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권리를 보장해야 할까? 만일 이런 질문을 미국이나 유럽, 호주 등 세계 주요국에서 묻는다면 자연스럽게 "노동자니까 당연히 노동법을 적용해야지"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플랫폼에서 일하는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하고,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해 단체협약을 체결하며, 산업재해 등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알고리즘을 투명하게 공개해 기본권을 보장하는 소식들이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전세계에서 들려오고 있다. 어떤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는지 <인사이드경제>가 한번 정리해 보았다.
미국 캘리포니아 AB5 법 : 입증책임 전환의 법리
2019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플랫폼 노동을 프리랜서가 아니라 노동자로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AB5(Assembly Bill 5)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0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이 법안은 일하는 사람이 노동자인지 프리랜서(독립계약자)인지에 대해 'ABC 테스트'를 통해 검증하도록 하고 있다.
ABC 테스트란 일하는 사람이 위의 3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지를 조사하는 것을 뜻한다. 3가지 모두를 만족시켜야만 프리랜서(독립계약자) 지위가 인정되며, 어느 한 가지라도 만족시키지 못하면 노동자로 인정해 노동법이 정하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ABC 테스트의 내용만이 아니다. 저 테스트 내용을 만족하는지 여부를 누가 입증해야 할까? 한국의 경우 노동자가 자신이 노동자임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AB5 법안의 경우 사용자가 노동자가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노무를 제공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로 추정한다. 만일 이 추정에 이의가 있다면 사용자가 '노동자 아님'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입증책임을 사용자에게 부담시킴으로써 일하는 사람의 기본값을 노동자로 정한 획기적인 법리라 할 수 있다.
영국·네덜란드 법원 판결 : 우버 기사 모두 노동자
2021년 2월, 영국 대법원은 우버 운전기사가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무제공자(worker)에 해당하며 따라서 이들에게 노조 결성, 최저임금, 유급휴가 등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특히 대법원은 우버 기사 임금 산정의 기준이 되는 노동시간에 대해 앱에 접속한 시간, 즉 로그인 후 로그아웃 할 때까지의 시간 모두가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지난 글을 포함해 <인사이드경제>에서 몇 차례 소개한 바 있지만, 다음 승객 호출을 기다리는 대기시간도 노동시간으로 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을 녹여서 노동자성을 부정하고 프리랜서처럼 둔갑시키는 플랫폼 자본의 기술에 철퇴를 가한 순간이었다.
똑같은 판결이 네덜란드에서도 올해 9월에 나왔다. 네덜란드 법원은 우버 기사에 대해 "업무 형태의 모든 지표가 고용계약과 똑같다"며 우버 기사를 노동자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들 앱 기반 모빌리티 기사들에게도 노동법에 보장된 모든 권리가 주어져야 하며, 택시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단체협약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독특한 것은 이번 소송을 제기한 것이 네덜란드 노조총연맹에 우버가 5만 유로(약 7000만 원)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함께 나왔다는 점이다. 우버가 앱 기반 모빌리티 기사들에게 단체협약을 적용하기 위한 교섭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금전적 책임도 지도록 한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가 빼앗겨온 것에는 임금·노동시간만이 아니라 '노조 할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예 법으로 노동자성 인정한 스페인
스페인 정부는 올해 5월, 기나긴 사회적 대화 끝에 디지털 플랫폼 부문에서 배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긴급입법, 이른바 '라이더 법(Ley Rider)'을 제정했다. 이 법은 먼저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추정하는 조항을 도입하려 했는데, 사용자단체의 반대로 이 규정은 배달플랫폼 라이더에게만 적용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법안이 도입되기 전인 2020년 8월에 스페인 대법원은 전원합의체를 통해 배달 플랫폼 기업 글로보(Glovo)의 배달 라이더가 노동자라고 만장일치로 판결했으며, 법안이 제정되던 올해 5월에는 또다른 플랫폼 딜리버루(Deliveroo)의 라이더 역시 노동자라고 판단하며 회사 측 상고를 기각한 바 있다. 일련의 판결 뒤 정부가 직접 나서서 법·제도 정비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 법안에는 굉장히 의미있는 조항이 있는데, 알고리즘에 대한 노동자의 접근권을 보장했다는 점이다. 플랫폼 기업은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알고리즘 및 인공지능(AI)에 관한 정보를 노동자대표에게 제공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플랫폼 노동자가 자신의 신상이나 노동, 근로제공에 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데, 이 권리는 배달플랫폼만이 아니라 모든 플랫폼 기업에 적용되도록 하고 있다.
법·제도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단체협약으로! 이탈리아 사례
2021년 3월, 세계 3위 플랫폼 배달업체 '저스트이트(Just Eat)'가 이탈리아에서 4000여명의 배달원을 직접 고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니, 노동자성 인정 문제를 넘어 아예 배달 라이더들을 직접 고용한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영국·네덜란드처럼 법원 판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스페인처럼 법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탈리아 3개 노총(CGIL, CISL, UIL)이 저스트이트와 공동으로 교섭을 진행한 뒤 "2019년 8월 이후 고용된 배달원 전원을 고용형태나 근무시간 등에 관계없이 직접 고용"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합의한 것이다. 법이나 제도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노동조합이 나서서 플랫폼 노동을 조직하고 기업을 상대로 단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권리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번 합의에서 노사는 이탈리아에서 배송 및 물류산업 노동자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적 고용계약 체결키로 했다. 이에 따라 배달 라이더들은 최저임금(시간당 8.5유로), 퇴직금, 유급 휴가, 100% 유급 병가, 사회보장제도 적용, 상해보험 적용, 휴일근무 및 초과근무 수당을 인정받게 된다.
가장 놀라운 단체협약 내용은 "한 시간 이내 배달 건수를 최대 4건으로 제한"하기로 합의한 대목이다. 배달 라이더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위험을 줄이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어떻게든 시간당 콜을 하나라도 더 잡아야 생활임금을 보장받는 잘못된 시스템을 바꿔서, 플랫폼 기업이 배달 건수당 배달료를 제대로 책정해 생활임금을 책임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노사 합의가 있기 이전인 올해 2월 밀라노 검찰은 우버이츠, 저스트이트, 딜리버루 등 배달 플랫폼 기업에 '6만명 이상의 근로자와 계약 체결을 맺어야 한다'고 명하며 벌금을 부과해 노동조합에 힘을 실어줬다. 검찰 결정 직후 3개 노총 주도 아래 저스트이트 배달노동자 파업도 조직되었으며, 직접고용 단체협약 체결은 파업 직후에 이뤄진 것이었다.
사업모델 바꾼 독일, 사회적 압력 앞에 직면한 호주의 플랫폼 기업
영국·스페인·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 사법적 판결과 행정적 조치들이 이어지자 독일에서 앱 기반 배달·운송 플랫폼 노동을 사용하는 기업들은 스스로 사업모델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독일 우버의 경우 플랫폼을 통해 실제로 중개사업만 하고 있으며, 기사들은 렌터카업체에 직접 고용되어 노동자로 인정되고 있다.
독일의 음식배달업계 역시 수백여 개의 중간 업체들이 생겨나 소규모 고용을 하고 있기에 노동자성을 문제삼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독일에서도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한 판결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 많지 않은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이미 노동자로 인정하는 형태로 사업모델을 바꿨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시작되고 있다. 올해 4월, 호주의 배달 플랫폼 메뉴로그(Menulog)는 기존 방식을 버리고 라이더와 고용계약 체결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 직후인 5월, 호주 공정노동위원회(FWC)는 딜리버루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고발 사건에 대해 '부당해고'로 판정했다. 다시말해 배달 플랫폼과 이 노동자 사이에 고용관계가 존재한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호주의 배달 라이더들이 겪는 극심한 착취와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놓여 있다. 호주 교통산업노조(TWU)가 2020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라이더들의 시간당 소득 평균은 10.42달러에 불과해 법정 최저임금(시간당 19.84달러)의 절반 수준이었고, 응답자 90%가 팬데믹 기간 주문 건수는 폭등했지만 소득이 줄었다고 답변한 것이다.
2020년에 호주의 자전거 라이더들 교통사고로 잇따라 사망사고 발생했지만, 고용보험 보장도 없고 책임도 보상도 뒤따르지 않아 호주 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바 있다. FWC의 판정이나 메뉴로그의 고용계약 체결 선언은 이러한 사회분위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 메뉴로그는 호주 교통산업노조와 고용계약 및 임금수준에 대한 교섭을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플랫폼 기업의 반격
미국 캘리포니아주 AB5 법안 통과 직후 우버·리프트·도어대쉬 등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앱 기반 배달·운전기사들에게는 위 법안이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Prop.22 법안을 발의하게 된다. 이 법안에 대한 투표는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과 같은 날짜에 실시되었는데 약 58%의 찬성율로 통과되게 된다.
이 법안의 통과를 위해 우버 등의 플랫폼 기업이 쏟아부은 돈만 공식적으로 무려 2억 달러(약 2400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올해 8월, 캘리포니아주 고등법원은 Prop. 22가 "노동자들이 분열하고 노조로 단결하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플랫폼 기업의 경제적 이해만을 보호하는 것"이라며 의회 입법권을 침해하기에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우버·리프트 등은 이에 반발하며 항소 방침을 밝혔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거대 플랫폼 기업이 이제는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사법시스템까지 유린하는 일이 벌어진 상태 아닌가. 사법부 입장에선 플랫폼 기업들이 주민투표를 가장해 돈으로 노동기본권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대법원 판결 이후 우버는 7만 명에 달하는 기사들을 모두 노동자로 인정하기로 했으나, 대법원 판결취지와 달리 대기시간을 제외하고 승객 운송에 소요된 시간만을 노동시간으로 산정해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버의 기만적 행태에 맞서 지난 9월 28일 우버 기사들의 파업 및 단체행동이 벌어지는 등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연합 의회, 플랫폼 노동 관련 결의안 통과
지난 9월 13일, 유럽연합 의회는 "라이더, 운전기사 등 플랫폼 노동을 위한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적 권리 보장(Fair and equal social protection for riders, drivers and other platform workers)" 결의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여기에 담긴 내용은 앞서 얘기한 미국·영국·독일·네덜란드·스페인·이탈리아·호주 사례들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결의안에 따르면 유럽연합 의회는 플랫폼 노동이 노동자인지 자영업자인지에 대한 '입증책임 전환'을 제안하고 있다. 미국의 AB5 법안, 스페인의 라이더법 사례처럼 노무를 제공하면 노동자로 보는 게 정당하며, 만일 사용자에게 이의가 있다면 그가 노동자가 아님을 직접 입증하라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입증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아울러 플랫폼 노동은 전통적인 노동자(비플랫폼 노동)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권리 보장, 이를테면 △ 사회보험 △ 건강 및 노동안전에 대한 보장 △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리 등과 동등한 수준의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도 결의안에 포함되었다. 특히 배달·운수 플랫폼에 종사하는 라이더, 운전기사들의 경우 다양한 교통사고와 건강 악화에 노출되어 있는 만큼 상해보험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도 언급되었다.
또한 플랫폼 노동자에게 투명하고 차별 없는 윤리적 알고리즘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며, 일감 배정과 가격 결정 및 계정 비활성화 등과 연관된 알고리즘 내용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설명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언제든 알고리즘이 행한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수정을 요구할 권리가 노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 의회는 올해 연말까지 플랫폼 기업 규제 및 플랫폼 노동 권리 보장에 대한 구체적인 법·제도를 만들기로 한 바 있는데, 이번 결의안은 연말에 결정될 법·제도의 원칙과 원리를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결의안은 유럽연합 의회에서 표결에 붙여져 찬성 524표, 반대 39표, 기권 124표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기후위기 산업전환의 시대, 입증책임도 전환하자
미국과 유럽·호주 등 세계 주요국들이 플랫폼 노동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일제히 움직이는 가운데, 유독 한국 정부만 뒷걸음질 치려 하고 있다. 사실상 정부입법안이라 볼 수 있는 '플랫폼종사자법'이 더불어민주당 장철민 의원 대표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이 법은 노동자를 프리랜서로 둔갑시키는 플랫폼 기업에 맞서 노동권을 수호하는 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을지도 모를 프리랜서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법안인데, 문재인 정부 주요 인사들은 사실상 모든 플랫폼 노동자에게 이 법을 적용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이 법안 홍보를 위해 안경덕 고용노동부장관이 맨 먼저 찾은 사업장은 다름아닌 배민라이더스 센터였다.
안경덕 장관은 그 자리에서 이 법이 입법되면 전업 배달기사는 물론 부업으로 일하는 배민 커넥터 등 모든 플랫폼 종사자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아니, 노동법으로 보호받아야 할 배달 노동자에게 플랫폼종사자법을 적용해 노동법 영역에서 밀어내겠다는 말 아닌가.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에서 심지어 직접고용도 하는 추세인데 한국만 후진 기어를 넣고 있다.
그뿐 아니라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비대면·디지털 일자리 노동자 과로사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며 플랫폼종사자법 입법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과로사가 연이어 발생하는 비대면·디지털 일자리가 어떤 곳인가. 배달 라이더, 택배 기사, 물류창고 일용직 등 프리랜서나 독립계약자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플랫폼 노동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플랫폼종사자법이 아니라 당연히 노동법과 중대재해법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이들을 위해 플랫폼종사자법을 입법한다니? 이건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제3지대를 만들겠다는 위험천만한 길, 결국 플랫폼종사자법이 정조준한 목표가 이것이었음을 고백한 것 아닌가.
이런 짓을 벌여온 문재인 정부 관계자들이 무려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후보에 노동 문외한 강경화 씨를 입후보시키고 선거운동에 나선다면, 미국과 유럽 정부 관계자들의 비웃음을 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째서 항상 부끄러움과 쪽팔림은 노동자와 시민의 것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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