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번 버스,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하다
2018년 7월 26일 저녁 서울 연세대 대강당. '진보정당 대표의원 자유인‧문화인‧평화인 고 노회찬 국회의원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에서는 2012년 진보정의당 출범 당시 노회찬의 당 대표 수락연설 영상이 비춰졌다.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 노회찬의 생전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장내는 숙연해지며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노회찬이 우리 곁을 떠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6411번 버스를 불러낸다.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해,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 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인 '투명인간'을 호명하는 2005개 글자(공백 포함)의 연설문이 뒤늦게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진 것이다.(☞ 바로 가기 : 노회찬재단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노회찬의 마지막 거처였던 정의당은 "노회찬 정신은 바로 '6411번 버스' 정신"이라고 말한다.
2019년 노회찬 1주기를 맞아 이정미(정의당 전 대표)는 '노회찬 정신의 양 날개, 6411버스와 진보정당'이라는 글을 <프레시안>에 기고한다.
2020년 노회찬 2주기를 맞아 심상정(정의당 전 대표)은 트위터에 글을 올린다.
정의당 창당 8주년(2020.10.21.)을 맞은 기념식에서 김종철(정의당 현 대표)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를 대변한 발자취가 정의당의 역사"라며 "노회찬 전 대표의 6411번 버스로 표현되는 정의당의 변함없는 창당정신"이라고 밝힌다.
진보정의당 당대표 취임사와 퇴임사
노회찬이 떠나기 전, 그의 '6411번 버스'와 '투명인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진보정의당 당대표 취임 연설(2012.10.21.)과 당대표 퇴임 고별사(2013.7.21.)를 통해서였다. 6411번 버스를 호명하는 두 연설의 본문 내용은 시작 부분과 뒷부분을 제외하고는 똑같다.
노회찬은 6411번 버스를 통해 (1)"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불러낸다.
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출근해야 하는, 한 달에 85만원 받는,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인 5.60대 아주머니 분들
② 현대자동차 고압선 철탑 위에 올라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③ 23명씩 죽어나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④ 남일당 그 건물에서 사라져간 다섯 분
그리곤 (2)투명인간의 고단한 삶과 '진보'의 부(존)재를 묻는다.
이어서 (3)진보정당의 현주소를 고백하며 진보정당의 지향을 밝힌다.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당원 자격조차도 '박탈'당한 노회찬, 그럼에도 당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심경이 노회찬의 당대표 고별사 말미에 오롯이 담겨있음이 느껴진다.
기억에서 잊힌 2010년 선거 캠페인…'6411, 새벽 첫차'
'노회찬은 하필이면 왜 6411번 버스를 탔을까?'
노회찬의 정치궤적에서 6411번 버스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2010년 지방선거 때 진보신당의 서울시장 예비후보 선거운동 과정에서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힌', '실패한' 선거 캠페인이었다.
2010년 4월 13일 노회찬은 서울시장 예비후보 출마 당시 '함께하는 새벽 첫차'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두 명의 수행 보좌진(이종수, 윤희만)과 함께 초록색 6411번 버스 새벽 첫차에 오른다. 6411번 버스는 서울 구로구 거리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 개포동 주공 1단지까지 대략 1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다. 구로에서 강남까지 6411번 버스요금으로 노회찬이 낸 돈은 1000원(교통카드는 900원)이었다.
'노회찬은 하고 많은 버스 중에 왜 6411번 버스를 탔을까?'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는 물음이다.
새벽 4시 30분 이전에 좌석이 가득 차는 2019년의 서울 버스노선은 179개였다고 한다(2010년이라도 크게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그 가운데 새벽 첫차로 6411번 버스를 노회찬 선본에서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노원구 상계동에 거주하던 노회찬은 묻는다.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6411번 버스를 타야 하나? 다른 버스들도 많을 건데…." 어쩌면 당연한 질문일 수도 있다.
대표비서실장 오재영이 말한다. "구로에서 출발해 강남에 도착하는 노선이기 때문에 상징성이 있습니다. 6411번 버스 꼭 타셔야 합니다."
오재영의 배우자 권신윤이 지난 11월 전화로 들려준 이야기다.
노회찬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오재영이 말한 구로와 강남의 상징성은 아마 다들 눈치 챘을 것이다. 구로는 1960~70년대의 '굴뚝 제조업' 구로공단에서 오늘의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의 상징적 일터였다. '말죽거리 신화' 강남은 한국사회 부의 대표적 공간이자 가진자들의 상징적 삶터였다.
6411번 새벽 첫차에 오른 노회찬은 승객들과 나눈 대화와 버스 안 풍경을 영상에 담아 '노회찬의 새벽 첫차'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에 올렸다. 온라인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하는 것 자체보다도 만원버스 새벽 출근길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노회찬은 버스에서 내린 뒤 이렇게 말한다.
영상의 마지막 자막은 '노회찬이 서울 시민을 응원합니다'였다.
해장국으로 빈속을 든든히 채운 노회찬은 이후 일정으로 지하철 출근길 인사(30차)를 마치고, 명동 일대에서 '친환경 무상급식 올레' 선거운동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서울 25시, 새벽을 여는 사람들'
새벽 첫차를 타기 하루 전날인 4월 12일 진보신당 서울시장 예비후보 노회찬 선본 캠프에서 주간사업 점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기획사업으로 대 시민 선거운동 본격 재개로 ①'(가칭) 서울 25시, 새벽을 여는 사람들'(4.13~4.16) ②노회찬의 친환경 무상급식 올레(4.13/4.16) ③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 시민과 함께 사진찍기(4.17) ④한강운하 반대, 한강 생태복원을 위한 노회찬과 함께 하는 시민 올레(4.18) 등을 점검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가칭) 서울 25시,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경우, '첫차를 타는 청소용역 노동자'(4.13), '새벽을 여는 가스충전소 택시기사'(4.15), '노량진 취업학원에서 만난 취업생의 하루'(4.16)로 진행되었으며, 방식은 '현장 방문+인터뷰 및 간담회+소감&정책대안 제시'였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은 고향인 부산 자갈치 시장과 남포동을 배경으로 한 박봉성 화백의 두 번째 장편만화 <새벽을 여는 사람들>(총 27권)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어시장의 활기차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애환과,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주인공 최강타의 좌충우돌 이야기. 잡다한 일을 통해 어판장의 생리를 배우며 경매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독점을 노리는 투기꾼들의 음모를 알게 되고 이들에 맞서 어판장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노회찬의 회고에 따르면, 중학교 입시준비를 위해 초등학교 4학년(1966년) 때 늘 가던 만화방에 발걸음을 끊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수배생활 당시 도망다닐 때 "갈 데 없으면 500원이면 밤새 보면서 라면 하나 끓여먹고" 했다곤 한다. 당시 재미있게 본 만화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오! 한강>, 그리고 박봉성의 만화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무렵 박봉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을 접하지 않았을까 싶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된 노회찬은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에서 만기출소했다. 그리고 생계 대책의 한 방편으로 1993년 인천에서 '책꾸러기'라는 책 대여점을 열기도 했다. 수배 때가 아니라면 이때 봤을 수도 있겠다.
'반MB 후보단일화 선거연대', 격랑 속의 고군분투
2010년 '반MB 후보단일화 선거연대'라는 거친 바람과 파도 속에서 진보신당을 대표해 고군분투했던 노회찬의 서울시장 선거 성적표는 예상보다 많이 초라했다. 노회찬의 지지율은 2009년 말 여론조사에서 10%를 상회하기도 했지만, 예비 선거운동 기간과 본 선거운동을 거치면서 오히려 계속 하락했고 결국 3.26% 득표에 그쳤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와 과정에 대한 아쉬움을 김현우(진보신당 정책위원)는 이렇게 토로했다.(☞ 관련 기사 : <참세상> 2010년 6월 4일 자 '진보진영의 정계개편이 필요하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이 처한 상황은 안팎으로 많이 어려웠다. '반MB 후보단일화 선거연대'의 후보단일화 압박이라는 격랑이 외부 악조건이었다면, 당 내부에서는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들의 줄사퇴가 이어졌다. 이유는 달랐지만,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와 이용길 충남도지사 후보에 이어, 막판에는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가 잇따라 주저앉았다. 선거 결과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22명을 배출했다.
서울시장 선거가 전혀 예상 밖으로 초박빙 접전 끝에 오세훈 후보(한나라당)가 한명숙 후보(민주당)를 누르고 승리하자, 두 후보의 표차(2만6000표)보다 많은 14만3000여 표를 얻은 노회찬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노회찬은 그것을 홀로 감당해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한명숙 후보의 패배는 노회찬 탓이 아니라 한명숙 후보와 선본, 민주당 측의 문제 때문이었음에도 말이다.
이틀 뒤인 6월 4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자신이 한명숙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해 한나라당에 승리를 안겨줬다는 비판에 대해, "내 지지자들은 대부분 '이번 선거만큼은 미안하지만 저쪽(한명숙 쪽) 찍겠다'고 내놓고 얘기하는 상황이었다.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식으로 가는 건 사실관계도 다르고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당 구청장 후보를 찍은 유권자 중 상당수가 정작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는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명숙 후보가 2만6000여 표 차이로 졌는데, 강동구 같은 경우 민주당 구청장 후보가 얻은 표가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 표보다 3만 표 더 많다. 민주당 구청장 후보들이 얻은 표만 (한 후보가) 얻었어도 이겼을 것이다." 그는 또 단일화 무산 책임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한 후보 쪽도 단일화를 위해 협상하자는 제안이 일체 없었다"며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힘이 더 있는 쪽의 책임이 크지 않겠나"고 밝히기도 했다.
2010년 10월 15일. 6.2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한 노회찬 및 당 지도부는 '당이 직면한 중요한 과제들을 책임있게 매듭짓는' 마지막 임무를 마무리짓고 총사퇴했다. 평당원으로 돌아가기 전 당대표로서 노회찬의 마지막 일정은 당사가 입주한 건물 청소용역 노동자들과의 점심식사였다.
노회찬은 트위터에 "저는 오늘 물러납니다. 진보신당 대표로서 마지막 공식 일정은 당사가 입주한 건물 청소용역 아주머니들과의 점심식사입니다. 늘 곁에서 수고하시지만 투명인간처럼 존재를 무시당하는 분들과 늘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글을 남긴다.
노회찬은 퇴임사에서 힘줘 말한다.
이어서 이렇게 말을 맺는다.
2년 뒤인 2012년 10월 21일, 19대 총선(4.11.)에서 재선에 성공한 노회찬은 진보정의당 당대표로 취임하면서 그동안 잊혀져있던 '6411번 새벽 첫차'를 다시 불러내는 '감동'의 연설을 한다. 선거 기획으로는 비록 '실패'였는지 모르겠지만, 노회찬 가슴 깊은 곳에 6411번 버스는 계속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떠난, 그 이후: "'노회찬의 약속'은 아직 미완성"
2010년 4월 13일 노회찬이 탔던 6411번 새벽첫차는 여전히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싣고 새벽길을 달린다. 서울시내만 해도 이런 버스가 한 두 대가 아니다.
노회찬이 떠난 뒤 하나의 상징이 된 6411번 버스를 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자, 정치인들이 꽤 많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새벽 버스 증차된다는데, 언론에 주구장창 나온 우리 노선은 왜 안 바뀌는 건지, 급행 노선이나 제발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박원순 서울시장님이나 문재인 대통령님이 한번 타보면 바로 알 텐데…"라고 입을 모았다."(☞ 관련 기사 : <동아일보> 2019년 7월 23일 자 '벌써 1년, 그가 떠난 빈자리…노동의 새벽 달리는 '노회찬 첫차'')
2019년 서울시는 6월 10일부터 새벽 만원버스를 줄이기 위해 146번, 160번, 240번, 504번 등 4개 노선 첫차 배차를 늘렸다. '6411번 노회찬 버스'는 혼잡한 정류장이 적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단지 혼잡한 6411번 새벽 첫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회찬은 '투명인간들을 위한 정치'를 다짐했고 그것을 국회 안팎에서 실천했다. 물론 노회찬의 투명인간들이 청소노동자들만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 온 수많은" 노동자와 서민들 모두를 뜻하는 것이며, 목소리를 빼앗긴 이 땅의 모든 사회 약자들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것은 노회찬이 의정활동을 하면서 늘 가슴에 새겨둔 경구인, 신영복 선생의 '함께맞는비'가 말하려는 것과 같았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으로 갖고 있는 많은 우산 중 하나를 씌워주는 데서 끝나지 말고 동고동락하는 자세로 현장에서 같이 비를 맞으며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의원이 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노회찬은 '6411번 버스와 투명인간'으로 상징되는, 가장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으려 애썼다.
6411번 버스 투명인간들에 대한 노회찬의 약속은 의정활동으로, 특히 입법 발의에서 잘 드러난다. 법안 발의는 국회의원이 초심을 얼마나 잊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가늠자라고 할 수 있다. 법안은 국회의원과 소속 정당이 꿈꾸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3선 의원 노회찬이 7여년의 의정활동을 통해 발의한 1029건(대표발의 127건)의 의안(법안, 결의안, 국회규칙)은 많은 경우 사회 약자와 소수자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법 조항에 사람의 온기를 불어넣으려 한 시도였다. 그가 발의한 법안에는 민주노동당으로 시작한 진보정당의 역사와 진보정치인 노회찬이 꿈꾼 세상이 담겨 있기도 하다.(☞ 관련 기사 : <한겨레21> 제1223호(2018.7.30.) '법안에 아로새긴 '약자 보호'의 꿈')
2018년 7월 23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노회찬. 그가 떠난 뒤, 투명인간들과 함께 하기로 한 노회찬의 약속과 꿈은 어느 정도 이뤄져 왔을까?
"수많은 투명인간을 위해 정치가 존재해야 한다던 노회찬의 꿈. 여전히 미완성입니다"라고 한 KBS <9시뉴스>(2019년 7월 21일 자) 김연주 기자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가르며 가슴으로 파고든다.
* 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 '노회찬과 한국 정치 여덟 장면 : 기록으로 톺아보기'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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