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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한국 53개 도시를 기록한 이 책, 읽다 밤을 새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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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한국 53개 도시를 기록한 이 책, 읽다 밤을 새 버렸다

[김시덕의 직업적 책읽기] <한국의 도시> 한국 도시계획사의 거목, 박병주의 도시 스케치

오늘은 현대 한국 도시계획의 선구자 가운데 한 분인 박병주 선생의 <한국의 도시 - 박병주 도시순례 스케치>(열화당, 1996)를 소개한다. 절판된 책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책이므로, 주변의 도서관 등에서라도 꼭 한 번 살펴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평을 쓴다.

박병주는 1966~70년 사이에 서울시장을 역임한 '불도저' 김현옥 시장의 서울 도시계획 발상을 구현한 '새서울 백지계획'을 작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불후의 명작인 손정목 선생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 따르면, 박병주는 김현옥 시장이 1966년 5월 27일에 다소 즉흥적으로 발표한 새 행정수도 구상을 이어받아 "4천만 평 정도의 넓이와 상주인구 100만 내지 150만 명 규모, 그리고 도시의 외곽을 무궁화형으로" 구현한 '새서울 백지계획'을 같은 해 7월에 완성했다. 결국 이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손정목은 "이 그림은 이 나라 도시계획 역사상 하나의 획이었고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손정목, <서울도시계획이야기 1>, 218쪽)라고 했다.

▲박병주의 새서울 백지계획(1966년). ⓒ<국토> 1997년 3월호

건축가 김중업과 함께 1957년에 경주 국립공원계획을 작성한 이래, 박병주는 마포아파트단지계획, 동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단지계획, 화곡동 40만 단지계획 등(손정목, 같은 책 211쪽) 서울의 굵직한 도시계획을 구상했다. 그런 박병주를 손정목은 책 안에서 "이 나라 안 도시계획계의 실질적인 제1인자"라고 평가한 바로 뒤에 아래와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1990년대 후반에 그는 '그림 그리기'가 더 유명할 정도로 많은 시가지 그림을 그렸고, 회갑・정년퇴임・고희 기념 등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도시>라는 두터운 그림책도 발간했다. 아마 이 그림책은 20세기 말, 이 나라 안 도시경관을 그린 유일한 자료로서 오랜 훗날까지 남을 것이다." (212쪽)

손정목의 평가와 같이 박병주의 그림은 회화적으로 수집의 대상이 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울 곳곳을 그린 그의 수채화 작품 수십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온라인으로도 공개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는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해 "1969년부터 중앙도시계획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도시 개발의 실상을 목격 (중략) 박병주가 정밀하게 제작한 도시 스케치들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풍경화이기보다는 '도시계획가가 그리는 문화경관'으로 고도성장 속에 급변하던 국내 도시의 역사와 변화상을 담아낸 것"(☞바로 보기)이라고 소개한다.

▲<한국의 도시> 그림4. 관악산을 배경으로 한 한강의 철도교와 인도교. ⓒ박병주

손정목・서울시립미술관 모두 박병주의 도시 연작(連作)에 대해, 회화 작품 그 자체의 미적 가치 이상으로 기록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2019년 9월에 이 서평란에서 <이야기로 듣는 국토·도시계획 반백년>(보성각, 2009)을 소개했는데(☞한국도시계획사의 이면: "남산 폭파론"이 나온 까닭), 이 책에서 박병주 역시 이 책의 기록적 가치가 후세에 평가받으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 책은 이름 그대로 스케치 기행의 산물이지요. 1990년 1월부터 1995년 3월까지 5년 3개월에 걸쳐 국내 53개 도시를 대상으로 직접 찾아다녀 이루어진 것입니다. (중략) 하나의 도시에 그 도시의 특징적 경관을 여섯 장 정도 골라 그리고 이 그림들과 관련시켜 그 도시의 형성과정을 도시개발적 측면에서 짚어가면서 자연파괴와 역사 문화재의 훼손 현황, 그 밖의 도시경관 저해요소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도시 고유 경관의 매력을 부각시켜 아름다운 경관으로 재생시키기 위한 도시개발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도록 나름대로 애썼습니다. 이 책은 1990년대 상반기 한국의 도시 이미지를 한꺼번에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자부합니다." (122~123쪽)

미술의 문외한인 나는, 사진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 풍경화가 여전히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이 책 <한국의 도시>는 내가 그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절판 상태였기 때문에, 그간 굳이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트레바리 독서모임에서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 전5권을 매달 한 권씩 정독하는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책에 대한 손정목의 평가를 다시 한 번 읽은 김에 온라인 고서점에서 이 책을 구입해서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새 버렸다.

▲<한국의 도시> 그림 27.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한 강남 시가지. ⓒ박병주

이 책에 그림이 실려 있는 도시들 가운데에는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있고, 몇 년 전에 간 뒤로 크게 모습이 바뀐 곳도 있다. 2014년에 방문했던 마산, 그 중에서도 식민지 시기의 일본인 거주구역인 신마산 지역은 6년이 지난 2020년 현재 그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고 전해 듣고 있다. <한국의 도시>가 출판되었을 때에는 아직 마산・창원・진해가 창원시로 통합되기 전이어서, 이 책에는 이 세 도시 이야기가 분리되어 있다. 그 가운데 마산에 대해서는 5장의 수채화가 실려 있다.

'그림 280 산호공원에서 조망한 마산시가지'에는 19세기까지 형성된 구마산과 20세기에 형성된 신마산,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형성된 동마산이 그려져 있다. '그림 280'과 '그림 281 돝섬에서 본 마산 시가지와 배산 무학산'에 대해 박병주는 "위의 두 그림을 스케치하면서 마산은 이제 바다 쪽으로 과감하게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시의 시가화 가용토지의 한계성이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316쪽)라고 적는다. 그의 예측대로 '그림 281'이 그려진 뒤 마산 어시장은 매립되었다.

또, '그림 284 우동동 앞 해안간선도로 공사장면. 수출자유지역의 전모를 알 수 있다'에 대해 박병주는 "그림에서는 해면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상은 심하게 오염되고 있다. (중략) 해안매립을 통한 도시개발계획에서는 마산의 당면과제 중 가장 심각한 문제인 마산만 수질오염의 회복에 대한 대책도 아울러 풀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317)고 제안한다. 환경보다는 공업입국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던 1970~90년대를 겪은 지금, 여전히 마산만의 오염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매일경제> 2019년 10월 3일자 '마산 앞바다로 물놀이 갈수 있을까 - 창원시 수질개선 프로젝트'). 박병주가 30년 전에 제안한 마산의 미래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한국의 도시> 그림 280. 산호공원에서 조망한 마산시가지. ⓒ박병주

▲<한국의 도시> 그림 284. 우동동 앞 해안간선도로 공사장면. ⓒ박병주

한편 서울에 대해서는 29장의 수채화가 실려 있다. 한국 도시를 그린 325장 가운데 11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현재 한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서울시민의 비중이 5분의 1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29장의 수채화에는 경복궁・종묘처럼 조선시대 역사를 전하는 경관 및 사대문과 그 주변의 도심 경관 이외에(그림 3 시청 앞에서 본 북악산의 경관), 강북에서 바라본 서울 서남부의 관악구・동작구(그림 4 관악산을 배경으로 한 한강의 철도교와 인도교),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영등포 구도심과 20세기 후기에 형성된 여의도 금융가(그림 29 영등포 역전과 여의도 금융가를 잇는 축상의 경관), 영동개발의 상징인 서울 동남부의 테헤란로(그림 27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한 강남의 시가지) 일대 경관 등 서울의 넓은 구역이 비교적 균형 있게 담겨 있다. 물론 넓은 의미의 강남인 관악구에 사는 입장에서 강북 지역이 지나치게 많이 그려져 있다는 불만은 있지만.

▲<한국의 도시> 그림 28. 서울 성북구 길음동의 노점상과 산 위에 밀집한 주택들. ⓒ박병주

그렇기는 해도, 똑같이 강북 구도심이면서도 사대문・용산・마포 등에 비해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길음동 산동네와 골목시장을 그린 수채화가 참 좋다(그림 28 성북구 길음동의 노점상과 산 위에 밀집해 있는 주택들). 이 책이 출판된 1990년대 초에는 아직 산동네 골목길・골목시장을 재건축・재개발 대상으로밖에는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산동네를 주로 재건축・재개발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최인기 <그곳에 사람이 있다 - 오래된 미로, 도시 뒷골목>(나름북스, 2016)이나 모종린 <골목길 자본론 - 사람과 돈이 모이는 도시는 어떻게 디자인되는가>(다산북스, 2017) 같은 책이 상징하듯 현재 골목길이 도시민의 그리운 고향이자 한국 경제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현대 한국의 도시들에서 조선시대와 독립운동가・매국노의 흔적을 찾으며 왕족・양반・민족・통일을 부르짖으면 칭찬받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또는 어떤 땅에 어느 정도의 부동산 가치가 있는지만 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쓰고 읽는 책이 양산되는 와중에, 박병주의 <한국의 도시>는 도시를 어떻게 관찰하고 살아가면 좋을지 조용히 펼쳐 보여주는 존재다. 이런 책이 절판된 것이 안타깝다.

▲<한국의 도시>(박병주 지음)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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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문헌학자, 전쟁사 연구자, 서울답사가. 작게는 시군구(市郡區)에서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집단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직업적으로 책·논문·기사를 읽는 중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는 좋은 글을 발견할 때마다 서평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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