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지형을 급변시킨 대표적인 사건은 1997년 말 외환위기로 간주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산업화 기반 성장 동력의 힘은 급속한 경제개방과 세계화의 유동성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전례 없는 국가부도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이후에 추진된 구조조정 정책은 남미 등과 같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오히려 쇠퇴한 나라들에서 나타난 양상과 유사한 형태를 보였다. 긴축재정과 함께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등을 통해서 일반 시민의 삶의 질 저하 및 보다 구조적인 빈곤의 심화 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외환위기가 초래한 빈곤 및 삶의 질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노동시장에서의 비정규직의 확대로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2019년 8월 현재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은 약 748만 명으로 36.4%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외환위기 이후 급증하다가 이후 경기회복으로 점차 줄어들었고, 2008년 국제금융위기에 의해 다시 증가하였다가 점차 안정되고 있는 추세이었지만, 또 다시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득격차와 빈곤 심화의 핵심요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비정규직의 확대 문제 외에도 2000년대 이후 두드러진 우리나라 경제의 지식기반화에 따른 고용의 양극화는 소득의 양극화와 같은 심화된 구조적인 사회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아울러 최근 들어 심화되고 있는 경제의 저성장 기조는 청년실업 등 노동시장 측면에서 난맥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함께 우리나라 도시의 빈곤현상을 점차 심화시키고 있다.
빈곤문제를 다루는 지리학의 오랜 전통
빈곤문제에 대한 지리학적 접근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데, 소위 복지지리학 분야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빈곤문제를 다루어 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에 의한 일상생활의 파괴 및 빈곤의 심화는 지리학으로 하여금 빈곤문제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지리학에서는 빈곤을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는지 그리고 특정 장소에서는 왜 빈도가 높은지 등과 같은 연계성을 통해 이해하고, 장소를 기준으로 빈곤에 대한 특징을 부각시켜 장소기반의 정책을 주장해왔다. 이것은 빈곤문제에 있어 사람기반 정책을 주장하는 전통적인 경제학 또는 사회복지적 접근과는 분명한 차이점이다.
사실 지역 간 소득격차 및 빈곤의 차이가 광범위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많은 국내외 연구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빈곤과 장소 간의 연계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장소기반 접근을 주장하게 되었다.
빈곤과 장소의 상호작용에 대한 지리학의 이해
빈곤문제에 대한 공간적 접근은 빈곤과 장소 간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세 가지 상호작용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장소와의 관계 속에서 빈곤을 이해하려는 접근은 물리적 기반시설, 즉 건조환경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두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국가의 등장과 함께 빈곤현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집중되어있는 도시슬럼의 물리적 환경에 의해 강화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환경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결정된다는 환경결정론적 사고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전원도시운동에서 전후 공간계획에 이르기까지 교외지역을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빈곤에 대한 해결책으로 간주했던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 그 자체는 시민에게 적절한 주택의 공급에 실패한다는 점과 이를 대신하는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당시 팽창하는 사회주의체제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충성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사회공학적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빈곤 구축에 있어 물리적 환경의 중요성은 대구대 이영아 교수의 연구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연구는 우리나라 빈곤층 밀집지역의 형성과정에 있어 공공임대주택의 건설과 도시의 외연적 확장에 따른 공간적 배제가 사회적 배제로 연결되면서 특징적인 배제의 공간이 형성되고 또한 빈곤의 영속화가 강화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였다.
둘째, 공간적 접근은 특정 빈곤지역에서 인구의 유출입과 유출입 집단별 사회적 특성과 관련된 이동성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두었다. 이동성의 문제는 초기 오래된 슬럼을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후 도시슬럼에서 개인적으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복지국가의 몰락에 따라 국가의 반빈곤 정책이 점차 시장메커니즘을 지향하게 되면서 이동성과 선택 문제는 정책에 의해 촉진되어야 하는 사회관계로 간주되었다.
셋째, 빈곤과 장소의 상호작용에 대한 공간적 접근은 빈곤지역 내 문화라는 요소에 초점을 두었다. 빈곤지역 내 존재하는 고유한 문화가 지역 내 빈곤을 영속화시키면서 주민의 탈출을 막는다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 접근은 빈곤의 원인을 개인에 두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회피할 수 있으며, 구조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서 제도권 내에서 반빈곤 정책의 실행력을 담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빈곤정책의 주류를 형성해 왔지만, 결국 국가의 역할 축소와 개인 및 시장의 역할을 강조했던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의 공간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
소득 불평등과 공간적 격리의 결합은 부와 빈곤의 세습!
창조계급론으로 유명한 도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최근 그의 저서 <새로운 도시 위기>(The New Urban Crisis)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곧 공간적 분리임을 지적하면서 대도시 내 점차 심각해지는 소득, 교육, 직업 등에 따라 거주지가 분명히 나눠지는 등의 공간적 분리를 관련 자료분석으로 잘 보여주었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이 공간적 분리가 결합되면서 단순히 소득 불평등으로 측정할 수 없는 보다 심대한 악영향을 초래하게 되며, 특히 그 영향이 세대를 거쳐 지속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기술하였다. 이렇듯 소득 불평등과 공간적 격리의 결합을 통해 부와 빈곤이 세습되는 현상으로부터 우리나라도 이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른바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2019년 8월 한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자본, 지위, 네트워크와 같은 합법적 역량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높은 담장 속 '그들만의 성채'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그 사태가 '계급'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전했다.
같은 시기 서울대 한 학부생의 글은 우리 사회에서 고착화되고 있는 계급의 단층선이 소위 586세대 중 대졸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지위 격차와 이후 자녀교육 투자를 통한 해당 지위의 세습 노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586세대의 책임론을 강조했지만 그 주장의 사회적 유의성을 알 수 없던 소위 세대론보다 더 큰 울림을 전했다.
이때 필자의 호기심에 따라 서울시를 대상으로 각 구별 50대(소위 586세대)의 대졸자 분포를 조사하였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림에서 보듯이 강남구와 서초구의 50대 인구 중 60% 이상이 대졸자인 반면, 강북구와 중랑구는 2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대학 진학률이 30%대였던 시절, 대학 진학은 당시 고도의 사회경제적 발전과정 속에서 더 높은 기회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지도는 서울시 50대 인구의 교육수준의 분포만이 아니라 계급의 지리이자 공간적 격리현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586세대의 일원인 필자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 시절 동네친구들의 계급적 배경이 매우 다양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나와 같은 세대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그 시절에는 계급은 존재했지만, 적어도 공간적 격리는 문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요즘 청소년 세대에게는 과연 가능한 경험인지 의구심이 든다. 결국 리처드 플로리다의 지적처럼 우리 사회도 이제는 소득불평등과 공간적 격리의 결합에 따른 부와 빈곤의 세습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사회로 변모했다는 점이 분명하다.
빈곤 해소를 위한 장소기반 접근이 이제는 필요하다
지리 및 공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빈곤 해소를 위해 장소기반 정책을 주문한다. 이는 새로운 접근이 아니라 이미 영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보편적인 정책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국의 왕립도시계획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빈곤은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고, 그 지역의 열악한 환경을 바꾸는 것이 빈곤 해소에 기여하는 중요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이를 위해 영국정부는 빈곤한 쇠락단지를 의미하는 싱크 에스테이트(Sink Estate) 100곳을 지정하여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맥락의 정책들이 추진되어 왔다. 정부는 생활 SOC 정책을 통해 국민 생활편익 증진시설 및 삶의 기본 전제가 되는 안전시설 등 일상생활과 연관되는 시설 공급을 위한 공간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도 지역발전과 삶의 질 개선에 주민이 주체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2030 생활권계획을 마련하였고,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실행계획으로서 지역생활권 단위의 동네단위 발전전략과 10분 동네 생활 SOC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유휴 공공자산을 활용하여 지역단위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새로운 도시혁신전략으로서 공간복지 전략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특히 공간복지 전략은 공간(장소)의 창출을 통해 빈곤 해소와 삶의 질 제고를 타겟팅하는 혁신적인 도시정책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이는 그동안 별도로 발달해 온 장소기반 복지정책과 인프라 중심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목표로 하는 공간(도시)정책의 수렴현상에서 시작된 전략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기존의 인프라 중심의 정책을 넘어 공간을 만들고 다양한 복지 콘텐츠를 결합하는 보다 혁신적으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도시빈곤의 악순환을 끊고 사회적 이동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올바르게 설계하고 추진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 소개>
이원호교수는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학교 지리학과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또한 국토지리학회 및 한국지역정책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올해부터 한국경제지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로는 도시빈곤과 불평등, 발전연구와 지리학, 공간혁신과 지역산업발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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