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그린뉴딜이 부상하고 있다. 코로나19 재난으로 침체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 정부가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디지털 뉴딜' 뿐이었다. 그러다가 대통령이 직접 그린뉴딜을 언급하고 환경부, 산업부, 국토부, 중기부에 검토 보고를 요구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 한국판 뉴딜의 초점이 흐려진다며 반대하고 나섰지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결국 한국판 뉴딜에 그린뉴딜도 포함됐다(청와대 김상조 정책실장의 그린뉴딜 반대 입장이 정권 실세들의 태양광 산업에 대한 이익 추구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작년부터 미국에서 거세게 일어난 그린뉴딜의 바람이 지난 총선에 정의당과 녹색당, 그리고 민주당의 정책 공약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이렇게 청와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뜻 환영하고 반길 수가 없다. 그린뉴딜이 태평양을 건너고 청와대까지 들어가면서 거론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초라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제레미 리프킨과 같이 기술과 시장에 우호적인 개혁주의자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린뉴딜만을 듣고 있다(민주당이 총선에서 그린뉴딜을 제시하면서 그나마 언급하던 기후위기나 배출제로와 같은 말도 싹 사라졌으니, 리프킨 이야기라도 제대로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로테스(AOC) 하원의원과 민주당 대선후보로 뛰었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주장하던,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을 동시 해결하는 그린뉴딜이라는 급진적 이야기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일자리 정책으로 이해되는 그린뉴딜은 지금까지 해오던 정부의 여러 정책과 사업들을 새롭게 묶는 포장지가 되었다.
한국 정부는 그린뉴딜이 무엇인지 명확한 정의조차 제시하지 못했다. 그린뉴딜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정부 관계자는 '토건산업을 뺀 녹색성장 정책의 업그레이드'라고 답했다. 이명박의 녹색성장에서 4대강 사업을 빼고 이름만 바꾼다고 그린뉴딜일 수 없다. 2008~2009년의 세계 금융위기 시기를 배경으로 처음 제시되었던 그린뉴딜(혹은 한국판 변형인 녹색성장)이 기후위기 인식이 전면화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요구가 분출하는 현재의 그린뉴딜과 같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재난을 경과하면서 새로운 정상 상태(뉴 노멀)를 찾아가는 와중에 논의 주제로 부상한 게 지금의 그린뉴딜이다. 단순히 토건사업을 빼고 리모델링을 좀 더 열심히 한다고 그린뉴딜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명확한 정의도 없는 상태에서 정부 관계자들은 그린뉴딜 사업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 바쁘다. 정책 기회의 창이 열리니, 여기저기에서 그린뉴딜에 적합한 사업이라며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도 없지 않겠지만, 문제는 제안들을 평가하고 고를 기준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다. 최근 총리가 주관하는 목요 클럽에서 민주당 실세 의원이 '산악 관광'을 그린뉴딜 사업으로 들고 나왔다. 산악 관광을 명분으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추진하다 큰 사회적 갈등을 경험했던 역사와 교훈은 사라졌다. 뭐든 그린뉴딜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이런 사업이 그린뉴딜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나타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왜 그린뉴딜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첫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가 삭제한 이야기들을 복원해야 한다. 유엔 사무총장조차 기후위기 상황이며, 1.5도 평균 기온 상승을 막기 위해서 2050년 이전까지 배출제로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국제적 호소를 환기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한국의 2030년 온실가스 감축이 매우 불충분하며, 한국은 석탄발전 투자를 지속하는 '기후악당'이라고 비판한 사실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이뿐만 아니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를 해결해야 할 정부의 노력이 얼마나 부실한지도 새삼 강조되어야 한다. 결사의 자유와 아동노동 금지를 위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한국이 국제적인 '노동악당'이라는 부끄러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하는 청와대와 정부가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기후위기 비상선언'이었어야 하며, 그린뉴딜은 배출제로와 사회적 불평등 해결을 목표로 한다고 천명하는 일이었어야 한다. 그린뉴딜의 방향, 규모, 속도 그리고 기준을 명확히 제시해야 했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지난주에 토론회를 열고 '정의로운 그린뉴딜'의 정의, 목표, 원칙 등을 발표하고,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의 목소리로 아래로부터의 그린뉴딜은 무엇인지를 토론했다(애초에 그린뉴딜 개념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있어야 할 기후정의와 정의로운 전환 원칙이 태평양을 건너 청와대에 들어서면서 싹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정의롭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토론회의 발표 내용 중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린뉴딜을 위한 수단으로 대규모 재정투자와 함께, 기존 체제 해체를 위한 규제 강화, 그리고 민주적․전환적 역량 강화가 강조되었다. 특히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온실가스 배출을 지속하면서 이익을 얻어왔던 기존 체제를 해체하기 위한 정부의 규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정을 투자하여 새로운 사업을 한다고만 해서 될 일은 아니다.
잊혔던 일 두 가지를 기억해보도록 하자. 우선 자동차 이야기다. 정부는 2015년에 녹색성장기본법을 개정하여(제47조 2항)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를 도입했다. 일정한 기준을 세워서 그 이상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차를 구입할 때는 돈을 더 내도록 하고, 그 이하로 배출하는 차를 구매할 때는 그 돈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은 자동차 생산과 구매로 이행되도록 설계된 제도다. 그러나 정부가 관련 시행령과 시행세칙을 만들지 않아서 아직도 이 제도는 시행되지 않았다.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직무 해태의 이유는 간단하다. 온실가스를 줄이는 정책이 기업에 부담이 된다고 주장하는, 현대기아차와 같은 자동차기업들의 로비와 관료들의 온화한 태도, 그리고 국회의 침묵 때문이다. 이 제도를 시행하는 대신 정부와 협약한 배출 기준에 맞는 자동차를 내놓겠다는 자동차기업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린뉴딜로 뭘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탄소차 협력금제도를 당장 시행하는 것이라고 답해야 한다.
두 번째는 집 혹은 건물에 관한 이야기다. 2012년에 제정된 녹색건축물 조성지원법에는 부동산 거래 시 건축물의 에너지소비를 증명하도록 하는 규정(제18조)이 있었다. 건축물의 소유자 혹은 관리자는 건축물을 매매하거나 임대하려고 할 때 거래계약서에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평가서를 첨부하도록 했으며, 중개업자에게도 같은 의무를 부여했다. 건물의 벽체, 창호 등이 부실해서 에너지 낭비가 심할 경우에 매매 혹은 임대 가격이 높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건물 사용자가 냉난방 등을 위해서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고 그 만큼 비용을 많이 지불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입자들이 그렇다.
건축물 에너지소비 증명제는 단열이 잘된 벽체와 창호, 그리고 효율 좋은 보일러와 조명기구 등이 갖추어진 에너지 성능이 좋은 건물인지 아닌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 부동산 시장에서 세입자의 힘을 키워줄 있는 제도다. 반면 당연하게도 건물주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제도다. 건물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자신들에게도 부담스러운 규제를 피하려는 중개사업자의 강력한 저항으로 2015년 법이 개정되면서 이 의무가 사라져 약화되었다. 다시 그린뉴딜로 뭘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부동산 거래 시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평가서 첨부를 의무화하는 제도를 되살리는 것이라고 답해야 한다.
그린뉴딜,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처럼 이야기하면 이미 실패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고 사회의 부를 탐하는 기업들과 건물주들을 규제하지 않으면, 그린뉴딜이 아니다. 뉴딜은 '새로운 사회적 협약'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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