '유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게 들리는 것은 바로 KGB가 담당한 실제 역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6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시민들은 재선이 불가능했던 옐친이 다시 당선된 것은 스탈린의 도움이라고 입을 모았다. 6년간의 실정으로 낙선이 확실시 되던 옐친을 구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TV채널은 스탈린시대의 공포정치와 KGB의 활약을 다룬 드라마를 선거기간 내내 틀어댔다는 것이다.

이어서 노회찬은 "이 무더운 여름 우리나라의 KGB는 무엇을 하고 있나?"면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개혁에 대해 꼬집었다.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면서 엉뚱하게 국내정치사찰에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어온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 

취임 6개월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명박 정부의 그간의 행태로 볼 때 국정원 개혁은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을 건넌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건너 5공의 안기부나 3공의 중앙정보부로 이미 전환했을 지도 모른다. 양지에서 일하는 경찰과 검찰이 이미 시대를 건너간 것처럼.

국정원이 '남산시절'이나 '남영동시대'로 돌아간다면 이제 해외정보는 누가 맡아야 하나? 

(…) 

중복은 놓쳤지만 말복엔 아무래도 잘 먹어야 할 것 같다. 4년 6개월을 버티고 싸우고 국가기관이 해야 할 일까지 대행하려면 체력보강이 우선이다!"

"한국에도 '아우슈비츠'가 있었다!" :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한국판 아우슈비츠, 부산 형제복지원'

▲폴란드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출입구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폴란드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출입구에 걸려 있는 글귀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아우슈비츠 기념관 벽면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다.

아우슈비츠는 원래 강제 노동 수용소였으나 나중에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로 바뀌었다.

2005년 11월 1일 유엔은 나치 독일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된 유대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된 1945년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Holocaust)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정하는 것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소장: 루돌프 회스)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세운, 전체 28동으로 이뤄진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다. 규모가 큰 데다 무엇보다 증거가 되는 시설이 상당 부분 남았기 때문에 절멸 수용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우슈비츠는 고유 명사로 쓰이기보다는 '나치의 절멸 수용소'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 쓰인다. 

이곳에서 처형된 수백만 명 가운데는 유태인을 비롯해 공산주의자, 장애인, 동성애자, 로마니(집시)가 있었다. 절멸 수용소에서 살해당한 유태인의 수는, 폴란드 국내에서의 거의 모든 유태인을 포함하고, 나치스의 대량학살로 살해당한 유태인 전체의 약 반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 주목할 대목은, 나치 독일이 장애인과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가 달랐다는 점이다. 익히 알다시피 유대인 학살의 배경은 순혈주의와 인종주의라는 정치적 동기다. 아리안 독일에 어울리지 않는 '부적절한 자들'을 제거한 것이다. 

반면, 같은 혈통의 장애인들을 학살한 까닭은 독일 사회의 합리성, 효율성, 생산성 때문이다. 노동할 수 없는 자들, 참전할 수 없는 자들, 그래서 국민의 세금을 축내는 자들, 한 마디로 '살 가치가 없는 생명들'을 제거해야 국가 효율성이 극대화된다는 논리였다. (<「장애인 학살의 역사도 기억하라!」, <에이블뉴스>, 2018.1.26.>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93년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도 아우슈비츠였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의 가족도 다른 유태인 1015명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수용되었다. 그중 절반에 이르는 어린이, 노인 549명은 곧바로 가스실에서 학살됐다. 안네의 어머니 에디스는 1945년 1월 6일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안네와 언니 마곳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졌다가 1945년 3월 티푸스와 굶주림으로 숨을 거뒀다. (<경향신문>, 2010.8.4.)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17) 책 표지 갈무리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이것이 인간인가-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돌베개, 2017)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간의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 극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는 성서의 모든 일화들이 바람처럼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던 것은 사실이다."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들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다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 2016년 폴란드 정부는 나치의 강제수용소를 '폴란드 수용소'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최고 징역 3년형을 선고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등 나치 강제수용소 운영에 폴란드가 관여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향신문>, 2016.8.18.)

▲"새마을 정신으로 유신의 역군이 되자."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부산 형제복지원 입구 모습 (사진 출처: 부산시)

19대 국회 때인 2012년 11월 27일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노회찬 정의당 국회의원은 '언론개혁시민연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과 함께 한종선·전규찬·박래군이 쓴 <살아남은 아이-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문주, 2012) 출간 보고회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할 수 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형제복지원 사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폭력과 인권유린.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간 복지원 자체 기록으로만 513명이 사망하였고, 다수의 시체가 의대에 팔려나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사건. 

가히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87년 민주화 투쟁의 열기 속에 묻혀 버렸고, 끝내는 국가에 의해 면죄부가 발행된다. 하지만 복지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복지원 피해자인 한종선이 증언하고 문화연구자 전규찬과 인권활동가 박래군이 함께 한 <살아남은 아이>는 지옥에 관한 기록이다. 우리들의 공모로 빚어져, 우리를 대신하여 끌려간 이들로 채워진 지옥. 역사는 반복되며, 인권이 끝나는 곳에서 지옥은 시작된다. 이 반복을 멈추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기억과 마주해야 한다."

이들은 묻는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업가' 대 복지시설에 수용된 장애인, 부랑인, 노숙인, 고아. 각자 서로 다른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그 동안 어느 쪽 말을 더 신뢰하고, 비호해왔을까."

'제2의 삼청교육대'로 불리는 부산 형제복지원은 공무원이 동원돼 1975~87년 '부랑자 선도' 명목으로 아이부터 어른까지, 무고한 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던 곳이다. 1987년 당시 수용자만 3975명, 연인원 2만1685명인 전국 최대 규모의 허울뿐인 '부랑인 보호시설'이었다.

20대 국회 때인 2016년 7월 6일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국회의원은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법률안'을 대표발의 했다. 노회찬도 뜻을 같이 해 총 73명의 공동발의자에 정의당 의원들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온갖 고문과 구타, 폭력에 시달리며 인권을 짓밟혔던 그들은 그곳을 벗어난 이후에도 십중팔구 밑바닥 인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회는 그들의 아픔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무언가 억울했지만, 누구한테 항변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지독한 불운'이라 여기며 그저 숨죽이고 지내야만 했다. 자신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실체는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한국판 아우슈비츠의 피맺힌 절규를 기록해 달라」, <한국일보>, 2020.2.23.)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피해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잡혀갔는지, 폭행을 당했는지, 누가 죽었는지, 살아남은 이들은 퇴소 후 어떤 아픔을 겪고 어떻게 이겨 냈는지를 당사자 이름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자는 거예요. 

평범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 거대한 힘에 의해 송두리째 바뀐 과정을 기록하자는 거죠."

아우슈비츠는 폴란드만이 아니라 불과 수십년 전 한국에도 있었던 것이다!

2020년 7월 부산시 차원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가 발족, 활동에 들어갔다.

※ 201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아 '2018년 인권의 날' 기념식이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노회찬에게 추서됐다.

뒤이어 우리 사회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세계인권선언문의 주요 조항을 참석자들이 낭독하는 순서가 마련됐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실종자, 유가족) 모임'의 대표 한종선은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떠한 차별도 없이 법의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위반되는 어떠한 차별과 그러한 차별의 선동으로부터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제7조를 낭독했다.

한종선의 낭독을 듣는 순간, "대한민국에서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명만 평등하다"고 질타하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세상"에 대해 분노했던 노회찬의 모습이 스치듯 겹쳐 지나갔다.

닫는 글 : "10.08㎡ 대 2.58㎡"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형집행정지 청원서(2019.4.24.) 갈무리

2019년 4월 24일 대한민국 20대 국회의 70명 국회의원들(자유한국당 67명, 대한애국당 1명, 무소속 2명)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형집행정지를 청원하는데 느닷없이 '아우슈비츠'가 등장했다. '아우슈비츠', '잔인한 폭력' 등 자극적인 단어를 동원하면서 박근혜와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국정농단이라는 본질을 덮으려 한 것이다.

"우리는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든 오욕의 역사를 지적했던 밀턴 마이어의 경고를 떠올리면서 나치 당시 아우슈비츠를 묵인했던 저들의 편견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한 잔인한 폭력을 묵인하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이나 한 치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의 사설 「박근혜 수감을 아우슈비츠에 비유하다니 제정신인가」(2019.4.25.)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정지 요구는 무엇 하나 요건에 맞지 않는다"면서 하나하나 짚어본 뒤 이렇게 질타했다.

"더욱 경악할 일은 이들이 박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는 감옥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유한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의 나치 정권이 150만 명의 수용자를 독가스 생체실험 등으로 잔인하게 학살한 곳이다. 

시민들의 뜻에 따라 단죄된 전직 대통령이 수감된 곳을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다니 말문이 막힌다. 이곳이 아우슈비츠라고 하면 수많은 다른 수형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극적인 거짓말로 혹세무민한 의원들은 즉시 사과하기 바란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 청원서에 이름을 올린 70명 국회의원들이 과연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불린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법률안'(대표발의: 진선미)에 대해 어떤 의사를 표명했을까 하는 것이다. 아니,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을 때 이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청원서 제출 며칠 전인 2019년 4월 1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국민들의 바람' 운운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성의 몸으로 오랫동안 구금 생활을 하고 계신다. 아프시고 여성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계신 것을 고려해 국민들의 바람이 이뤄지길 바란다."

※ 참고로 2019년 4월 전후의 여론조사에 드러난 '국민의 바람'은 황교안의 발언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석방 반대 의견이 훨씬 더 많게 나온 것이다.

- (2018.12.7. 리얼미터 조사) '박근혜 석방·불구속 재판…반대 61.5% vs 찬성 33.2%'

- (2019.4.19. 리얼미터 조사) '박근혜 석방, 반대 62.0% vs 34.4%'

- (2020.2.3. 리얼미터 조사) '박근혜 석방 논의, 반대 56.1%, vs 찬성 39.3%'

그에 앞서 황교안과 고교 동창인 노회찬 20대 국회 정의당 원내대표는 2017년 10월 8일 보도자료를 통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인용하면서, "변호인 접견은 헌법이 보장하는 피고인의 권리이지만 일반 수용자들은 변호사 비용 등 때문에 1일 1회 접견을 상상하기 어렵다"며 "국정농단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돈과 권력이 있으면 매일 변호인을 접견을 하며 '황제 수용생활'을 할 수 있다는 특권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서울구치소 수감 생활에 대해 꼬집었다.

8월 24일 기준으로 박근혜는 구금일수 147일 동안 148차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78일 동안 237회,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205일 동안 209회, 최서원(최순실)은 285일 동안 226회에 걸쳐 변호인을 접견했다.

▲출처: 노회찬의원실(2017.10.8.) 보도자료 갈무리

노회찬의 지적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일반 수용자들이 머무는 수용실보다 넓은 면적의 수용실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 전 대통령은 현재 TV, 사물함, 싱크대, 침구, 식기, 책상, 청소도구 등이 갖춰진 10.08㎡ 면적의 수용실을 혼자 사용하고 있다. (이효상 기자, 「노회찬 "박근혜 구치소에서 하루 1번 꼴로 변호인 만나…황제 수용생활"」, <경향신문>, 2017.10.9.)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 감사원 국감장(2017.10.19.) ⓒ노회찬재단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드러누워 일반 수용자의 과밀 수용 실태를 보여주고 있는 노회찬 ⓒ노회찬재단

2017년 10월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가 열린 서울 종로구 감사원 국감장. 노회찬은 황찬현 감사원장을 향해 "지난 12월에 헌법재판소가 서울구치소 내 과밀수용에 관해 위헌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수용자 1인당 가용면적은 1인당 1.06㎡(약 0.3평)에 불과했다. 알고 있나"고 물은 뒤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드러누웠다. 

이는 박근혜가 유엔 인권기구에 "구치소에서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노회찬이 "더럽고 차가운 시설을 고치지 않은 책임은 (대통령이었던) 본인한테 있다"고 비판하기 위해 직접 선보인 퍼포먼스였다.

노회찬은 "제가 한번 누워보겠습니다. 여기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누운 걸 보셨겠지만, 옆 사람과 맞닿습니다. 구치소에서 수용자에게 지급하는 일인용 매트리스가 있는데 매트리스 면적이 이것(1인당 면적)의 2배입니다. 6명이 수용되면 6개가 지급되는데 안에 다 깔 수가 없어 3개를 깔고 삽니다"고 일반 수용자들의 과밀수용 문제를 감사원이 직무감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이 인권침해라고 했는데, 박 전 대통령이 사는 거실 면적은 10.08㎡로 일반 수용자의 10배입니다. 제소할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일반 수용자입니다"고 꼬집었다. (이승준 기자, 「노회찬 의원이 국감장에 신문지 깔고 드러누운 사연은」, <한겨레>, 2017.10.20.)

오늘의 기록이야기 <바웬사와 노회찬> 편은 노회찬의 <난중일기> 중에 첼로 연주와 함께 '아우슈비츠'가 등장하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며 마칠까 한다. 노회찬이 떠나고 사흘 뒤인 2018년 7월 26일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서 손석희는 노회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의 곡. <솔베이지의 노래>. 서글픈 멜로디와 애잔한 가사로 시대를 넘어선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도 이 곡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첼로를 연주하던 정치인. 지난 2005년, 그가 대중의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도 바로 이것이었으니까요."

손석희가 말한 2005년의 연주는 5월 1일에 이뤄졌다. 노회찬은 미공개 <난중일기>(2005.5.1.)에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아우슈비츠를 슬며시 끌고 와 당시의 곤혹스런 심경을 밝혔다.

"부산한 아침이었다. KBS1 <아침마당>팀, KBS2 <이홍렬 박주미의 여유만만>팀, SBS <임성훈의 세븐일레븐>팀이 한 시간 간격으로 집을 방문하여 좁은 방안을 휘젓고 돌아갔다. 메이데이 집회 참석차 출발해야 할 시간인데 <임성훈의 세븐일레븐> 팀은 사전 예고도 전혀 없이 첼로를 들고 나타났다. 강제로 켜는 첼로. 아우슈비츠에서도 없던 일이다. 망설이다 활을 잡았다. 20년 만이다."

"강제로 켜는 첼로, 아우슈비츠에서도 없던 일"이라는 노회찬의 말글과는 달리, 사실 아우슈비츠에는 강제로 켜는 첼로, 첼리스트가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니타 라스커-발피슈(Anita Lasker-Wallfisch)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유대인 음악인들이 수용되는 감옥 '블록15'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가스실로 끌려갔고 두 사람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락스(1901~1983)와 여자 첼리스트 아니타 라스커-발피슈는 1948년 회고록 <다른 세상의 음악>으로 끔찍한 수용소 시절을 고발했다. (정상영 선임기자, 「아우슈비츠서 살아남은 두 음악가 이야기」, <한겨레>, 2013.9.9.)

▲이경분의 <수용소와 음악>(성균관대 출판부, 2021) 책표지 갈무리

한나 아렌트가 나치수용소를 '폭력의 실험실'이라고 칭했다면, 음악은 이 실험실의 '마취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몬 락스는 음악이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평화롭게 죽음으로 행진"하게 했다고 회상하며, 이를 사람들의 넋을 홀리는 고대 그리스의 '사이렌 음악'에 비유했다. (이경분의 <수용소와 음악> 중에서)

※ 아니타 라스커-발피슈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신의 첼로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차출되어서 하게 된 일은 수용자들의 강제 노역을 하기 위해 공장을 향해 이동할 때 그들을 위해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후에는 수용소의 밖에 앉아서 돌아오는 그들을 위해 연주를 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언제 누군가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고 나의 내일마저 오늘이라는 시간이 보장해 주지 못하는 곳에서 음악은 수용자들에게도 위로를 줬지만 무엇보다 그 음악에서 희망을 얻은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연주가 계속 될수록 그녀의 희망은 커졌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안동형, 「아우슈비츠에서 희망을 준 첼로리스트 '아니타 라스커-발피슈'」, <위드인 뉴스>, 2020,1.31)

이경분의 <수용소와 음악>(성균관대 출판부, 2021)의 「(3부) 살인 공장 아우슈비츠의 음악: 폭력 속에 명령 당한 인간의 존엄성」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아우슈비츠는 효율적으로 인간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 강제 집단수용소의 대명사다. (…) 아우슈비츠는 단일 수용소가 아니라, 수용소 복합체였다. 

(…) 

아우슈비츠는 가스로 인간을 살육하는 최대 규모의 '절멸 수용소'의 대명사가 되었다. '살인 공장' 아우슈비츠에서도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르케나우에서만 최대 4개의 오케스트라가 있었을 정도다. 무엇보다 아우슈비츠에서 음악은 가스실로 향해야만 했던 이들에게 '죽음의 향수이자 생애 마지막 위로'였다."

<수용소와 음악> '책소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삶의 비극과 모순이 또 있겠는가. 저자는 여기서 주관적 판단 대신 생존자들의 육성을 그대로 옮겨놓는다. 당시 소녀오케스트라로 활동하며 '음악 때문에 살았다'고 증언한 아니타 라스커-발피쉬(1925~ )를 비롯해, 파니아 페네론(1908~1983), 에스더 베자라노(1924~ ) 등의 인터뷰와 회고는 읽는 내내 충격으로 다가온다."

소설가 장정일은 「아우슈비츠의 음악은 끔찍한 고문이었다」(<시사인>, 711호, 2021.5.7.)를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가 체코에 세운 테레지엔슈타트와 폴란드에 세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음악이 흘러넘쳤다. (…) 

오케스트라 단원에게는 작업이 면제되고 더 나은 식단이 제공되었다.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던 그들에게는 최상의 연주만이 그들의 생명줄이었다. 그렇다면 갖가지 상황에서 강제로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수용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청아출판사, 2005)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음악을 들으며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다진 반면,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와 같은 아우슈비츠 체험기를 남기고 자살한 프리모 레비는 그 경험을 지옥같이 끔찍한 고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상반된 태도는 두 사람의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대변하지 않는다. 진실은 수용소 소장의 명령으로 성탄절 전날 여성 병동의 환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었던 시몬 락스의 증언에 있다. 초반에는 모든 여성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특히 폴란드 여자들은 음악이 울음소리에 묻힐 정도로 오열했다. 

그러나 두 번째 연주가 시작되자 눈물은 비명으로 이어졌다. '그만! 그만! 여기서 나가! 꺼져! 조용히 죽게 내버려둬!' 음악은 언어가 없는 장소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의 온갖 언어가 깃들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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