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하자 각국 정부가 서둘러 긴급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책이 하나같이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을 내용이다. 미국 상원은 무려 2조 달러(약 2500조원)에 달하는 정부 지출 계획을 통과시켰는데, 이 가운데는 연소득 7만 5000달러 이하의 모든 성인 인구에게 현금을 직접 지급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직후에 오바마 정부도 미처 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트럼프 정부가 하고 있다.
독일 정부 또한 1560억 유로(약 211조원)에 달하는 긴급 예산을 편성했다. 균형재정에 집착하는 나라로 유명한 독일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인 행보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그 자신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에 대해 임금의 80%를 국가가 대신 부담한다는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노동당도 아닌 보수당 소속에다, 그것도 보수당 안에서 트럼프식 포퓰리즘으로 불장난을 하던 존슨 총리가 이런 정책을 꺼내든 것이다.
요 몇 주 사이에 세상이 너무도 빠른 속도로 급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이제 정말 끝나는 것만 같다. 세계 금융 위기도 신자유주의를 종식시키지 못했는데, 신종 바이러스 앞에서는 40여 년 역사의 지구화-금융화도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다. 일단 국가 개입과 재정 팽창에 채워졌던 단단한 족쇄는 풀려버렸다. 문제는 그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이냐다.
하지만 유독 한 나라만은 이런 전 지구적 분위기와 동떨어져 있다. 대한민국이다. 한국은 방역만큼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성공했지만, 경제-사회 붕괴를 막는 데는 그렇지 못하다. 정부는 이제껏 미적대기만 하다 이번 주에 들어서야 전 가구가 아니라 소득하위가구 70%에 한해, 그것도 개인별이 아니라 가구별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부족한 대책인데, 미래통합당은 그마저도 총선 이후에 지급해야 한다며 발목을 잡는다.
'정의로운 위기 극복'을 내건 정의당의 코로나 대책
이 와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일요일(3월 29일)에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발표한 코로나19 경제위기 대책이다. 정의당 대책은 '정의로운 위기 극복'을 표방하면서 '정의'의 두 원칙으로 '일자리 지키는 경제'와 '함께 사는 고통 분담'을 내건다.
그 내용을 보면, 재난수당 명목의 현금 지급, 해고 중지를 조건으로 한 기업 지원 등과 같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발표된 코로나 경제위기 대책을 포괄하고 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 자영업자들의 고통에 대한 긴급 처방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 국민에게 1인당 100만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시급히 지급한다. 소요되는 총 예산은 52조원이다. 전 가구의 2/3만을 선별해 가구별로 현금을 지급하겠다는 정부 방침과는 뚜렷이 대별되는 방안이다.
둘째, 정부가 발표한 100조원 상당의 기업 지원에 '고용 보장'이라는 분명한 전제를 단다. 코로나 경제위기 와중에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만 공적 자금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실업 대란을 최대한 방지한다.
셋째, 코로나 경제위기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된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빈곤 계층을 특별 지원한다. 최소한 3개월간 600여만 자영업자의 임대료를 지원하고 세금 및 공과금을 면제한다. 600만이 훨씬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최소 3개월간 생계지원금을 지급한다. 600만 빈곤 계층에게는 최저생활비 보장 등 긴급 복지 체계를 마련한다.
넷째, 이러한 3개월간의 긴급 조치 이후에 대대적인 그린뉴딜 공공투자로 경제를 회생시킨다. 향후 2-3년에 걸쳐 에너지 체제 전환에 150조원을 투자해 경제-생태 위기에 맞서 사회를 재건해나간다.
이와 같은 정의당의 코로나 경제위기 대책은 적어도 원내 정당들이 발표한 입장 가운데에는 가장 돋보인다. 지금 정말 긴급히 필요한 대책들을 빠짐없이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럴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지난 몇 주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지점들인가?
정의당 대책이 담고 있는 새로운 시대 정신
첫째, 정의당 대책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부상 중인 세계 경제의 새로운 표준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지구화-금융화로 구축됐던 거대한 구조물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어느 나라든 국가가 유일한 구원자로 나서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은 통화 흐름을 창출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국가는 2008년 금융 위기에서 이미 훈련한 바 있는 비전통적 통화 정책(이른바 양적 완화)에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억압됐던 재정 정책을 더해 강력한 방어력을 과시하는 중이다.
이는 주류 경제학 교과서가 늘 가리고 싶어 하는 심층의 진실을 드러낸다. 주류 교과서는 국가가 시장을 중심으로 한 자생적 경제 질서의 거추장스러운 파생물쯤인 듯 다룬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시장을 비롯한 모든 경제 질서는 사회의 기능적 대변자인 국가가 그 골간을 지탱하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 사회에 꼭 필요한 생산 설비가 폐기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것도, 가계가 더 많은 빚을 떠안아 말 그대로 죽음에 내몰리지 않게 막을 수 있는 것도 국가뿐이다. 평소에는 인플레이션 위험이니 균형재정이니 하며 온갖 교설로 국가의 핵심 능력(통화와 관련된)에 족쇄를 채우지만, 이제는 다름 아닌 국가의 그 능력에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물론 이런 국가의 부상 자체가 새 시대의 내용을 모두 채워줄 수는 없다. 이는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시장에 가려졌던 국가가 전면에 부상하고 난 뒤에 새로운 혼란이나 독재가 나타날지, 아니면 신자유주의가 가로막았던 민주주의의 전진과 확산이 재개될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두 가능성이 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무엇보다도 옛 시대가 끝났음을, 2020년 봄 어느 시점에 인류가 전혀 다른 시대에 진입했음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대한민국 기획재정부처럼 이를 끝내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강력한 기구와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문재인 정부-더불어민주당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확장재정정책을 제시함으로써 바로 이 잠에서 깨어나야 함을 촉구하는 셈이다.
둘째, 정의당 대책은 코로나 위기가 단지 코로나 위기만이 아님을 직시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 이전에 이미 지구 자본주의는 다중 위기에 빠져 있었으며, 코로나 위기는 다른 여러 위기들에 파국적인 양상을 더하고 있다. 그 중의 핵심은 불평등 위기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게 모든 인간 개체는 평등하지만, 이 바이러스가 몰고 온 경제-사회적 고통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최대 희생자들, 즉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빈곤 계층이 가장 먼저 생존 위기에 내몰린다.
따라서 코로나 대책은 반드시 이전 경제 질서와는 정반대의 분배-재분배 구조를 담아야 한다. 이제껏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빈곤 계층이 분배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했다면, 코로나 경제위기 와중에는 이들에게 대책이 집중돼야 한다. 실제로 코로나 경제위기의 최대 피해 대중이 이들이기 때문일뿐더러, 또한 이것이 코로나 위기만이 아니라 기존 불평등 위기까지 해소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면에서 생태 위기에 대처하는 일종의 전시 경제 체제가 불평등 위기 해결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관련기사 : "지금 75억 인류는 대재앙의 시간으로 걸어가고 있다", <프레시안> 2020년 1월 21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셋째, 정의당 대책은 이상의 원칙들이 단기 대책뿐만 아니라 장기 정책으로 지속돼야 함을 분명히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 자체도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하물며 이 확산이 낳은 경제-사회 위기는 적어도 2008년 금융 위기만큼은 긴 여진을 남길 것이다. 더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신종 바이러스 확산은 기후 변화가 촉발한 여러 생태 위기 중 하나일 뿐이다. 코로나19가 진정되더라도 우리에게는 기후 재난이 남아 있다.
그렇기에 세계 각국의 코로나 경제위기 대책에 담긴 대담한 새 원칙들은 앞으로 계속 새 질서의 기둥이 되어야만 한다. 이미 이번 사태 이전에 각국에서 제기됐던 녹색 뉴딜(Green New Deal)은 오늘날 모든 생태 위기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는 기후 재난에 대응하는 내용이기에 코로나 대책과도 상통한다. 공공 주도 대규모 투자, 생태적 전환과 동시에 불평등 위기의 역전 모색, 인류 문명이 초래한 위험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일자리 창출 등등. 달리 말하면, 코로나 뉴딜은 반드시 녹색 뉴딜로 이어지고 확대돼야 한다. 인류 문명의 새 활로는 오직 여기에 있다.
코로나 고통분담에서 강조돼야만 하는 것 - '땅'과 '땀'의 우열관계 역전
그렇다고 정의당 대책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결정적으로 아쉬운 대목이 있다. 어쩌면 너무 많은 내용을 한 번에 다 발표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코로나 뉴딜을 완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한 가지 정책 요소가 빠져 있다. 그것은 발전주의-신자유주의 시기를 번갈아 겪으며 한국 사회에 굳어진 부동산 불로소득 계층과 나머지 대중 사이의 가치와 힘, 자원의 우열관계를 뒤집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발전주의(한국식 표현은 박정희주의)와 신자유주의(한국식 표현은 김대중주의)를 잇달아 겪으며 한국 사회에서 늘 승자가 된 이들은 누구인가? '땅'으로 상징되는 부동산 불로소득 계층이다. 반면에 '땀'으로 상징되는 나머지 대중은 단순한 상대적 박탈감을 넘어 각종 임대료를 통해 수탈까지 당했다.
이번에도 땅과 땀 사이의 이러한 우열관계가 그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사회 전체가 모두 겪는 고통은 사회 전체가 나눠서 지어야 한다. 한데 이제껏 대다수 타인의 고통을 전제로 지나치게 많은 이익을 착복해온 집단이 있다면, 바로 지금과 같은 위기야말로 이들이 고통을 제대로 분담해야 할 때다. 국가가 확장재정정책을 펼치면서도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세수를 늘려야 할 텐데, 이 짐을 부동산 불로소득 계층이 짊어져야 한다. 즉, 부동산 보유세를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하며, 필요하면 장기간 임대료를 동결하거나 면제해야 한다.
이런 조치는 재정 정책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한국처럼 부동산 불패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시중에 통화 공급이 증가할수록 이것이 부동산 가격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복지 지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임대료가 오를 수 있고, 극심한 불황 와중에 아파트 가격만 오르는 기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서도 한국에서 확장재정정책은 강력한 부동산 불평등 해소 정책과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농지 개혁 이후 처음으로 '땀'이 '땅'에 승리하는 장면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의당의 코로나 경제위기 대책에 이런 '2020년판 부유세'까지 포함됐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선거운동 기간 중에 이런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제21대 총선의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은 각 당이 내놓은 코로나 경제위기 대책이 되어야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코로나 대책을 둘러싼 논점들은 제21대 국회 임기 내내 새로운 경제 질서를 둘러싼 격전의 쟁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야만 할 총선이 지금 너무도 우습게 돌아가고 있다. 양대 정당과 그 위성 정당들이 내놓는 처방은 부실하기 이를 데 없고, 그들의 머릿속에는 2020년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독재'와 '탄핵'의 상상만이 난무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동료 시민들에게, 진짜로 주목해야 할 바에 주목하자고 외치는 수밖에 없겠다. 저 헛된 몽상들을 깨우도록, 더욱더 시끄럽게 외치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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