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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회찬 "제 모토가 자유인·문화인·평화인입니다"

[노회찬과 한국 정치 여덟 장면 : 기록으로 톺아보기] 일곱 번째 장면 :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노회찬

2009년 7월 7일 오전 6시 노회찬은 트위터를 시작한다. 얼마 있다가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라는 글귀를 트위터 대문에 내건다.

몇 달 뒤인 2009년 연말 노회찬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dc뉴스 Ade> 2009년 12월 30일 자 '노회찬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 문) 정치인으로서 노 대표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 노회찬) 제 모토가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입니다.

- 문) 아, 트위터에서도 봤어요.

: 노회찬) 네, 우리나라가 자유국가, 평화국가, 문화국가가 되는 것. 전쟁 걱정 없이, 그리고 땀 흘린 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국가가 되는 게 제 꿈이죠.

▲ 노회찬 트위터 프로필.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경기고 교훈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이 학교에서 내가 가져갈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말한, 노회찬의 모교 경기고등학교의 '교훈(敎訓)'이다.

※ "경기고에서 가져갈 것은 이것 하나뿐"이라던 노회찬,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빼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와 함께 고교 시절부터 그가 떠나기 얼마 전까지 오랫동안 동고동락해 온 여러 고교 동창 친구들이다. 노회찬이 황망히 떠난 뒤에도 이 분들은 그의 꿈과 뜻을 이어가려는 노회찬재단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아 넣고 있다.

▲ 경기고 교훈비. ⓒ노회찬재단

이 교훈은 1955년 당시 경기고 교장으로 재직한 조재호 선생에 의해 새로 만들어졌다. 경기고등학교의 교육 목표는 창조적 지식과 전인적 품성을 겸비한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의 육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이 그렇듯 경기고 학생들도 이 세 가지 슬로건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경기고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자유인(自由人)이다. 자유란 남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나아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창의력이 고도로 발휘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를 사랑하고 스스로도 자유스러워지려는 자유인으로서의 자세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 창조적 지식을 창출하는데 기본이 된다는 의미이다.

둘째, 문화인(文化人)이다. 문화인은 민주사회의 성숙한 시민이다. 문화인은 개인적으로 삶의 질 향상시킴은 물론 사회전반의 문화 수준을 선도한다. 원숙한 인격의 바탕 위에 스스로의 자질과 덕성을 갈고 닦아 높은 문화적 안목과 교양을 겸비하는 문화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평화인(平和人)이다. 평화인은 인종과 민족과 이념을 초월하여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세계 시민적 자질을 갖추어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해 매진하며,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미래 투시적 안목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춘 평화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노회찬이 스스로를 소개할 때 사용한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의 뜻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은 있지만 똑같지는 않다. 노회찬이 생각하는 자유, 문화, 평화에 대해 기록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하나씩 살펴보자.

'자유인 노회찬'의 '자유' 엿보기

"자유란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

노회찬에게 자유란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로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2011년 30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하순 어느날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나에게 자유라는 것이 생명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 없으면 자유가 무의미하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자유는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선물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고 또 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만큼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자유는 어머니가 주신 첫 선물이라 생각한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2011년 8월 30일 자 '"삼성 X파일은 19금,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결"')

'엿보기'라고 소제목을 단 것은, 자유에 대한 딱딱하고 어려운 고담준론의 철학적 접근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접근으로 노회찬의 "자유를 자유케" 하고 싶은 바람이 있어서다. 그랬을 때 소소한 접근을 통해 바라본, "자유를 사랑하고 스스로도 자유로워지려는" 노회찬의 이야기들은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나온다.

2004년 정운영과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랜덤하우스중앙 펴냄), 153쪽)

- 정운영) 두고두고 생각나는 영화는 무엇이고, 배우로는 누가 있습니까?

: 노회찬) 감옥에서 본 탈옥 영화 <빠삐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앤서니 퀸을 매력적인 배우로 생각합니다.

나는 노회찬이 언급한 두 영화 모두 '자유'가 열쇳말이라고 본다.

먼저, 영화 <빠삐용(Papillon)>은 실존 인물 앙리 샤리에르(Henri Charrière)의 실화를 각색한 것으로 1973년 제작된 영화다(한국 개봉은 1974년). 주인공 빠삐용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참혹한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끝내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탈옥을 시도한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뒤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여 남아메리카에 정착, 자유인으로 여생을 보낸다. 영화의 카피는 "자유를 향한 마지막 날개짓 그 누구도 나를 가둘 수 없다"였다. '영화 주제음악의 거장' 제리 골드스미스(Jerry Goldsmith)의 작품인 <빠삐용>의 주제 음악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선율이다. 골드스미스의 음악은 전세계에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TV나 극장가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희랍인 조르바'에 대한 입담을 뽐냈던 노회찬. <그리스인 조르바>는 월간 <국회도서관> 446호(2017.4) '국회의원의 서재'에서 그가 말없이 추천한 책 가운데 하나다. 노회찬에게 책은 "자신이 가보지 못한 세계를 깨우쳐주는 안내자이자, 낯선 세계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 거름"이었다.(☞ 바로 가기 : <노회찬의 티스토리> '노회찬의 서재 "자연, 사색, 행복 책이 선물한 것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1946년 발표한 장편소설로, 원제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Vios kai politia tou Alexi Zormpa)>이다. 이 작품은 카잔차키스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를 비롯해, 앙리 베르그송의 자유의지, 니체의 초인주의, 부처의 무소유 사상을 끌어안은 작가의 세계관을 잘 반영하고 있는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오 성문 밖 공터에 안장된 카잔차키스의 묘비문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자유의지의 실천을 노래했던 조르바의 정신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 월간 <국회도서관> 446호(2017.4) '국회의원의 서재' pdf 갈무리.

"참된 자유는 자기 이유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위로 보이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노회찬의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무기수 신영복 선생의 20년 20일간 옥중 삶을 사색한 책이다. 노회찬이 '인생책'으로 꼽은 이 책에도 '빠삐욘(빠삐용)'이 등장하고 '자유'가 등장한다.

"'빠삐욘'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낯선 이름은 아닙니다. 엊그제는 서너 사람의 묽은 기억을 뒤적여 대강 그 영화의 줄거리를 읽어 보고는, 선승(禪僧)도 못되는 터수에 화두(話頭) 하나 얻은 듯, 가을밤 생각은 길어 이곳 수인들의 후진 인생들을 떠올려보았읍니다. 에스키모인들의 옷을 벗을 수 있는 자유를 '자유'라 부르지 않는다면 내밀한 집념이 각각 다른 외피를 입었을 뿐 이곳 역시 수많은 빠삐욘의 현장이라 생각됩니다."(신영복, 1980년 10월 10일 대전에서)

신영복은 자유를 이렇게 말한다.

"참된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갖는 것입니다."

또 다른 책 <담론>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 '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作. ⓒ노회찬재단

노회찬이 부모님께 부친 편지에도 가끔씩 자유가 등장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이 평생의 운명처럼 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비록 신체적 자유가 구속되어 있다고는 하나 이곳에서 편안히 독서하고 운동하며 또 일주일에 한두 번쯤 상추쌈까지 먹을 수 있는 저의 처지는 여전히 혜택받는 계층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1990년 5월 26일 서울구치소)

서울구치소와 청주교도소 수감생활을 함께 한 사회학자 이진경(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은 노회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책 <그리운 사람 노회찬>(노회찬재단 펴냄))

"노회찬 의원과는 개인적인 연이 있습니다. 구치소에서도 같이 있었고 징역 생활도 청주에서 같이 했지요. <삶을 위한 철학 수업> 강연할 때 항상 드는 예인데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이란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의 공간이죠. 그래서 누구나 닫힌 방의 숨막히는 공간에서 나오려 애쓰는데 그래도 그 당시 구치소는 정치범이 너무 많아(300명 이상) 징역 생활이 좀 ‘트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노회찬 씨는 인사라도 하려 찾아가보면 문을 잠가놓고 있는 겁니다. 하여 문을 따달라고 할까요 물어보면 그러지 말라고, 자기가 일부러 부탁해서 잠근 거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 구속되기 전엔 보고 싶은 책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 못 보았길래 구속되면서는, 이젠 책 좀 실컷 봐야지 했답니다. 그러나 징역이 트여있는 덕에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책을 제대로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잠가 놓고, 닫힌 문 앞에서 얼른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겁니다.

흔히 자유와 구속을 대립시키지만 이를 보고선, 아, 자유란 때로 더 강한 구속을 자처하면서도 가능한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보는 자유를 위해 방문을 잠그는 구속을 자처한 것이니까요. 마치 자유인이 되기 위해 문을 잠그는 무문관 수행자들처럼. 자유란 그런 점에서 능력이라고, 능력만큼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무엇보다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자기 삶에서 놓치고 지나친 대목들

<노유진의 정치카페>, 노회찬과 유시민과 진중권이 함께한, 꽤 유명세를 탄 팟캐스트다.

언젠가 세 사람은 '자기 삶에서 놓치고 지나친 대목들'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 노회찬) 저는 오토바이를 타고 싶었어요. 속도를 내는 거죠. 그런데 자전거밖에 못 타봤어요. 기회가 없었죠.

- 진중권) 노회찬 씨가 가죽바지 입고, 할리데이비슨 타면 멋질 것 같아요.

- 유시민) 헬멧은 특수제작 해야 될 거 같아요. 대두….

- 노회찬) 그런 분들은 헬멧은 잘 안 쓰시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죠.

노회찬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합성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맸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한다.

ⓒ노회찬재단

좋아하는 색깔이라고 말한 "우아한 빨간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가죽바지를 입은 채 할리데이비슨에 손을 얹고 바람 속으로 질주하는 '자유인 노회찬'의 모습을 잠깐 그려본다. 순간 호기심 많고 열정이 넘치는 청년, 여행과 모험을 즐기고 모터사이클광이었던 청년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모습이 겹쳐 나타난다.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고물 오토바이 포데로사를 타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난 23세의 게바라와, 참당암에서 한 달간의 '고행'을 마친 뒤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세상 속으로 돌진하는 25세의 노회찬이 마주친다면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아마도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함께 박장대소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런 자질이 없는 혁명가는 생각할 수 없다."(게바라)

"진보의 기본원리는 실사구시라는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가 이상은 있지만 실시구시가 없다면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사구시가 생명이라고 봐요."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좋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휴머니스트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크다."(노회찬)

▲ 왼쪽 사진 위는 23세 청년 게바라(1951), 아래는 31세 청년 게바라(1959). 오른쪽 사진은 한 달간의 '고행'을 마치고 참당암에서 막 나온 25세의 청년 노회찬(1981). 수염과 모시적삼 비슷한 삼베옷이 인상적이다. ⓒ노회찬재단

'문화인 노회찬'의 '문화' 엿보기

문화란 뭘까? 문화라는 단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문화는 맥락에 따라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갖고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창조한 사회적, 역사적 산물을 두고 인간들이 벌이는 권력 다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문화는 주로 정신적이거나 지적이고 예술적인 산물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신문의 문화면은 문학, 예술, 종교, 학문, 교육, 패션, 방송, 영화 등의 주제로 구성되며, 이는 신문의 다른 면을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영역과 구분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노회찬의 첼로와 악보. ⓒ노회찬재단
▲ 노회찬의 첼로와 악보. ⓒ노회찬재단

백범 김구는 문화의 힘을 강조한 사람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우리나라가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캘리그래퍼 강병인 作. ⓒ노회찬재단

노회찬은 문화의 힘을 강조한 백범 김구 선생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관련 기사 : <Story of Seoul> 2016년 4월 11일 자 '[인터뷰]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를 만나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문화라고 생각해요. 문화는 여유 있는 사람만이 향유하는 사치가 아니에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려야죠."

"문화적 가치로 고급과 저급을 나누는 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모나리자 같은 그림이 비싸도 보는 건 저렴해야죠. 비싸다고 다 좋은 게 아니에요. 아니 마약은 얼마나 비싸."

▲ 2013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4주기.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며 백범기념관 김구 선생의 영정 앞에 선 노회찬.(노회찬 트위터 갈무리)

노회찬과 음악, 그리고 첼로

'첼로를 연주한 정치인', '영화를 사랑한 정치인' 노회찬의 문화적 감수성은 문학과 예술, 음악을 사랑하고 즐겼던 부모님의 영향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쌓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문학을 사랑한 도서관 사서 출신의 아버지와 교사이던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으로 전쟁 통에 월남한 피난민이었다. 초량동 산동네에 다섯 가족이 세들어 사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오페라 공연이 있으면 빼먹지 않고 갈 정도로 예술을 사랑했다고 한다.

노회찬은 "그때(중학교 시절) 음악에 눈을 뜨게 해준 분이 아버지였다"며, 베토벤의 '운명'을 100번 이상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불렀다. 그때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머리를 빡빡 깎고, 교복을 입고, 그러면 어린애에서 준성인이 되는 걸로 인정받았다. 아버지가 딱 오라고 하더니 '이제 너도 중학생이 됐으니 이런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들은 게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이었다. 저는 처음에 그거 듣고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꾸 들으니까 좋더라. 제가 그것을 100번 이상 들었다. 토스카니니라는 이태리 출신으로 저명한 미국의 지휘자가 있는데, 그에 관해 30분간 강연을 들어야 했다. 베토벤에 관해서는 1시간. NBC 심포니라고 꽤 유명한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 거였는데 제가 그것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나중에 카라얀 등 딴 사람이 지휘한 베토벤의 '운명'은 어색해서 잘 안 들렸다. 지휘자에 따라서 음악이 조금씩 다르거든. 그때 음악에 눈을 뜨게 해준 분이 아버지였다."

'악기 하나는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부모의 권유 속에 중학교 때 첼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노회찬은 솔직하게 말한다.

"제가 초등학교 입시 마지막 세대여서 6학년 12월 달에 부산중학교에 입학을 했어요.3월 달까지는 할 게 없잖아요. 놀아야 되는데. 어머니가 원칙이 있었어요. 가정형편이 어렵지만 악기는 하게 한다. 이래가지고 악기 하나씩은 하게 된 건데. 누나가 피아노. 넌 뭐할래? 그래서 누나가 피아노 하니까, 바이올린이나 첼로 중에 하나 골라라. 해서 보니까 바이올린은 작고 첼로는 크잖아. 그때 나는 그걸 기구로 봤으니까. 작은 것은 다루기 힘들 거다 생각하고, 큰 거는 다루기 쉬울 거다. 그래서 첼로 하겠다고 그랬지."(책 <진보의 재탄생>(꾸리에 펴냄) 중 '회찬씨, 농담도 잘하셔(김어준)' 24쪽)

훗날 첼로 선택에 대해 노회찬의 말이 살짝 바뀐다.

"음악전문가들이 얘기할 때 첼로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가깝다고 합니다. 바이올린보다 몇 옥타브 낮죠. 인간의 말할 때 높낮이와 비슷해요. 음악 좀 듣는 사람은 첼로를 좋아하죠. 우리 드라마에 보면 첼로가 바이올린보다 더 많이 나옵니다. 바이올린은 굉장히 치열하다면 첼로는 울림이 있고 분위기 있게 다가서니까."

이렇게 시작한 첼로로 노회찬은 이화여고 개교기념일 날 초대돼 유관순기념관 강당에서 출연료를 받고 독주를 하기도 했다. 이화여고 개교기념일이 5월 30일이니까 아마도 1975년이 아닐까 싶다.

"고2 때 (경기고등학교) 개교기념일 날(1974.10.3.) 연주했죠. 무대 위에서. 그게 소문나니까 정신여고, 이화여고 개교기념일 때."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 강당 가서 또 연주하고. 연주하고 나니까 3천원 받았나? 옆에 이딸리아노인가 하는 음식점이 있었어요. 교문 옆에. 저녁 때 대접받고. 최고의 그거였지. 최고의."(책 <진보의 재탄생>(꾸리에 펴냄) 중 '회찬씨, 농담도 잘하셔(김어준)' 29-32쪽)

"한평생 올곧게 살다간 사람" 노회찬이 미당 서정주의 시(<머리에 석남꽃을 꼽고>)에 곡을 입힌 <石南花(석남화)>라는 노래를 작곡한 것도 바로 이 때다(1974. 8. 1).

▲ 왼쪽 사진은 고등학생 노회찬의 첼로 연주 모습. 오른쪽 사진은 노회찬 曲 <석남화> 악보 원본. ⓒ노회찬재단

※ <石南花(석남화)>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서른 해만 서른 해만 더 함께 살아볼거나"

노회찬 의원이 고등학교 시절, 서정주의 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에 곡을 붙여 만들었다는 소연가 일부다. 서정주는 초간 권문해(1534~1591)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에 전해오는 석남꽃 전설이 이 시를 짓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석남꽃 설화는 애초 <수이전>에 수록되어 있었으나 유실되고 <대동운부군옥>에 유일하게 실려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비록 서정주 시라는 징검돌이 있었지만 <대동운부군옥>이 없었다면 가슴 저미는 노회찬의 소연가는 우리 기억에 없었을지 모른다. 위대한 기록과 한평생 올곧게 살다간 사람이 만나, 나에게 단지 보물 몇 호로 기억되고 말았을 책이 되살아났다. 한사람의 위대한 기록이 흐려지는 나의 기억을 건드린 것이다. 소연가를 읊조리며 지금 초간 권문해를 만나러 가고 있다.(☞ 관련 기사 : <오마이뉴스> 2019년 3월 31일 자 '여든 넘은 종부의 마음을 닮은 '못난이 굴뚝'')

2018년 7월 26일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서 손석희는 노회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의 곡. '솔베이지의 노래'. 서글픈 멜로디와 애잔한 가사로 시대를 넘어선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도 이 곡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첼로를 연주하던 정치인. 지난 2005년, 그가 대중의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도 바로 이것이었으니까요."

2005년 그 날에 대해 노회찬의 미공개 <난중일기>(2005.5.1.)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산한 아침이었다. KBS1 <아침마당>팀, KBS2 <이홍렬 박주미의 여유만만>팀, SBS <임성훈의 세븐일레븐>팀이 한 시간 간격으로 집을 방문하여 좁은 방안을 휘젓고 돌아갔다. 메이데이 집회 참석차 출발해야 할 시간인데 <임성훈의 세븐일레븐> 팀은 사전 예고도 전혀 없이 첼로를 들고 나타났다. 강제로 켜는 첼로. 아우슈비츠에서도 없던 일이다. 망설이다 활을 잡았다. 20년 만이다."

▲ JTBC <뉴스룸> 2018년 7월 26일 자 '앵커브리핑' 화면 갈무리.

혁명가를 꿈꿨던 시절에 대해 훗날 노회찬과 김어준은 이런 대화도 나눈다.(책 <진보의 재탄생>(꾸리에 펴냄) 중 '회찬씨, 농담도 잘하셔(김어준)' 32쪽).

- 김어준) 아니 대표님 경력을 봐서 누가 부드럽게 살았다고 하겠어요? 저 사람은 틀림없이 음악도 모르고 오페라도 모르고 문화적 소양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기 십상이죠.

- 노회찬) 과거에 <러시아 혁명사> 같은 거 읽으면서 굉장히 감동했던 건 뭐냐 하면…. <이스끄라>라고 혁명가들이 만든 신문 있잖아요? 편집진이 당시 핵심 혁명가들이었는데, 서술한 내용을 보면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었어요. 사실 봉건시대 이전의 교양인은 귀족이었죠. 그런데 봉건시대 이후의 교양인은 혁명가였어요. 문학, 과학, 예술, 철학,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풍부했고, 그런 것들이 혁명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걸 굉장히 중시해야겠다. 혁명가가 되려고 음악 좋아한 건 아니지만.

문화인 노회찬의 꿈은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로 나아간다.

그것은 '샹제 라 비(Changer la vie, 삶을 변화시키자)'를 선거 구호로 내건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의 공약이기도 했다. 미테랑 대통령은 재임 시절 수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은 문화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2010년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에는 '모여라, 천만인 오케스트라'라는 제목 아래 문화예술정책의 내용이 담겨 있다.

▲ 2010년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의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 중 '모여라 천만인 오케스트라'. ⓒ노회찬재단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서울, 그래서 천만인이 제각각의 삶으로 위풍당당해지는 서울, 그 청사진'의 하나로 노회찬은 이런 내용을 약속한다.

"우선 지금처럼 시설 중심의 예술가 지원정책에서 '생활지원형 사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과 지역의 소규모 예술교육이 병행되어야 하는 거죠. 한 예로 '우리 동네 예술가' 사업을 제안합니다. 미술가에겐 '동네 아뜨리에'를 만들어주고, 사진작가에겐 '동네 사진관'을 만들어 드립니다. 연극가와 음악가에겐 지역 문화센터의 공연장을 활용할 수 있게 해드리는 거죠. 그리고 공공문화시설의 '요금상한제'를 실시할 것입니다. 작년에 독일을 다녀온 친구는 유명한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를 단 8유로에 보고 왔습니다. 시민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는 공공문화시설은 시장과 구청장의 액세사리에 불과합니다."

'평화인 노회찬'의 '평화' 엿보기

"정치 문제 이전에 가족 문제"

10여 년 전 어느날 "현 단계에서 남북관계의 문제점을 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김정진 변호사의 물음에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책 <진보의 재탄생>(꾸리에 펴냄) 중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김정진)' 253쪽)

"저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에 대한 관점이라고 봅니다. 통일문제도 통일지상주의여서는 안되고 평화지상주의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2018년 2월 창비에서 주최한 '지혜의 시대' 연속 특강 시간에 노회찬은 묻고 답한다.(책 <우리가 꿈꾸는 나라-노회찬>(창비 펴냄) 80~81쪽)

"과연 전쟁이 해결책일 수 있을까요? 전쟁에서 이기면 평화가 찾아올까요?"

"안보, 안보 부르짖는 사람 중에는 전쟁이 나면 보이지 않을 사람이 태반…어쨌든 전쟁에는 너무나 큰 댓가가 따르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반드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전쟁은 결코 선택지가 될 수 없습니다."

생전에 분단 문제를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해온 노회찬은 아이러니하게도 분단 ‘덕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노회찬에게 평화와 통일이란 정치 문제 이전에 가족 문제였다. 노회찬의 부모님 두 분 다 함경남도가 고향이다. 1.4후퇴 때 흥남을 떠나 거제를 거쳐 부산에 정착한다. 실향민 2세대인 노회찬은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아프다. 2017년 7월 17일 대한적십자사가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회담을 제의했을 때도 그랬다.(☞ 관련 기사 : <서울신문> 2017년 7월 22일 자 '[서울광장] 이산가족 노회찬의 유감')

"제 어머니가 우리 나이로 89세입니다. 기억이 희미하고, 치매 초기예요. 주변에 계시던 친구 분들도 대부분 돌아가셨고요."

노회찬의 말은 이어진다.

"북에 유감이 많습니다. '몇 사람 만나는 게 중요하냐, 통일이 중요하지'라는 북의 인식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핵·미사일과 제재라는 상황이 있지만 정치와 인도적 문제는 분리돼야 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이 남북 화해의 상징인 양 이벤트처럼 돼서도 안 되고요. 상봉은 인권이자 휴머니즘의 문제입니다. 어머니 같은 분들에게는 시한부 사안이에요. 개인들이 무슨 잘못입니까. 혈육끼리 만나겠다는데 그걸 정치가 가로막는 꼴입니다."

노회찬의 <P+1코리아 구상>: "평화가 밥이다"

2007년 5월 2일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후보 노회찬은 'P+1 코리아(Peace Korea & One Korea) 현장대장정'의 첫 행보로 강원도 철원 민통선 지역을 방문한다. 노회찬은 "평화가 밥이다"라고 역설하며 "평화가 밥 먹여주느냐고 질문하는데, 평화만이 양질의 밥을 제공한다는 것을 증명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해 금강산선을 복원, 2012년 서울에서 내금강으로 수학여행을 갈 수 있게 하겠다"며 "남쪽에서는 관광 수익을 올리고 북쪽에서는 (철원 평야로) 밥 만드는 기회를 제공해 개성공단처럼 서로 경제적 이득을 누리는 동시에 평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전했다.

'P+1코리아' 구상이란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노회찬의 평화․통일구상이다. 그 출발은 '평화 없이 통일 없고, 통일 없이 평화 없다'는 것으로, ① '국가안보'에서 '인간안보'로 ② 그 어떤 충격에도 깨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평화체제'로 ③ 남과 북이 주도하는 평화체제를 3대 원칙으로 하고 있다.

'P+1 평화체제'는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지향하며, 평화체제와 한반도 비핵지대화가 돌이킬 수 없는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 세 가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①북미관계 차원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포기 및 미국 북한체제 보장, 남북미 평화협정 체결 및 북미수교 ②남북관계 차원에서는, 전면적 남북경제협력, 남한의 선도군축 및 남북의 상호군축 ③동북아 차원에서는, 한미동맹의 점진적 해체 및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 동북아평화공동체 구축 등이다.

이어 노회찬은 철원~내금강을 잇는 금강산 철도 복원과 DMZ(비무장지대) 내 남북 병력을 2km씩 완전 철수하는 등 DMZ 절대평화지대 계획을 발표한다. 즉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어떤 속도로 실현되는지만 남았다. 조속한 군비축소로 경제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며 △남북 정상 합의 등을 통해 DMZ 내 모든 병력을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km씩 완전철수 △DMZ 내 지뢰제거 및 생태 복원 △남북UN 공동 관리기구 및 UN 세계자연유산 등재 추진 등의 3단계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후보를 겨냥해서는 "북핵위기 당시 국지전 불사, PSI 찬성 등의 정책을 내놓은 데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한다"며 "전쟁주의자에서 평화주의자로 전향을 선언하지 않는 한 이들의 평화정책은 기만적인 선거용 술책이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고 말했다.

▲ 기차 잔해를 바라보며 기자들과 담소를 나누는 노회찬 (<참세상>, 2007.5.2.)

노회찬의 북한 방문

○ 2000년 첫 번째 방북

2000년 10월 9일~14일 북한 정부정당단체합동회의 초청으로 노회찬은 조선로동당 창건 55돐 기념행사 참관단(42명)에 민주노동당 방북대표단장으로 참가한다. 평양을 다녀와서 "역사의 기록을 위해, 경험의 공유를 위해"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26호와 27호에 '평양을 다녀와서'라는 글을 기고했다.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진보정치> 26호(2000.10.20.~10.26)

- "42명의 방북대표단 대다수가 남쪽 체제와 정부에 대항하여 감옥을 마다 않고 싸워온 투사들이었다. 2000년 10월 9일 이 투사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고려항공 비행기를 타고 남에서 북으로 가는 최초의 남쪽 사람들이 되었으며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기념행사를 합법적으로 참관하는 최초의 남쪽 사람들이 되었다.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 "평양까지 비행거리는 31km. 오후 2시 54분 비행기는 순안비행장에 착륙했다. 남쪽 대표단은 기내에서 한완상 상지대 총장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자 북측이 새롭게 짠 명단이 전해졌다. ‘민주로동당’이 1순위였다. 벤츠승용차도 1호차였고, 숙소, 연회장의 테이블 배치 등 모든 의전에서 민주노동당 대표단은 정당 우선의 예우를 충분히 받았다."

- "식사 후 자기소개와 방북 소감을 밝히는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좋은 식사와 숙박시설은 고맙지만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다. 평양에 와서 평양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서울 생각이 더 많이 난다. 모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여기서 만들어 가지 않는다면 이번 방북은 관광으로 끝날 것이다.'"

<진보정치> 제27호(2000.11.10.~11.16.)

- "2000년 10월 평양에서 확인한 것은 남북관계, 조미관계 등 대외관계의 '급변'과 기본 경제정책의 '불변'이었다. (중략) 평양 시내에선 최근 도입된 이층버스가 승객을 가득 채운 채 달리고 있었고, 생맥주 집 앞에는 긴 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더 큰 변화는 남북관계와 조미관계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것들이었다. 평양에서 북측 관계자들로부터 수없이 듣게 된 말 중의 하나는 '6월 남북정상회담 이전에는 꿈도 못꾸던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그들의 감회였다. 6월 이후 조성된 새로운 남북관계를 역전시키지 않으려는 의지가 역력해 보였다."

- "민주노동당의 방북 목적은 무엇보다도 통일논의 당국 독점 현실을 타파하고, 정당교류의 확대 등을 통해 통일의 기초를 아래로부터 쌓아 올리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소중한 첫 단추를 끼웠다. 사회민주당사를 공식 방문한 자리에서, 민주노동당의 여러 제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김영대 위원장은 '시작이 반이다'며 만남 자체의 의미를 크게 평가하였다."

- "방북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착 안내한 안내원들은 외국 방문의 경험도 많았고 남쪽 사정에 대해서도 밝은 펀이었다. 첫 대면에서 필자가 작년에 발표한 글 중 일부 구절을 인용하며 ‘인상적이었다’고 말한 어느 안내원은 지난 4.13 총선에서 신생 민주노동당이 과연 울산에서 한 석을 얻을 것인가를 놓고 노심초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2%를 득표하지 못하면 자동해산되는 정당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북쪽의 모든 사람들이 이 안내원처럼 남쪽 사정을 잘 알고 또 남쪽의 모든 사람들이 그만큼 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통일은 우리 코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들었다."

▲ 2000년 10월 북한 방문.(<진보정치> 제26호, 제27호)
▲ 2000년 10월 북한 방문.(<진보정치> 제26호, 제27호)
▲ <진보정치> 제26호에 실린 노회찬의 글 '평양을 다녀와서 ①'
▲ <진보정치> 제27호에 실린 노회찬의 글 '평양을 다녀와서 ②'

○ 2005년 두 번째 방북

2005년 10월 17일 (사)남북어린이어깨동무가 북녘 어린이들에게 볼펜과 샤프펜슬 등 학용품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한 '평양 어깨동무 학용품공장'(평양 중구역 소재)이 현지에서 준공식을 갖는다. 이 공장은 낙원무역 총회사 계열사업소로 1983년 12월 24일 설립됐지만, 시설이 낡고 낙후돼 북한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깨동무 학용품공장은 2005년 안에 빨강, 파랑, 검정 3가지 색깔의 볼펜(북한 말로는 '원주필')과 샤프펜슬('수지연필') 각 500만 자루와 중성펜 50만 자루를 생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준공식 행사에는 권근술(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사장)과 변형윤(한겨레 통일문화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후원회원 100여 명과 남쪽 어린이 20명이 함께 참석했다. 노회찬과 이기범(남북어깨동무 사무총장, 숙명여대 교수)과 장석(이우학교 이사장)도 이 가운데 있었다. 셋은 경기고를 함께 나온 친한 친구들이었다. 이기범은 공장 준공의 의의에 대해 "과거 밀가루, 콩기름 등 일회성 구호물품 제공을 뛰어넘어 북한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개발사업으로 전환'을 모색한 게 중요하다. 북측이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남측이 제공하여 대량으로 필기구를 생산, 어린이들이 교육환경을 개선하게 해준 것은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한다.(☞ 관련 기사 : <오마이뉴스> 2005년 10월 22일 자 '북한 어린이 손에 '남한 볼펜' 쥐어주다')

※ 북한 방문 둘째 날인 17일, 방문단 일행은 경치 좋기로 유명한 대동강변 옥류관에서 쟁반냉면과 일반 평양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한 뒤 평양 중심가 고려호텔 바로 옆에 위치한 '평양 어깨동무 학용품 공장'으로 향한다.

노회찬의 평양냉면 신기록 수립이 아마도 이 날이 아닐까 싶다.

"나도 평양을 몇 차례 가봤는데 옥류관 냉면집에서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한 그릇 시킨 뒤 사리를 5번 시켜 먹었더니 지배인이 특별방문록을 들고 와서 서명하라고 하더라."

노회찬 등 실향민에게 평양냉면은 '실향'과 '이산', 그리움의 음식이었다.(※ 음식 관련한 노회찬의 기록을 찾아가다보면, "기억 속의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맛은 함께 나눌 때 추억이 된다", "맛의 끝은 사람이다", "음식은 상처받은 영혼과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허영만 화백의 <식객 II>의 글귀가 가끔씩 떠오른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의 남북정상 간의 만남을 본 노회찬은 정의당 당직자들에게 "오늘 점심은 제가 평양냉면으로 쏩니다"라고 하면서, 마포 '을밀대'에서 평양냉면을 산다.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한 이 자리의 성격은 '평화, 새로운 시작'이다. 점심 대접을 받은 이정미(정의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오늘 점심은 노대표님이 쏜 을밀대 냉면.

그 보답으로 다음 점심은 평양 옥류관 냉면 내가 쏘기로.

옥류관 냉면, 멀다고 말하면 안되겠기에~^^"

▲ 2018년 4월 27일 이정미 정의당 의원 페이스북에 게시된 사진 .

○ 2006년 세 번째 방북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북의 핵실험으로 한반도 정세가 얼어붙은 가운데, 2006년 10월 30일 민주노동당 방북대표단 15명은 평양으로 출발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인 노회찬은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일수록 '평화만이 살 길'이라는 메시지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4박5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한다.(10월 30일 중국 베이징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고려항공 편으로 방북, 공식적인 평양방문 일정 진행.)

조선사회민주당과의 공식 회담, 그리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면담 과정에서 방북대표단은 북한 핵실험에 대한 '유감'의 뜻을 전달했다. "금기시되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겁내지 않고 명확한 주장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진보정당의 설립취지"이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1월 1일 열린 조선사회민주당과의 공식회담에서 권영길 의원단 대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심각한 것은 지금 그 원칙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부시정권과 보수세력 의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노회찬은 "지금 조성된 국면을 좋아하는 것은 반통일세력밖에 없다"며 "핵 시험 이후 한반도 긴장이 조성되었고 남녘 동포들은 불안해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우려와 불인을 해소하면서 이 사태가 어떻게 조성된 것인지 해명해야 하고 평화적 해결방안을 마련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진보정치> 제297호(2006.11.06.~11.12)
▲ <진보정치> 제297호(2006.11.06.~11.12)
▲ <진보정치> 제297호(2006.11.06.~11.12)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안전판' 개성공단, 개성 방문

2006년 11월 27일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김기수 최고위원 등 당직자 16명과 함께 궂은비를 맞으며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6자회담 재개를 앞두고 개성공단이 갖는 의미를 재확인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개성공단은 핵실험의 후폭풍과는 상관없이 활기찬 분위기였다.

노회찬은 "개성(開城)은 '성을 열다', 즉 남북이 각자의 성을 연다는 뜻"이라며 "(남북한이) 법률혼 이전 실험동거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개성공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이후 인도적 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된 초긴장 상태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그대로 유지됐다"며 "남쪽에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지만 개성공단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안전판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라고도 했다.

"겉은 눈으로 덮여 있지만 속에는 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개성공단을 찾은 노회찬이 밝힌 방문 소감이다. 한달 전 북핵실험 이후 악화돼 있는 남북관계가 '눈'이라면 개성공단은 '싹'이라는 것이다. 노회찬은 "미국에서 개성공단 사업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정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게 오히려 미국 정책의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하고 "개성공단만큼은 남북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 2006년 11월 27일 개성공단을 방문한 노회찬. ⓒ노회찬재단

2007년 4월 4일에는 민주노동당과 민족화합운동연합 등이 주최하는 '남북 청소년 평화통일의 숲 가꾸기' 행사가 있었다. 이날의 행선지는 개성시 봉동. 개성공단이 아닌, 개성시 외곽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금강산이나 개성공단구역이 아니라 개성시로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었다. 행사에는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현애자 등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과 경기도당 위원장, 인천시당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식수행사를 마친 후 방북단은 식사를 하면서 여흥을 즐겼다. 노회찬은 북한 가요인 '심장에 남는 사람'을 열창했다.

2016년 12월 2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개성공단 우리기업 상품전시회'가 열렸다.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축사를 했다. 축사 내용을 옮겨 적어본다.

"이 자리에 와서 개성공단의 우리 기업들이 만든 물건들을 보면서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는 이 물건들이 만들어지는 그 현장을 본 경험이 있습니다. 남과 북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그 현장의 북측에서 남쪽기업들이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북쪽 주민들이 일하고 있는 그 모습 자체는 남과 북, 그리고 한반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평화와 통일의 모습을 먼저 실현해주는 광경이었습니다.

이처럼 뜻깊은 개성공단이 정부의 오판과 잘못된 정책 채택으로 인해 작년에 폐쇄됐습니다. 개성공단이 폐쇄된 이후 벌어진 모든 상황은 개성공단 폐쇄가 잘못된 정책임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게 크게 타격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마치 자해하듯이 우리 기업만 피해를 보고, 여전히 그 피해가 보상도 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촛불광장에서 확인된 민심의 하나는 개성공단과 관련한 것입니다. 개성공단 폐쇄 자체가 탄핵을 받은 정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뜻깊은 상품전시회가 개성공단이 다시 정상 재가동되는 그 날을 앞당기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라 봅니다.

특히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개성공단 기업협회 소속 여러 기업인들, 그리고 그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 그동안 노고가 참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보상받지 못한 여러 피해들에 대해서 제대로 피해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회가 앞장서서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 2016년 개성공단. ⓒ노회찬재단
▲ 2016년 개성공단. ⓒ노회찬재단

'스무살, 어깨동무의 약속' 행사: "안녕? 친구야!"

2016년 6월 20일 서울시청 시민청 태평홀. 어린이어깨동무 20주년 기념 및 이사장 이취임식 '스무살, 어깨동무의 약속' 행사가 진행되었다. 160석의 자리가 꽉 찬 것도 모자라 급하게 좌석을 마련할 만큼 많은 분들이 모였다.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축사를 했다.

2006년 어린이어깨동무는 북녘 친구들을 향해 "안녕? 친구야!"를 외치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진행한 '안녕? 친구야!' 캠페인은 수해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북녘 친구들을 걱정하며 안부를 묻는 인사인 동시에, 남과 북의 친구들이 만나 함께 정답게 뛰노는 것에 대한 염원이 담긴 표현이었다.

권근술 이사장(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은 이임사에서 "처음 평양을 방문한 것이 1998년 초겨울 50대 후반이었는데, 이젠 머리가 허연 일흔다섯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중략) 지난 20여년,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 후원자들의 눈물과 사랑이 오늘의 어깨동무를 있게 한 것이지요. 앞으로 어깨동무가 하는 일에 온 국민이 환호 가운데 남북화합의 시대가 열리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통일이 된 후에도 남과 북의 주민들이 다 같이 어린이 문제만 생기면 맨 먼저 찾아오는 어린이어깨동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 '어린이어깨동무' 20주년 기념 및 이사장 이취임식. ⓒ노회찬재단
▲ '어린이어깨동무' 20주년 기념 및 이사장 이취임식. ⓒ노회찬재단

이산가족 상봉, 위성지도를 활용한 이산가족 고향 찾기

노회찬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하지만 형제와 조카들을 찾는 어머니를 위해 한 차례도 생사 확인을 북측에 부탁한 적은 없었다. 지위를 빌어 '청탁'을 하는 건 그로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사이에서는 상봉 추첨을 '로또'라고 부른다. 2000년부터 시작돼 2015년까지 20차례 진행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는 운이 좋은 몇십 명만 뽑힌다. 노회찬의 어머니는 1990년대 초 통일부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다. 이산가족 사이에서는 상봉 추첨을 '로또'라 부른다. 원태순도, 아들 노회찬도 "순서가 오겠지" 하며 '로또 당첨'을 기다린 게 어언 25년 됐다.(☞ 관련 기사 : <서울신문> 2017년 7월 22일 자 '[서울광장] 이산가족 노회찬의 유감')

※ 노회찬이 떠나고 한 달쯤 뒤인 2018년 8월 20일 금강산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린 남북이산가족 상봉 1차 참석자를 뽑는, 무작위 컴퓨터 추첨(2018.6.25.)이 눈물바다 속에 진행됐다. 상봉 대상자의 5배수인 500명 1차 상봉 후보자 추첨의 경쟁률은 568.9대 1을 기록했다.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생존 이산가족은 5만6890명에 달했다.

2017년 9월 실향민 2세 출신의 국회의원 원혜영(평남), 노회찬(함남), 진선미(함남) 의원은 '위성지도를 활용한 이산가족 고향 찾기 과제와 지원방안'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공동주최했다(2017.9.18.).

1부 개회식에서 원혜영 의원은 개회사를 통해 "제 아버님은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으로 저 역시 실향민 가족"이라고 밝히고 "북한개발연구소에서 개발한 고향 찾기 프로그램이 70년간 고향을 그리며 분단의 고통을 겪어온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아픔을 치유하는 동시에 꿈에 그리던 고향에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진선미 의원도 "저의 아버지는 함남이 고향이며 생전에 북에 두고 온 홀어머니를 늘 그리워하셨던 이산가족 이었다"고 밝히고 "현재 이산가족들을 위한 지원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에서 이산가족 고향 찾기 사업과 지원방안에 대한 이번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을 경청해 이산가족문제가 해결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의정활동을 펼쳐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노회찬은 "이산가족 상봉이 중단된 상태에서 위성지도를 활용한 이산가족의 고향 찾기는 실향민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보듬고 위안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시도가 될 것으로 확신하며 오늘의 세미나를 통해 실향민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풍부하게 논의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는 위성지도를 활용하여 이산가족 실향민 고향집의 현재 모습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인 '엔케이파인더(NK-Finder)'가 소개되고 지원방안이 논의되었다. 탈북민 석·박사를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북한개발연구소(소장 김병욱)는 "이산가족 상봉은 북한의 협조가 없이 불가능하지만, 고향집 찾기는 프로그램만 있으면 남한의 힘으로 가능하다"며 "이산가족·실향민들에게 탈북민들이 드리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실향민이 기억하고 있는 주소를 실마리로 한다. 옛 방식의 좌표로 제작한 북한 지도를 지금의 구글 지도로 변환해 정확한 지점을 찾아준다. 이렇게 찾은 위치를 바탕으로 그동안 고향집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한다.

▲ 노회찬 축사. ⓒ노회찬재단
▲북한개발연구소가 만든 고향 찾기 프로그램 '엔케이파인더'(자료 : 북한개발연구소)

한반도 평화와 주한미군의 역할,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

한편 노회찬은 오랫동안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주한미군의 제대로 된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였다.

2004년 11월 30일 노회찬은 2003년 7월에 열린 제3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에 앞서 한국측 협상팀(NSC·외교부·국방부·기획단 포함)의 사전준비회의에 제출된 문서(주한미군 지역역할 수행 대비책)를 공개하며, "현재 미국이 한반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주한미군 지역 역할’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선제 군사 개입을 위한 것"이라며 "미국은 중국, 북한을 표적으로 하는 주한미군 지역 역할을 구상하면서 한국군 참여도 요구했다"고 밝혔다. 즉 "결국 주한미군의 지역 역할이 단순히 대테러전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 등 잠재적 패권국가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이 있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명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 2004년 11월 30일 자 사진 갈무리.

2004년 12월 6일 노회찬은 보도자료를 통해 "그동안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고 했지만, 이 보도(<중앙일보> 2004년 12월 6일)에서 미 국방부 관계자는 미국은 GPR(해외미군재배치계획)에 따라 해외주둔 미군을 유사시 어디로든 이동시킬 수 있는데 이는 양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미 관계자가 협상내용 공개를 문제삼은 것에 대해 "한미 간 협상내용은 모두 비밀에 부쳐야 하고, 미국이 허락하지 않는 한 공개되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 외교를 포함한 정부의 활동이 국익에 도움 되는지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 국회 입법부의 권한이자 의무"라고 반박했다. 이어 "한국민의 반발을 의식해 이를 숨긴 채 지역역할 확대를 협상하려는 미국이야말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며 미 국방부 관계자의 '협상내용 폭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위반'이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노회찬은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합의된 것이 없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면, 미국 측에 이 뜻을 명확히 전달하고 지역역할 확대를 용인치 않을 국민의 뜻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라"고 요구했다.

논란이 된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란 미국이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세계 어디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외주둔 미군을 유연하게 배치하려는 전략을 말한다.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처음 언급된 것은 2003년 한미연례안보회의(SCM) 공동성명에서이다. 이 성명에서 한미 양측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지속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본격적인 전략적 유연성의 본격적인 협상은 2005년 2월 시작됐다. 2005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그후 우리측의 입장이 됐다. 협상은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모두 12차례 열렸다. 2006년 1월에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하되 미국은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주한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였다.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에 말하다: "평화란 의견이 갈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2018년 초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전세계를 상대로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이라고 홍보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평창을 평양으로 뒤엎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집요했다. 평창겨울올림픽 조직위원인 나경원(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은 '평양올림픽'을 거론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남북한 단일팀 반대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평창군민들은 지난 10년, 삼수 끝에 겨우 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런데 남한 보수정치인들의 도움으로 평양이 거저 23번째 겨울올림픽 유치 도시로 국제사회에 홍보되고 있는 것이었다.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2018.1.24.)에 출연한 노회찬은 특유의 풍자로 반박했다. 평양냉면을 특별히 좋아하는 노회찬, 그로서는 어쩌면 혼신의 힘을 다 쏟은 비판이었을지도 모른다.

"올림픽 정신이 추구하는 게 평화예요. 그리고 '평양올림픽'이 뭡니까? 아니 뭐, 평양에 콤플렉스 있어요? 올림픽이 '평양올림픽'으로 변질됐다 그러면 평양냉면도 문제 삼아야죠. 왜 냉면은 다 평양 아니면 함흥이냐, 서울냉면, 수원냉면은 왜 없느냐, 대한요식업협회에 이거 완전히 정치적으로 중립이 깨진 거 아니냐고 항의를 해야죠."

▲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 화면 갈무리.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자유한국당이 '위장평화 회담'으로 격하시키자, 노회찬은 페이스북(4.29.)을 통해 자칭 보수 정치세력에게 촌철살인의 쓴소리를 던졌다.

"완전한 비핵화와 돌이킬 수 없는 평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다. 수십년간 전쟁위기와 이념대결로 권세를 유지해온 세력들이다."

노회찬은 "그들은 '비핵화와 평화의 길에 나라를 통째로 넘기겠습니까?'라고 절규한다"면서, 자유한국당이 채택한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라는 6월 지방선거 메인 슬로건을 빗대어 일갈했다. 그리곤 이내 "예상 밖의 진전에 어처구니없어 하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대답한다"며 "그렇다"라는 답을 내놓았다.

노회찬은 자유한국당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었다. 그것은 바로 '평화' 그 자체였다.

"이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볼 때는 평화예요. (중략) 남북 간에 늘 군사적으로 긴장되어 있고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도 몰라야 자기들이 그나마 살 틈이 생기는데 그런 게 평화로, 대화로 하면 그렇잖아요. 핵무기 달라고 (미국 가서) 구걸하고 다니고 이랬는데 평화 시절이 오면 골치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자신들이 서식하고 번성할 기회가 점점 적어지는 거죠. 북한은 핑계인 것이고 자신들이 궁색하게 되는 처지, 불우한 처지가 원망스러운 거죠."(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2018.1.24.)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 위에서, '자유한국당을 넘어 경남 제1야당으로!'를 내건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정의당의 '경남지방선거승리전진대회'에서 노회찬은 강조한다.

"지금 한반도와 대한민국에서 없어져야 할 것이 두 개입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가 없어져야 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자유한국당이 없어져야 합니다. (중략) 자유한국당을 없애기 위해 정의당이 만들어졌습니다."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과 한반도의 긴장을 조장하는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한국의 '얼치기 보수'가 앞세우는 것은 애국, 애국심이었다. 이들은 '애국심'을 마치 보수의 전유물로 생각한다. 이런 '박제된 애국심'에 대해 노회찬은 일침을 가했다.(책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노회찬·구영식 지음, 비아북 펴냄) 215~217쪽)

"20세기의 세계사적 갈등 속에서 배웠듯, 자기 나라가 살기 위해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는 애국에는 여전히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함께 잘살 수 있는 애국이어야 하고, 애국이란 이름하에 자신들의 권력욕을 합리화시키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진정한 애국은 그 사회 공동체가 자부심을 갖고 갈등 없이 잘살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애국이다."

"국민들이 자기 나라에 자부심을 갖는 순간 애국심은 저절로 나온다. 애국심은 강요하거나 교육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 그건 정치인들의 역할이다.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정치다."

노회찬의 유고집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펴냄)에는,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는 제목의 글이 수록돼 있다. "엄밀히 말해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전쟁 또는 평화뿐입니다"로 시작하는 노회찬의 글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친다.

"평화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 멀리서 오지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빠르고 편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누구도, 보수라 할지라도 전쟁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보수가 아닙니다. 가짜지요. 극우라면 모를까 건강한 보수라면 절대 전쟁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보수든 진보든 평화와 안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컨대 유럽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의견이 갈리는 문제는 경제나 복지입니다. 전쟁도 불사하자는 주장은 나라를 망가뜨리자는 것일 뿐 보수라는 이름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합니다. 평화란 의견이 갈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 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 '노회찬과 한국 정치 여덟 장면 : 기록으로 톺아보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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