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시리즈 모아보기)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part 3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㊳ 들어가는 글 (☞바로가기)
노회찬, '롤리흘라흘라'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마주치다 : "사필귀정의 진정한 승리를 보여주다"
증오, 그리고 기도
2007년 <뉴욕 타임즈>의 빌 켈러 편집인이 묻고 넬슨 만델라가 답한 내용이다. (박찬수, 「'증오의 정치' 넘는 후보가 이긴다」, <한겨레>, 2021.11.18.)
만델라는 모든 인간의 깊은 마음속에는 자비와 관용이 있다는 점을 늘 잊지 않았다.
노회찬이 떠나고 1년쯤 지난 어느 날 배준호 전 정의당 부대표는 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적 대화를 회상하며 1주기 추모의 글을 올렸다. (배준호, 「'호빵맨' 노회찬을 기억하며, 더 많은 '원펀맨'이 등장하길」, <프레시안>, 2019.7.19.)
"세계 곳곳에서 더 많은 만델라로 부활하시길…"
2013년 12월 6일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SNS에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를 함께 이끌어 온 오랜 벗인 투투 성공회 대주교는 "마디바(만델라 전 대통령의 존칭)는 동시대인들을 초월해 있었으며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도덕성과 진실성의 거장이었다"라는 말로 고인인 된 벗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했다.
또한 "아프리카 밖에서 비교할 만한 인물을 찾는다면 그는 남아공의 조지 워싱턴 같은 인물로 역사에 전해질 것"이라면서 남아공 민주주의와 평등의 초석을 다진 그의 업적을 기렸다.
그는 "마디바는 대통령에 재임했던 단 5년의 기간 동안 해방과 화해의 상징이 됐고 정치적 이해를 뛰어넘은 모든 이들에게 현대화되고 민주화된 남아공의 창건자로 사랑 받았다"고도 말했다. (<기독일보>, 2013.12.7.)
유엔과 세계 각국 정상들도 긴급 성명을 통해 애도를 표했다. (윤현, 「만델라 타계, 세계 각국 정상들 '애도 물결'」, <오마이뉴스>, 2013.12.6.)
정의당과 노회찬도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같은 날 노회찬은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 말릭 벤젤룰 감독의 <서칭 포 슈가맨>(Searching for Sugar Man) 음반 2장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남아공의 신비로운 포크록 가수를 찾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2012년 8월 9일 제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의 개막작으로, 개막식에서 영화를 본 노회찬은 이후 트위터를 통해 <서칭 포 슈가맨>을 알리고 추천했다.
유재석과 유희열이 진행한 JTBC의 <투유 프로젝트-슈가맨>도 <서칭 포 슈가맨>에서 프로그램명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 투사에서 첫 흑인 대통령까지", 넬슨 만델라는 누구? : 27년 6개월간의 감옥 생활과 남아공 인권운동의 상징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극단적인 인종차별 국가로 오랫동안 악명을 떨쳤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남아공의 아버지', '인종차별을 종식시킨 검은 대륙의 별', '롤리흘라흘라' 만델라.
넬슨 만델라(Nelson R. Mandela, 1918.7.18.~2013.12.6.)는 1918년 7월 18일 남아공 음베조에서 템부 부족장 가문인 마디바 가문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그에게 붙여준 롤리흘라흘라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말썽꾸러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한다. 만델라는 기독교 계통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은사로부터 '넬슨'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얻게 됐다. 나중에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가문 이름을 따 '마디바'로 부르곤 했다.
학생 시절 만델라의 생각과 시야는 자신의 고향과 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준 백인들에게 고마워하며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공무원이나 통역관이 되는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흑인 젊은이였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소년 시절의 자유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리고 젊은 시절 이미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는 자유를 갈망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와 자매들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됐다." (넬슨 만델라, 김대중 역, <만델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두레, 2006.)
1942년 변호사가 된 뒤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와 만나게 됐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게 됐다. 그의 말처럼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치화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만델라는 반(反)인종차별 활동가로 활약하며 인권운동과 빈곤퇴치 등에 앞장섰다.
ANC 내에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만델라에게 1960년 3월 21일 69명의 사망자와 18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샤프빌 대학살(Sharpeville massacre) 사건'은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이를 계기로 투쟁 방식을 비폭력 저항운동에서 무장투쟁을 통한 저항운동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1961년 만델라는 지하무장조직인 '민족의 창(움콘토 위 시즈웨, MK)'을 창설하고 초대사령관이 돼 무력투쟁을 추구하는 투사가 됐다.
지하생활을 계속하던 1962년 8월 전설적인 투사였던 '검은 뚜껑별꽃' 만델라는 경찰에 체포됐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만델라가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연설이기도 하다.
사형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절박함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만델라는 1964년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범아프리카회의(PAC)를 비롯한 모든 저항단체들의 단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로벤 섬, 폴스무어 등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보낸 27년 6개월간의 감옥 생활은 만델라와 남아공 정부 모두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감옥에 있는 만델라는 이제 남아공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 돼 있었다.
※ 만델라는 1964년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위치한 로벤섬의 악명높은 교도소에서 환갑을 지내는 등 18년의 옥고를 치렀다. 죄수번호 46664였다. 64년에 로벤 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그는 1982년 케이프타운에 소재한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송됐다가 1988년 웨스턴케이프주 팔에 있는 빅터 퍼스터 교도소로 옮겨져 1990년 2월 출감했다.
인내를 갖고 백인 정부와 대화한 끝에 만델라는 마침내 자기보다 먼저 많은 동지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고, 1990년 2월 11일 자신도 약 1만 일 동안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석방됐다. 백인 정권은 만델라의 높아진 위상과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방된 후에도 인종차별을 없애고 흑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만델라는 1993년 드 클레르크와 함께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4년 4월 27일 마침내 340여 년 간의 인종차별을 종식시키는 남아공 최초로 흑인이 참여하는 총선거가 실시되고,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 '만델라 효과'(Mandela effect)와 '가짜뉴스'(fake news, junk news)
꽤 오래전부터 우리는 뉴스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넘치는 뉴스 범람과 함께 '가짜뉴스'도 활개를 치고 있다. 어떤 이의 사익과 정치적 이익, 혐오와 불신을 부추기는 가짜뉴스의 백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전국적인 위기를 틈탄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만델라 효과'라는 말이 있다. 존재하지 않았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거짓된 기억을 공유하는 현상으로, 한마디로 거짓 기억을 단체로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유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만델라가 감옥에 수감돼 있던 1980년대에 옥사했다고 기억하는 현상에서 비롯됐다. 그가 27년이라는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죽었다는 보도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가 감옥에서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가짜뉴스는 만델라 효과를 부추긴다. 가짜뉴스라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질타도 받고 사람들의 비난도 받게 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착각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가짜뉴스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에 새로운 가짜를 덧붙여 만든다. 그래서 진짜처럼 보인다. 가짜뉴스를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다. 때문에 매혹적이지만, 가짜뉴스를 만들어 유통하는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그럴듯한 팩트와 편견을 이용해 "이 뉴스를 통해 누가 이익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가짜뉴스를 판별할 수 있다. 출처를 주의깊게 살펴보자. 가짜뉴스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공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대다수의 가짜뉴스는 출처를 정확히 밝히지 못한다. 그럴듯하지만, 믿을 만한 출처가 없는 뉴스는 의심해봐야 한다. 이제 뉴스를 의심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가짜뉴스가 매혹적인 이유, 그리고 가려내는 방법」, <TECHIT>, 2020.2.27.)
'화해와 용서의 세계 지도자' 넬슨 만델라 : "진정한 자유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삶을 사는 것"
1994년 5월 10일,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취임식이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열렸다. 342년간의 백인 지배를 끝내고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답게 1200여 명의 귀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런데 그 취임식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취임사를 마친 만델라 대통령은 세계 각국에서 온 정치인들을 순서대로 소개했다. 그리고 "많은 귀빈을 모실 수 있게 돼 매우 영광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은 이분들이 함께해 준 것"이라고 말하며 세 명의 귀빈을 소개했다.
그들은 만델라가 18년간 복역한 남아프리카의 교도소 기지인 로빈 섬의 교도관 그레고리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때의 수인번호 46664번! 46세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정치범 만델라는 인간성을 죽이기 위해 가두어 놓은 감옥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며 교도관들과 친구가 됐다.
이 장면은 27년 6개월의 투옥에도 불구하고 보복 없는 포용과 화합으로 남아공을 개혁해 나가겠다는 만델라 대통령의 정책과 정치철학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을 종식시킨 검은 대륙의 별, '넬슨 만델라(Nelson R. Mandela)'」, <대통령기록관-대통령의 특별한 만남>)
'화해와 용서의 세계 지도자'로 우뚝 선 만델라는 취임연설에서 이렇게 밝혔다.
만델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 노회찬.유시민.진중권의 <폭넓은 생각을 위한 역사 속 말빨 사전 101>은 22번째 '말빨'로 넬슨 만델라의 "진정한 자유란 단지 사슬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를 뽑았다.
영국 전 수상 마가레트 대처와 현 미국 부통령 딕 체니는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유대인 출신의 딕 체니는 군사력에 의한 미국 주도의 세계재편을 꾀하며 이라크 침공과 대북한 강경정책,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중동사태의 격화 등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는 신보수주의자 네오콘의 핵심인물이다. (김성호, 「넬슨 만델라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내가 만난 아프리카] 로벤 아일랜드에서 생각하는 '무지개 나라'의 꿈」, <오마이뉴스>, 2008.1.2.)
네오콘(neocon, neo-conservative의 줄임말)의 핵심이자 부시 행정부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테러와의 전쟁을 이끈 전쟁광' 딕 체니와, "흑인과 백인 모두가 가슴 속에 어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무지개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을 꾼 넬슨 만델라.
과연 두 사람 가운데 진짜 테러리스트는 누구였을까?
대한민국 국회의원 가운데 처음으로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애쓴 노회찬의 모습에서, '인종차별 철폐'에 앞장선, '무지개 나라'를 꿈꾼 만델라의 흔적을 조금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7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된, 노회찬의 차별금지법 1조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노회찬은 법안 제안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넬슨 만델라의 날'과 노회찬
2013년 7월 18일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대성당 앞마당에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넬슨 만델라의 날' 행사가 열렸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트위터를 통해 '2009년 유엔에서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그의 날로 정하고, 전 세계인이 이날 그가 인권과 평화에 헌신해온 67년을 기려 최소 67분 동안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을 하도록 권장했다'며 행사를 제안했다.
이 제안에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과 송경용·류시경 성공회 신부가 적극 호응하면서 공감한 시민들이 늘어나 '만싸한'(만델라를 싸랑하는 한국사람들) 모임을 꾸려 행사를 준비했다. 7월 18일 '만싸한'은 촛불을 밝히며 만델라의 95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그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촛불 행진과 합창 등으로 67분간 행사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는 특히 만델라의 소박한 품성에 맞게 경건하면서도 자유롭고 모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열려 참석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생일 케이크 위에 만델라의 나이를 뜻하는 아흔 다섯 개의 촛불이 켜지자 참석한 모든 인원들이 일제히 "생일 축하합니다 만델라!"를 외치며 촛불을 껐다.
연단도 없고 무대도 없었다. 귀빈석도 일반석도 없었다.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공연을 펼쳤다. 유명인, 정치인이나 일반 시민이나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없었다. (…)
노회찬‧김진애 전 의원, 김성재 연세대 석좌교수, 소설가 유시춘 등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모두가 스스럼없이 시민들과 어울려 행사를 즐겼다. 참여한 시민들도 만델라 초상화 앞에 촛불을 하나씩 가져다 놓는 플래시몹, 만델라의 생일축하, 시 낭송회, 상록수 노래 합창 등 대부분 연설을 듣기만 해야 하는 공식 행사들과 달리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많았다. (이현우 기자, 「만델라, 어서 일어나세요」, <아시아경제>, 2013.7.19.)
2020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타계한 지 7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55%는 만델라가 그 어떤 사람보다 아프리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전역 14개국(콩고, 에티오피아, 가봉, 가나, 케냐, 나이지리아, 말리, 말라위, 르완다, 세네갈, 남아공, 토고, 잠비아, 짐바브웨)에서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 그가 남긴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응답자의 86%가 밝혔다. (<매일경제>, 20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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