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 걸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지난해 수능이 치러지던 12월에 자주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원곡은 윤상의 것이지만 S.E.S.의 리메이크 버전이 더 유명한 노래 '달리기'. 수능 시험일 하루를 향해 먼 길을 힘겹게 달려온 수험생들을 위로하는 가사가 눈에 띈다. 그래, 이 날들에는 반드시 끝이 있겠지. 끝난 뒤엔 정말 지겨울 정도로 쉴 수 있겠지….
하지만 지난해 수능이 치러진 지 딱 6일만인 12월 9일, 노조법 개악안만이 아니라 국회 문턱을 넘은 악법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고 덤으로 선택근로제 정산기간까지 확대해준 근로기준법 개악안이 그것이다.
숨이 턱까지 차도 이젠 쉴 수가 없다
탄력근로제란 무엇일까? 단어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사장님들이 우리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맘대로 할 수 있는 제도이다. 한국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연장근로는 추가 수당을 지급해야 하며 주 12시간이 최대치이다. 즉, 52시간(40+12시간)이 1주 노동시간 한도인 것이다.
그런데 탄력근로제는 주40시간제를 근간으로 삼는 한국 근로기준법의 노동시간 제도를 완전히 뒤흔드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실시하게 되면 단위기간 내에 주당 평균노동시간이 40시간만 넘지 않으면 특정 주에는 64시간까지도 일을 시킬 수 있도록 허용된다. 지겹고, 힘들고, 숨이 턱까지 차도, 이유 없이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64시간까지 일을 시켜도 연장수당은 40시간을 초과하는 24시간이 아니라 그 절반인 12시간만 지급된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내에는 주당 소정근로시간 기준이 40시간이 아니라 52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즉, 주당 52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시간에 대해서만 연장수당(추가수당)이 주어진다.
이 제도가 새로 생긴 게 아니라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인데 단위기간 좀 늘렸다고 그렇게 달라지나? 그렇다. 지금까지는 단위기간 최장 3개월이라는 제한을 두어 최소한의 규제를 해왔지만, 단위기간이 6개월로 늘어남으로써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고 말았다. 3개월이던 시절에 이 제도 사용을 불편하게 느꼈던 사장님들이, 6개월로 늘어나면 너도 나도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잔업 많이 하는 법? 잔업해도 수당 못 받는 법!
앞서 얘기한 것처럼 주당 평균 40시간만 넘지 않으면 특정 주에 노동시간이 40시간을 넘더라도 연장수당을 받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아래 그림처럼 1주는 52시간, 1주는 28시간씩 번갈아 일을 할 경우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40시간을 넘지 않는다. 따라서 사장님들은 이렇게 일을 시키더라도 연장수당을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탄력근로제를 선호하는 사장님이라면 1주 52시간, 1주 28시간 … 이런 방식보다 노동시간이 몰리는 시기에 일을 집중적으로 시키려 할 것이다. 그런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이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어난 거다. 그렇다면 일이 몰리는 계절 3개월은 주당 52시간, 일이 없는 계절 3개월은 주당 28시간, 이렇게 가면 6개월 내내 잔업수당 한 푼 주지 않고도 일을 시킬 수 있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탄력근로제가 적용되는 기간 동안은 주당 소정근로시간(연장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기준시간)이 40시간이 아니라 52시간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주당 노동시간 최장한도는 소정근로 52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합해 최장 64시간까지 늘어난다. 아, 주당 64시간…. 이런 말도 안되는 장시간 노동을 시키더라도 12시간만 연장수당을 줘도 되는, 사장님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제도가 바로 탄력근로제인 것이다.
끝이 있다는 약속도 거짓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단위기간이 6개월로 늘었다면, 그럼 나머지 6개월은 탄력근로제 적용이 안되는 기간 아닌가? 6개월만 죽어라 버티고 나면, 노래 가사처럼 틀림없이 끝도 있을 테고 지겨울 만큼 쉴 수도 있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단위기간은 글자 그대로 '단위'가 되는 기간일 뿐이다. 최장기간이 아니다. 6개월 단위로 탄력근로제는 다시 갱신된다. 그러니까 죽어라 6개월을 버티고 나면, 다시 죽을 것 같은 6개월이 시작되고, 그게 끝나고 나면 또다른 6개월의 탄력근로제가 기다리고….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약속"은 탄력근로제에 와서는 거짓이 된다. 아니, 그래도 이게 언젠가는 끝나야 되는 게 아니냐고? 끝나지 않는다. 한번 시작되면 사장님이 마음을 돌려세우지 않는 한, 사업이 종료되지 않는 한 영원히 이런 6개월이 반복된다. 시지프스의 노동처럼, 타임 루프(Time Loop)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한도도 정해져 있고, 노동조합법상 임원의 임기 최장한도, 단체협약의 최장한도도 정해져 있는데, 탄력근로제는 한번 시작되면 끝이 없다는 게 말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입장에게 이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입법해온 모든 일이 노동존중이 아니라 재벌과 자본을 위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지겨울 만큼 오래 쉴 순 있다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장님들은 더 극악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어라? 6개월을 단위기간으로 한다 해도 다음 6개월을 똑같이 굴릴 이유는 없는 거 아닌가. 앞선 방식들 모두를 응용해 본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겨울에만 일이 없는 사업의 경우, 6개월과 다음 6개월을 묶어서 봄, 여름, 가을 모두 집중적으로 일을 시키는 구간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1년을 52주라고 보았을 때 앞의 6개월 구간 중 5주 동안은 일을 안 시키고 뒤의 21주에만 주 64시간씩 일을 집중시킨다. 다음 6개월 구간은 앞의 21주에 주 64시간을, 그리고 마지막 5주에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무려 42주 연속으로 주 64시간 장시간 노동을 시켜도 근로기준법 위반이 아니게 된다. 주당 평균노동시간이 51.7시간으로 52시간보다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거 실제 상황이다. 3개월 동안 주 60시간 이상 노동을 할 경우에 과로사 기준에 해당한다. 그런데 3개월은 기본이고 거의 10개월 가까이를 주 64시간 노동을 시켜도 되는 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단위기간이 3개월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들이, 단순히 단위기간을 6개월로 늘리는 것만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따지면 좀 쉴 수 있을까? 어쩌면 쉴 수도 있다. 사장님 눈 밖에 나서 짤리고 나면 정말 지겨울 정도로 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따지지도, 개기지도 못하고 10개월 가까이 주 64시간 노동을 강요받는다면? 과로에 시달리다 다시는 일할 수 없는 지경에, 그러니까 영원히 쉬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과로사 방지법 아니라 과로사 장려법
사실 이번에 개악된 탄력근로제의 문제점을 읊자면 몇 편의 글을 더 써야 한다. 유령과도 같은 '근로자대표'와 서면으로 합의만 하면 11시간 연속휴가를 주지 않아도 되고, 2주 전까지 통보해줘야 하는 근무일정표를 미리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브레이크 없는 장시간노동제에 법적 규정도 애매모호한 '근로자대표'를 사장님들이 활용할 무궁무진한 길이 열린 것이다.
임금보전 역시 기존에 받던 임금에 비해 저하되지 않도록 적절한 방법을 찾도록 해놓았을 뿐, 도대체 어떤 경우가 임금저하인지에 대한 구체적 규정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기존에 불가능하던 주 64시간 노동까지 시킬 수 있도록 길이 열렸다. 즉, 기존보다 노동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나기에 연장수당을 아무리 후려쳐도 총액임금은 저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대충 "기존보다 저하되지 않는다"고 신고하면 끝. 이거 문제제기하는 노동자들은 짤라버리면 그만이다.
12월 임시국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결국 정부·여당의 사장님 봐주기 작전으로 '중대재해기업특혜법'이 되고 말았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과로사 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그런 법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그 대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6개월 연장이라는 방식으로 '과로사 장려법'이 탄생한 것이다.
문재인 정권이 법을 다루는 계급적 본질
이제 마지막으로 정권이 노동관계법을 다룸에 있어서 노동자와 사장님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논의에서 가장 큰 쟁점은 '사업장 규모별 시행시기 및 적용'에 대한 차별이었다. 50인 미만 사업장 시행시기는 3년간 유예되며, 50인 이상 사업장에도 1년 뒤에나 적용이 된다.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아예 적용을 하지 않기로 했다.
5인 미만 적용제외 이유는 너무 영세한 사업주를 처벌하는 게 가혹하다는 것이고,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유예 이유는 사업주들에게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이란다. 50인 이상 사업장에 1년이나 시간을 주는데 도대체 왜 3년이나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아무런 객관적 논증도 없다.
그렇다면 탄력근로제는 어떨까? 한 달 전에 국회를 통과한 탄력근로제 개악안 역시 사업장 규모별로 시행시기에 차별이 있기는 하다. 5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이 없다는 점은 중대재해법과 동일하다. 하지만 의미로 따지면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노동시간 관련 근로기준법 조항이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굳이 탄력근로제를 시행하지 않아도 고무줄처럼 노동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기에 사장님들 입장에서 굳이 적용하라고 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대재해법을 5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하지 않기로 한 것은 사장님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탄력근로제 사업장별 시행시기 유예와 관련해서 보자면 50인 미만 사업장은 6개월 뒤 시행되고 50인 이상 사업장은 3개월 뒤 시행하기로 했다. 3개월 뒤 시행이면 사실상 '법안 공포 즉시 시행'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아니, 중대재해법은 사업주에게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면서 탄력근로제는 그런 시간이 필요없단 말인가? 백보 천보 양보해서 사업주 처벌 관련 법이니 사업주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장시간노동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 탄력근로제의 경우 노동자들에게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줄 필요는 전혀 없단 말인가?
중대재해법은 법사위 논의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탄력근로제는 2년째 국회 논의가 이어진 것이라는 변명도 설득력이 없다. 조국 전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서 열심히 마케팅하는 것처럼, 이 법은 이미 지난 회기(19대)에 노회찬 전 의원이 발의한 것이다. 국회 계류기간으로 따지면 탄력근로제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의 법률인 것이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노동자가 일하다 다치고 죽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법에는 사장님들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유예기간을 부여하고, 죽어라 뺑이치다 현장에서 과로로 사망하는 일을 빈번하게 양산할 탄력근로제는 사실상 즉시 시행한다. 이게 문재인 정권이 법을 다루는 계급적 본질이다. 굳건하게, 그리고 이제 노골적으로 사장님 편에 서있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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