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진보 논객'으로 불리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한 미래통합당 의원실이 주최한 총선 평가 토론회에 참석해 한 말이다. 진 전 교수는 한국사회의 주류가 기존의 산업·토건자본에서 IT 기반 신산업과 금융자본으로 이동하고 있고, 현 주류 유권자들의 생각과 정서는 이전과 다른데도 "보수가 주 전장(主戰場)을 내버려뒀다"고 지적했다.
진 전 교수는 먼저 거시적 차원에서 한국사회의 변화를 지적했다. 그는 "총선 실패에는 단기적·장기적 원인이 있는데 단기 원인은 코로나"라며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참패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의 운동장은 이미 기울었는데 보수만 (이를) 모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진 전 교수는 한국사회가 지난 수십 년 사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사회로 변화하면서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86세대와 긴밀하게 교감하는 50대 이하 연령층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사회와 정보화 사회의 차이는, 노동자들 중 물질적 재화의 생산·가공·유통보다 정보의 생산·가공·유통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은 사회라는 것"이라며 "보수는 산업화의 주력이었고 민주화 세력은 '투쟁만 했지 돈 벌어 봤느냐'는 욕을 먹었지만, 정보사회로 넘어가며 '박정희 신화'는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386이 주류가 됐다. 이들과 같이 학교를 다니고 공감했던 이들이 벤처기업, IT기업을 이끌며 한국사회의 주체가 바뀌었다. 이들이 이들 세력(386)과 교감하는 상태가 된 것"이라며 "그런데 보수세력은 아직도 전통적 토목세력과만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분석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특정 정치세력의 기반이 어디인지를 보려면 "비리의 양상을 보면 된다"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부산 엘시티 사건 등 건축 관련 인허가 비리(가 주)였고, 정권 관련 국책사업은 4대강 등 '공구리'를 치는 사업"이었던 반면 "요즘의 비리 양상은 '신라젠', '라임펀드' 등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으로 가고 있고, 국책사업도 성격이 달라져서 태양광, 배터리, 공용 와이파이 등이 구설에 올라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공동체의 기억'도 달라졌다며 "지금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걸 기억하려면 80세는 돼야 한다. 지금은 (젊은 세대가) 아버지에게 '박정희·전두환에게 어떻게 당했나'를 듣고 자란다"고 꼬집었다.
그런데도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걸쳐 보수세력은 정치경제적 통치 전략에서 여전히 '이명박의 747'등 성장 위주 경제정책, '박근혜의 블랙리스트' 등 귄위주의 통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며 '박정희 신화'에 집착했고, 이는 시대적 효용이 다했다고 진 전 교수는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박정희 시절 정체성인 산업전사·반공에 집착하다 보니 새로운 세력을 보수로 포섭하는 데 실패했다"며 "옛날에는 보수-진보가 나눠지는 분기점이 40대였는데 이번에 50대로 올라갔고 그것도 이미 50대 후반이다. (이것이) 60대로 올라가면 여러분의 전통적 지지세력들은 이제 돌아가시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저쪽(민주당)은 빅데이터를 가지고 선거운동을 하는데 여기는 음모론, 태극기"라며 "중도층이 봐도 '와,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이다. 조국 사태를 통해 집권세력의 위선과 문제점을 보고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느냐'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쪽(보수세력)을 보니 '그래도 너희들한테 권력은 못 주겠다'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만 진 전 교수는 한국사회의 주류 교체 이후 '신주류'가 된 이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그는 "'강남좌파'의 의미가 굉장히 크다"며 "학계에서도 제가 '어용'이라고 보는 이들은 (집권세력의 불편한 일일) 대신 처리해 주는 청부업자로 변했다. 스스로는 아직 운동권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기득권이 돼서 그 기득권을 자기 아들딸들에게 세습하는 단계까지 가 있는데, 아직 그런 운동권 시절의 망상, (스스로는) 아직 개혁을 하고 있고 운동·혁명을 하고 있는 환상을 가지고 비리를 저지르는 상태"라고 했다.
그는 "주류가 바뀌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진보'라고 하지만 이미 진보가 아니다. 바꿀 것보다 지킬 게 많은 세력"이라며 통합당 정치인들에게 "그래서 여러분에게 위협이 된다. (이들은) 신보수"라고 농담 섞인 경고를 했다.
"탄핵의 강 못 건너 졌다…황교안이 대표인데 대안세력 인정받겠나"
다음으로 진 전 교수는, 이같은 정치 환경의 거시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통합당의 전략전술 차원의 실책을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 총선 패인과 관련해 "'탄핵의 강'을 못 건넜다"며 "왜냐, 전통적 지지층이 거기 있으니 그렇다"고 했다. 그는 "결국 보수 혁신이 실패해서 '태극기 유튜버'에 의존한 것"이라면서 "그들에게 전체 보수 여론을 주도할 헤게모니를 넘겨줬고, 이들은 우리 당을 무조건 지지하니까 거기 안주해 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극우 유튜버'의 폐해에 대해 진 전 교수는 "(이들이)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하도 선동해서 그게 광신이 됐다. 그러니 패배가 인정이 안 되고 지니까 음모론으로 나간다"면서 "(통합당이) 극우 유튜버와 싸우고 있는데, 극우 유튜버와 같은 문제는 민주당도 겪고 있다. 극단적 선동 세력은 자기 동력을 갖고 있고 통제가 안 된다. 그래서 정당 공천 과정에도 개입한다. 그나마 민주당은 (이들을) 주변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게 열린민주당인데, 여기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고, (때문에) 정당정치에 왜곡이 나타나고 있다.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교안 당 대표'의 상징성도 지적됐다. 진 전 교수는 "이 분의 상징자본은 총리인데, (그는) 탄핵정권의 패전처리 투수였다. 그러니 대안세력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것"이라고 했다. 핵심 지지층 외에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확장 전략을 펴려 해도, 살을 붙여 몸집을 늘릴 뼈대 자체, 즉 "코어(core)"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이번에 선거에서 처음으로 통합당을 찍을까 생각도 했는데, 정의당 후보가 있어서 안 찍었지만 만약 후보가 이준석·하태경이라면 찍어줬을 것"이라며 "인물이 괜찮으면, 웬만하면 했을 텐데 '웬만'하지가 않았다"고 했다.
총선 국면의 최대 현안이었던 코로나 사태 대응도 그는 지적했다. 그는 "코로나는 국가적 재난이어서 정쟁화하면 안 됐다"며 "국가적 재난에는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어도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서 싸워야 하고, 그러는 중에 정부가 잘못하는 것, 이번에 풀어줬다가 확진자가 늘어난 문제라든지 마스크 대응 등을 지적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한다"고 했다.
그는 "대구시장이 누구냐. 이 당 소속 아니냐"며 "내가 이 당(소속 정치인)이었다면 모든 당력을 기울여서 대구에 가서 권영진을 지원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문에 나온 것은 박원순·이재명이었다. 이게 도대체 뭐냐"고 꼬집었다.
이같은 전략·전술의 부재는 당의 브레인, 즉 두뇌 역할을 할 싱크탱크(think-tank)의 몰락에도 한 원인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까놓고 얘기하겠다. 통합당은 뇌가 없다"며 "예전에는 싱크탱크로 여의도연구원이 있었다. 그런데 (여연) 보고서가 없어지더니, 여론조사 하나 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론조사도 틀리더라. 그걸 보고 '아, 저 당이 망가지는구나' 했다"고 했다.
"보수, 主전장에 복귀하라…공화주의·20대가 갈 길"
진 전 교수는 '길 잃은 보수정치, 해법은 무엇인가'라는 토론회 주제에 대해, 이같은 분석을 토대로 "보수가 주 전장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제언했다. "IT를 통해 성장한 한국 주류세력에는 중도층도 많다.이들을 (민주당에서) 떼어내서 이 쪽에 붙일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소수세력으로 전락하고 있는 '전통적 지지세력'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지지자들이) 보수주의자라고 자랑스레 얘기할 만한 것을 줘야 한다. 저는 '공화주의' 이념을 권하고 싶다"며 "저들(현 집권세력)이 무너뜨린 게 리퍼블릭(republic), 공적(公) 이념이다. 조국 사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고 했다. 그는 조국 사태를 거론하며 "옛날 같으면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잘렸을 텐데, 안 잘리지 않느냐. 조국은 물러났지만 '조국 프레임'은 계속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경제적 시대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의원들이 사회과학 학습을 해야"하고, "예전에 아무렇지 않았던 발언도 비판받는 '정치적 올바름'"에도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선거도 계속 막말이지 않느냐. 그러고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과학적 인식과 윤리적 의식의 현대성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현재의 통합당은 지적·윤리적으로 아직 '현대'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얘기가 된다.
전략적 공략 대상으로는 20대 청년 세대를 들었다. 그는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교수로) 학교에 다니면서 보면 20대들은 굉장히 보수적이다. 이들은 586을 '위선'으로 본다"는 점을 짚어냈다. 그는 사회의 주류가 86세대로 변화했음에도 "오히려 20대는 60대와 동조하고 있다"면서 "이들이 반감을 느끼는 데에 (보수세력이)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대들은 할아버지 세대와 동조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세대)에게 반항하는 것뿐"이라며 "민주화 세력은 (20대에게) 위선으로 비친다. 개혁·진보를 얘기하지만 기득권인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산업화 세대는 자식들에게 아파트 하나라도 물려줬고 일자리도 줬다는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야당으로서 통합당이 취해야 할 행보에 대한 조언은 이랬다. "여러분이 걸었던 그 길을 저 사람들이 따라가고 있거든요?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솔직히 2월까지 야당 노릇은 저 혼자 하지 않았느냐"며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도 "원칙과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판은 비난과 다르고, 요즘은 비판만으로도 안 된다. '비판' 자체도 산업사회적"이라며 "(상대보다) 더 나아져야 하고, 저들을 '나쁜 놈'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후진 놈'으로 만들어야 한다. 욕하는 게 아니라, 저들보다 앞서 있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그래야 (통합당에 대한) 혐오·기피의 감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최근의 정의기억연대 사건을 사례로 들며 "자꾸 저쪽을 공격하려고 하지 말라. 이용수 할머니 말씀을 잘 들어봐야 한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했다. 그는 "(정의연 사태를 보면) 지금까지의 운동 방식이 잘못됐다는 이용수 할머니 말씀은 맞다. 핵심은 '운동권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이라며 "이것을 치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회계가 어쩌니 하고 욕만 하고 있다. 그런 건 언론에 맡겨두라"고 쓴소리를 했다.
진 전 교수는 토론회 발제에 앞서 "제가 여기 와 있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는 인사말을 하며 "사실 저는 보수정당에는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관심사는 진보진영의 왼쪽"이라고 했다. 이날 토론회는 통합당 오신환 의원(재선, 서울 관악을)이 주최했고, 하태경·유의동 의원, 신보라·이준석 최고위원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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