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2호선 구의역 9-4. 2016년 5월 28일, 오후 4시 59분 '열차 진입 중에 스크린도어가 열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김모(20) 씨가 사망한 자리다.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을 하던 김 씨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열차가 역내로 들어오면서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김 씨가 끼이는 참사가 발생했다.
특성화고 출신인 김 씨는 일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신참이었다. 서울메트로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도 아니었다.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은성 PSD 소속이었다. 서울메트로 스크린도어의 유지·관리를 담당하는 하청업체다. 김 씨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당시 김 씨가 소지한 가방에는 숟가락과 일회용 나무젓가락, 그리고 컵라면이 들어 있었다. 불시에 수리 신고 호출이 들어오는지라 식사시간이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변 동료들은 입을 모았다.
그런 김 씨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현재, 김 씨가 일한 작업 환경은 얼마나 변했을까.
26일 서울 광진구 구의역 1번출구에 모인 '구의역참사2주기추모사업단'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나다' 추모문화제를 열고 현재를 사는 비정규직, 그리고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날 문화제에 참여한 200명의 시민은 '멈추자, 위험의 외주화', '바꾸자, 청년 비정규직 노동' 등의 구호를 외쳤다
구의역 사고 2년 후, 스크린도어 사고 절반으로 줄어
김 씨의 죽음 뒤, 2년이 지난 지금, 여러 변화는 있었다. 서울시가 지난 24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박원순 시장의 약속대로 지하철의 외주 직원이었던 정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서울시는 스크린도어 안전 담당 외주 정비원 전원을 2016년 9월, 직영으로 전환하고, 인력도 146명에서 206명으로 늘렸다. 올해 3월에는 이들을 포함한 서울교통공사의 무기계약직 전원(1285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정규직 전환으로 노동자의 연 급여가 최대 95% 오르는 등 처우도 대폭 개선됐다. 김 씨와 비슷한 처우에 있던 동료의 경우, 일반직 전환 후 연봉이 3980여만 원으로 오른다. 이전에는 약 1940만 원을 받았다. 95%가 상승한 셈이다.
스크린 도어 고장 건수도 2년 전과 비교해 절반으로 줄었다. 올해 1월~4월 스크린도어 고장 건수는 961건으로 2017년(1487건), 2016년(1876건)에 비해 각각 35%, 49% 감소했다. 서울시는 안전 시스템과 매뉴얼을 보강한 결과라고 자평한다.
지속적인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전동차, 주요 핵심부품, 신호 시스템 등 장애·노후 인프라 보강에 2017년도에만 5465억 원을 투자했다. 비상상황 발생 시 탈출을 방해했던 '승강장안전문 고정문'을 개폐 가능한 비상문으로 교체하는 작업은 연내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네가 떠난 이후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변하고 있다"
이렇듯 김 씨의 죽음 이후, 서울 지하철은 여러 부분에서 변화가 있어왔지만, 정작 현장 노동자가 느끼는 변화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김 씨와 같은 스크린도어 정비업체인 은성PSD 소속인 임선재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 은성PSD 1지회장은 이날 추모 편지로 "네가 허망하게 떠난 이후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변하고 있다"며 "이율과 효율보다 생명과 안전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임 지회장은 "노동자들은 외주화와 용역이 아닌 직고용, 나아가 정규직이 돼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높아지고 있다"며 "꽃다운 스무 살이던 너의 죽음이 가져다준 대가라기엔 보잘것없지만, 이런 노력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더디게 변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었다. 임 지회장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고 직원 연봉을 95% 올렸다는 서울시 발표를 두고 "무늬만 정규직일 뿐 전환 과정에서 7급보·경력미인정 등 기존 사규에도 없던 또 다른 차별이 생겼고 월급이 5000원∼1만 원만 오르거나 심지어 삭감된 직원도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임 지회장은 "그나마 우리(정비업체)는 정규직 전환이라도 됐지만, 도시철도엔지니어링(ENG) 등은 여전히 용역과 다를 바 없는 자회사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임 지회장은 "그럼에도 네 죽음이 네 잘못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진정으로 생명과 안전이 우선시되고 모든 차별이 사라진 현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너를 추모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죽어야만 개선할 수 있는가"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미흡할지 모르나 서울시는 그나마 구의역 사고 이후, 여러 부분에서 변화를 가져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또 다른 '김 씨'가 일하는 사회 여러 분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고 있다. 제2의, 제3의 김 씨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날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이은아 특성화고졸업생노동조합 위원장은 "김 씨는 주어진 일만 열심히 했을 뿐인데 목숨을 잃었다"며 "이것이 지금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들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김 씨의 죽음 이후, 서울시가 안전대책을 마련한 이후, 스크린도어 사고율이 절반으로 줄었다"며 "안타까운 점은 김 씨의 죽음 이후, 그러한 처우개선을 했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죽어야만 개선을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위원장은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들은 여전히 작업현장에서 목숨을 내놓고 일하고 있다"며 "값싼 부품으로 장시간 노동과 학력차별, 위험한 작업과 성희롱에 노출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이러한 현실은 아직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며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야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다 죽고 나서야 변하는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생명안전선언 발표..."생명의 안전 보호받는 건 기본적 인권"
이날 추모문화제에서는 안전 사회를 위한 요구사항도 발표됐다. 이날 참석자들은 '생명안전선언'을 발표하며 노동자가 일하는 현장에서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임을 확인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안전하게 살 수 있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법률로 보장해야 한다"며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안전기본법' 재정과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을 처벌할 수 있는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했다.
또한 이들은 “노동자들에게 위험한 작업을 거부하거나 중단할 권리, 업무의 모든 위험에 대해 알 권리가 충분히 보장돼야 한다"며 노동자에게 위험한 작업을 거부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외에도 '위험의 외주화'를 언급하며 "30대 기업 산재사망자 중 95%가 하청노동자였다"며 "기업들이 안전장치를 강화하는 대신 권리 없는 비정규직에게 위험을 전가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외주화는 곧바로 안전을 위협한다"며 "비정규직을 죽음의 행렬로 내모는 위험의 외주화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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